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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57화 (157/338)

< 산책 (4) >

***

구봉산을 향해 달리는 아이들의 반응은 첫 주와 사뭇 달랐다.

쉬지 않고 공기를 가르는 팔다리와, 그에 대비되는 여유 넘치는 표정과 호흡은 지난주 저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으아아! 기분 제일루 좋다!”

“진짜 째진다!”

“······ 이 맛에 달리는 거지.”

후후-하-, 후웁-후-.

폐가 두 배로 커진 듯 한껏 빨아들인 공기를 머플러처럼 동그랗게 말린 입으로 강하게 뿜는 모습, 리듬감마저 느껴지는 호흡은 2기통 모터사이클을 떠올리게 했다.

“이히히-. 야, 쟈덜 뭇 따라오는디?”

뒤를 돌아본 조슬찬이 시시덕거렸다.

장군이와 부하견들은 저수지 근처 그늘에 모여 앉아 혀를 빼물고 있었다. 아무리 육상부라 해도 근육견들의 주력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더워지는 계절, 아무래도 털이 많은 녀석들이라 체온이 급격히 상승했을 터였다.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진혁은 다시 한번 담금질과 성장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바로 다음 단계로 가도 되겠어.’

벌크업을 했으니 이제 데피니션을······, 아니 이게 아니고.

크라우칭 스타트와 스탠딩 스타트 훈련을 할 때가 되었다.

유세라가 구해준 전자스타트건을 사용해 반응속도를 측정하고, 스탠딩 상태에서 배턴을 받은 후의 출발속도도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순번을 매길 계획이다.

“아, 산이서 달리는 건 아직 쫌 힘든디?”

“무릎 아프다.”

“······ 무릎 아니야. 무릎 위쪽에 잡아주는 근육이지.”

박상기가 설명한 덕분에 진혁은 말을 아낄 수 있었다.

“듣구 보니 그르네?”

산에 오르는 것만큼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운동도 드물다. 뿐만 아니라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힘도 좋아진다. 때문에 산악구보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코스였다.

“땅 디딜 때 허벅지를 꽉 조여! 그래야 무릎도 안 다치고 근육도 단련되는 거야!”

아이들을 따라오는 게 힘들지도 않은지, 강헌창은 코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힘들어 보이기는커녕 진혁을 따라 몇 년을 달린 길을 달리며 여유가 넘쳤다.

“내려갈 때는 허벅지 뒤에 쥐 올라오는디?”

“느낌만 그렇지, 뭉치진 않는다.”

“······그거 햄스트링 단련되는 거야.”

2주 차 훈련도 이틀만 남았을 무렵, 아이들은 서로 느낀 점과, 아는 것을 공유하며 변화를 즐기기에 이르렀다.

하산 후 집까지 달려가는 길. 홍시와 천마, 광마까지 이끌고 장군이마저 귀가한 길에는 아지랑이만이 남아 주로를 지켰다. 현기증처럼 올라오는 그 열기를 헤치고 여섯 개의 바람이 달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수들은 목적지까지 최적의 컨디션을 고려해 피치를 올렸다.

‘신기허다.’

‘응. 내 몸이 아닌 거 같다.’

눈이 마주친 조슬찬과 염병택의 미소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등 뒤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가까워오면 진혁은 거리를 벌리고, 다시 좁혀 오면 벌렸다.

끝내 진혁을 따라잡지 못했으나, 집에 도착했을 때 무릎을 짚은 친구는 없었다. 전보다 커진 가슴을 천천히 들썩일 뿐.

‘이거 봐. 하니까 되잖아.’

하면 되고,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면 그만이다.

결국은 다 되는 거다.

역시 논리적이다.

***

벌려둔 일이 많으니 태어난 후 가장 바쁜 방학이었다.

합숙 훈련과 SSS 외에도 직접 챙겨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택아, 오늘 아버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봐 줄래?”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 아저씨 나도 알아.”

