< 곽란의 서머 캠프 (6) >
***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유명선의 자택에 전화를 걸 때마다 종종 통화하며 익숙해진 권제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진혁인데요-. 네.”
다행히 잠시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늙었다고 일을 놓으면 금세 병들고 죽는다며 소일거리라도 찾는 유명선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노인네들이 자식을 돌보기 위해 도시를 전전하면 금방 늙어 스러진다던, 조일헌이 예전에 해준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하여, 유명선은 뭔가에 집중할 때 직접 전화를 받는 일이 없다고 했다. 끊겼던 흐름을 다시 잡는 것이 젊을 때와 비교해 현저히 어려운 탓이라던가.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를 삼십여 초, 수화기 너머에서 노인치고 힘찬 목소리가 진혁을 반겼다.
“오늘 안마을 가서 뒷얘기 듣고 왔는데요-.”
- 어허허허-!
수화기 너머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직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리도 반가울 일인가?
“······ 근처에 나물 캐던 처자가 있었대요. ······ 그런데 그······ 고추가······ 네, 네 그렇죠. 아이고,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서, 섰대요······.”
- 어허허허허허!
이 영감님 숨이 넘어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격한 리액션이 넘어왔다.
웃음소리만으로도 벌겋게 익은 유명선의 얼굴이 망막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침내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유명선은 평생의 한을 푼 사람처럼 아련하게 감상을 내놓았다.
- 어허허허허!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구나. 어디 가서도 쉽게 듣지 못할 이야기야.
한데 유명선의 음성에는 야릇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천 할아버지가 직접 들려드려야 맛이 살 텐데요.”
- 이야기의 맛이라는 것도 알고 제법이구나. 누가 하느냐도 중요한 게 이야기겠지. 안 되겠다. 조만간 직접 가야겠다.
이야기는 핑계였고 사람이 그리우신 거였구나.
그룹 회장이라고 어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친구나 동생처럼 대하는 천길룡이 보고 싶어 그런 건 아니실까.
“괜찮으시겠어요?”
- 이 할애비가 젊을 때는 염산, 알코올 판다고 대한민국 땅 안 밟은 곳이 없다. 그 정도 거리는 뒷산 산책만큼이나 쉽지.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허세 없이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상습적이지는 않아서, 간혹 떠는 너스레가 멋스러운 할아버지였다.
“바쁘신 거 아닌가 해서요.”
- 어허허. 이 할애비 걱정도 할 줄 알고 품이 많이 넓어졌구나. 당장 죽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정리했으니 염려할 것 없다.
“아······.”
죽는다는 소리 좀 안 했으면 좋으련만.
노인네들은 뭘 먹고 싶다는 말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입에 올리는 듯했다. 욕심이 사라져 곧 다가올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일까? 도무지 내려놓지 못하고 노욕을 부리는 이도 많다던데, 그것도 사람 나름인 듯하다.
- 그런데 그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신다더냐?
“아, 안 계세요. 그분들 아들이 벌써 마흔일곱인가 됐어요.”
- 그래, 그렇구나. 아들이라는 사람은 잘살고?
“면사무소 직원이랑 가을에 결혼해요. 살림은 먼저 합쳤구요.”
- 아하-. 그러고 보니 막내 돌잔치 때 본 양반이 조가라고 했었지. 그 친구였구먼. 그날 분명 그 사람 부친의 이야기라고 들었는데도 이런다. 늙으니 할애비 기억력이 이 모양이다.
“예. 근데 저희 아빠가 형이라고 부르는데요, 그 형은 저한테도 형이라고 부르래요. 동네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시키고요. 아저씨라고 하면 화를 내는데······.”
종알종알-.
진혁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읊었다.
‘내가 왜 이러냐.’
장군이에게 깐족대는 것부터, 말이 많아진 것까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며 생긴 버릇인 듯했다.
- 어허허허허-! 재밌는 사람이구먼.
대충 끊으려 해도 유명선이 너무 즐거워해서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수화기를 댄 귀에서 땀이 흘렀다.
그래도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다.
‘이상하게 기분 좋네.’
*
귀에서 흐른 땀을 씻어내고 물을 끓였다.
‘에어컨 빵빵하게 돌려도 덥다. 언제 가을 오냐.’
머그잔에 프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
끓는 물을 부어 잘 녹인 후 냉수를 섞어 적당히 따뜻하게 만들었다.
맛을 보려는데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던 유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 됐냐요?”
은근 반말처럼 들리는 말투였으나 진혁은 문제 삼지 않았다.
‘내가 참아야지.’
커피 사건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혼나지는 않았으나, 진혁은 두 사람의 눈동자에 한심하다는 빛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서운하면서도 부끄러운, 복잡한 감정이 마음에 새겨지던 순간이었다.
후릅-.
먼저 온도와 맛을 점검한 진혁은 유진이에게 머그잔을 건넸다.
“다 됐습니다-. 드셔도 됩니다.”
“오냐요-.”
오냐오냐했더니 얘도 선 넘네······.
그래도 이때뿐이다.
유진이는 우유를 대접받을 때만 역할 놀이 비슷한 상황극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쁜 내 동생.’
진혁은 유진이의 머리통을 한 번 쓰다듬은 후 요람에서 잠든 정원이를 살폈다.
순둥이 정원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가끔 입을 뻐끔거리고 눈썹을 꿈틀댈 뿐, 팔다리를 버둥거리지도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어른들은 숫구멍이라고 불렀다.
아기의 머리뼈가 아직 여물지 않은 곳 말이다. 천길룡은 앞숫구멍과 뒷숫구멍을 대천문과 소천문으로 불렀는데, 조심스레 손을 얹으면 맥박이 느껴지고, 아기의 호흡을 따라 부풀었다 수축되기를 반복했다.
정원이의 숫구멍은 돌을 지나며 많이 좁아져 있었는데, 몇 달 후면 완전히 닫힐 듯 보였다.
“엄마가 거기 만지지 말랬다요.”
우유를 마시던 유진이가 아기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은 오빠를 핀잔했다.
“으응-. 그냥 기도했어.”
“오빠는 교회 안 간다요.”
“교회에 가지 않아도 기도는 할 수 있는 거야.”
“뭐라고 기도했다요?”
“건강하게 크라고.”
입가에 하얀 우유를 가득 묻힌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도 언젠가 들어본 말 같았다.
분명 지금의 오빠 목소리와 비슷한 음성이었다.
***
강헌창이 전자신호총을 사용하고, 민용락이 기록을 하는 가운데 스타트 훈련을 진행했다.
진혁은 민용락이 기록한 용지를 거듭 살폈다.
몇 가지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누가 스타트를 끊을 것인가.
직선주로 주력이 좋은 염병택을 2번주자로 고정하고, 곡선주로에서 조금이나마 강점을 보이는 조슬찬과 순간속도가 좋은 박상기를 스타트 주자로 고민한 것인데.
‘차라리 병택이가 하는 게 낫겠네.’
조슬찬은 신호총에 대한 반응 속도가 떨어졌다.
박상기도 나을 것은 없었다. 신호와 동시에 다리를 차는 동작은 가능했으나 무의식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치 파울을 저지른 축구 선수가 심판 휘슬에 위축되는 느낌이랄까.
‘순서 바꿔서 연습해봐야겠네.’
조슬찬은 아무래도 익숙한 3번 주자를 선호하는 눈치였고, 박상기는 스타트만 아니면 괜찮다는 눈빛이었다.
선수이기 이전에 친구고 아이들이다. 내키지 않는 역할을 억지로 부여한다면 일방통행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 뭘까. 성적이 나온다 해서 이들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주자.’
진혁은 고민이 깊을수록, 문제가 어려울수록 기본을 떠올리려 애썼다. 김영태 선생님은 항상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가르친다고 했다.
“얘들아, 잠깐 쉬었다가 배턴 터치 연습하자.”
자신의 신호총에 대한 부담을 알고 있는 조슬찬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이상허게 총을 자꾸 보구 싶네이-.”
“조슬이 너는 그래서 백 미터 시합만 나가면 파울 하는 거야.”
염병택이 지적할 때, 뚱한 표정의 박상기도 나름대로 제 문제점을 분석했다.
“······나는 청각 반응이 느린가 봐.”
“괜찮아. 연습하면서 최적의 순번을 찾아보자.”
최고의 결과에 대한 욕심과 동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친구들이 즐거워야 한다. 도 대회 예선도 어렵다는 민용락의 객관적 분석을 이미 접한 터였다. 어차피 방학이 끝나자마자 열리는 도 대회가 친구들과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다.
‘1등 못 하면 마는 거지 뭐.’
***
저녁식사 후 진혁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삶은 오리알을 먹으며 수업에 집중했다.
수로에 둥둥 떠다니는 녀석들이 밤이면 천적을 피해 우리에 들어가 낳은 알이었다.
뭘 아는지 함께 수업을 듣던 유진이가 진혁에게 오리알을 내밀었다.
“오빠도 먹어라요. 맛있다요.”
“그럴까?”
진혁은 받아든 알을 잠시 물끄러미 보았다.
종종 먹던 것인데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이모였겠지. 가끔 조용한 밤에 삶은 달걀 두고 간 사람.’
다락방 문이 삐거덕- 열리면 둥근 양은 쟁반이 미끄러지듯 들어왔었다.
삶은 계란 세 개에 물 한잔과 약간의 고운 소금이 늘 함께였다.
김응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하자, 잊었던 선의가 확대되어 다가왔다.
달걀보다 큰 오리알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오리알은 삶은 계란처럼 퍽퍽하지 않아 목이 막히지 않고, 노른자도 쫀득했다. 크기도 커서 배를 채우기 좋아 진혁과 유진이가 즐겨 먹는 간식이다.
‘오늘은 왜 목이 메냐.’
가슴을 두드린 후 수업을 재개했다.
박상기는 학교 선생님보다 진혁이 더 잘 가르쳐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했다. 오빠들 틈에 앉아 함께 수업을 듣던 유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슬찬이 까주는 삶은 오리알을 먹으면서였다.
염병택과 조슬찬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혁이는 영어를 왜케 잘혀?”
“나는 교과서를 외웠어.”
뭐라 뭐라 웅얼거리려던 조슬찬이 입을 다물었다. 진혁이는 못 하는 게 없어. 재수 없는 소리도 잘하고.
여덟 시가 넘어가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친구도 있었으나 지루하지 않도록 진도를 빨리 뺐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수학, 지구과학······.”
국영수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다른 과목을 자습하도록 하면 보나 마나 딴생각을 할 게 뻔했다. 힘이 남아도는 나이인 데다 운동까지 해서 에너지가 왕성한 녀석들 아닌가. 그래서 다른 과목도 시간표에 적당히 넣었다.
“으아아아아- 잠이 쏟아진다.”
뿌우우우웅-.
염병택이 기지개를 켜다가 괄약근을 개방했다.
수업 내내 다섯 개가 넘는 오리알을 먹더니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우우우웁-!”
“가스! 가스! 가스!”
아이들이 모두 코를 막고 탈출을 감행할 때, 진혁은 저도 모르게 능숙한 모션으로 화생방 경보를 날렸다. 조슬찬과 염병택이 사용하는 방에서 수업하기를 천만다행이었다.
“어버버- 유진이!”
비켜라, 이놈들아!
진혁은 다시 들어가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코를 막고 있는 유진이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혼자 살겠다고 동생을 내버린 자신을 나무라며.
*
열 시가 넘어 각자 자러 갔을 때였다.
“으아아아악-! 염병이 똥을 싸네 아주!”
조슬찬이 괴성을 지르며 방에서 뛰어나왔다.
“히히히히히-!”
또 가스를 살포한 염병택이 배를 잡고 킬킬대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노랗게 질린 조슬찬을 위해 진혁이 희생하기로 했다.
“내 방에서 같이 자자.”
침대에 누운 조슬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태어나서 제일루 재밌으면서 지루하고, 길면서 짧은 방학이다.”
“그게 무슨-.”
드르릉-.
무슨 뜻인지 물으려 했으나 조슬찬은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는 곯아떨어진 후였다.
아, 그런데 슬찬이 이 자식 코 고네.
전에 놀러 왔을 때는 코골이가 없었는데, 그만큼 훈련이 고단한 탓이려니.
진혁은 베개를 챙겨 거실로 내려갔다.
회사 워크숍 때도 코골이 팀원들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었다. 그때 잠을 설친 생각만 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고과 짜게 줄걸 그랬나.
‘식욕 다음으로 수면욕!’
수면은 절대 방해받을 수 없다.
냉장고 컴프레서 소리가 좀 거슬리지만 어항 기포기 소리는 백색소음에 가까우니 서로 퉁치면 될 것이다.
‘후우- 내게 강 같은 평화.’
진혁에게도 고난의 하루였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을 때였다.
퉁- 퉁- 퉁-. 스르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괴기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냐······.’
잔잔했던 진혁의 눈동자에 한기가 돌며 소리 원점을 찾아 스르륵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