몇 년 새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고 하나, 읍내에서 오래 상업 활동을 한 사람들은 조합 등의 형태로 묶여 서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은근슬쩍 물어본 것인데, 염병택은 황영모에 대해 잘 안다고 했다.

“그 아저씨, 어릴 때 가끔 우리 다방에 놀러 왔어. 다방 하는 사람끼리는 다 아는 사람이고 동업자래.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먼저 장사하던 사람들한테 인사 안 하고 개업하면 장사 못 한대.”

그것도 돈이 도는 일이랍시고 이권 나눠먹기 때문이려나.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권리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누리는 사람들. 그 방면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는 진혁은, 승객이 많은 일부 거점을 장악하고 횡포를 일삼다 언론에 노출되던 드라이버들을 떠올렸다.

염병택은 묻지 않은 말까지 늘어놓았다.

“우리 아빠도 그 아저씨 싫어해. 처자식은 관심 없고 술 먹고 놀음만 한다고. 그런데 어떤 때 보면 부러워하는 거 같다?”

“부러워하셔?”

“응. 그 아저씨네 누나들 공부 되게 잘한대. 아빠가 개새끼라서 엄마 불쌍하다고 누나들이 그렇게 열심인 거래. 그래서 우리 아빠가, ‘아- 나도 놀음하고 술을 마셔야 우리 병택이가 공부를 할라나-’ 한숨 쉬다가 우리 엄마한테 국자로 머리 맞았어.”

이히히히히-.

염병택이 배를 쥐고 웃자, 갈색 금속처럼 빛나는 얼굴에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함께 웃는 진혁의 얼굴이라고 하얀 건 아니었다.

뙤약볕에서 열흘을 뛰어다녔으니 익지 않는 게 이상한 노릇이다.

벌겋게 익은 진혁도 매일 어깨와 목 부위에서 피부가 일어나 씻을 때마다 허물을 벗는 중이었다.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거나 두건을 둘러도 금세 땀에 씻겨 내려가니 화상을 입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후 네 시까지 자습이니까, 그때 통화할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진혁이 순진한 친구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염병택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 부탁해. 나는 또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점심 먹고 갈 데가 있어.”

진혁은 눈을 찡긋할 뿐,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윙크하는 손광연과 홍기준을 보며 질색했었으면서 자기가 그러고 있다니, 사람이 변하긴 변하는 모양이다.

***

아침식사 후 수업을 진행하고, 점심식사 후 자습시간을 부여한 진혁은 막걸리를 받아 자전거에 올랐다.

“할아버지이-, 뒷얘기 좀 들려주세요.”

돗자리와 주전자, 안주까지 챙긴 진혁이 졸졸 따랐으나, 천길룡은 곰방대를 물고 시원한 대나무숲을 가로지르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늘 그랬듯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채였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천길룡은 연신 웃음을 흘렸다.

대나무숲 언저리에 이르러, 그믐을 즈음해 사리 물때를 맞아 물이 가득 들어찬 바다를 곰방대로 가리켰다.

“어허허-. 지넥아, 저기 좀 보거라. 물색이 저리 탁해도 저게 다 생명인 게야. 후랑크톤이라는 놈들이 뻘에서 양분을 취하고, 그걸 또 이러저러한 놈들이 처먹고 말이다. 결국엔 사람이 처먹지.”

“예······.”

진혁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돗자리를 펴고 사발에 막걸리를 따랐다.

가끔 유명선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진혁은 몸 둘 바를 몰랐다.

할아버지라 칭하는 사람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그룹의 회장, 그런 사람과 사적으로 통화하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게다가 체육관까지 선물해 준 사람인데 궁금증을 하나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진혁의 타들어가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길룡은 딴소리만 해댔다.

“그믐밤에 물이 가득 들어오면 내가 뭘 하고 노는지 아느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진혁은 목소리 대신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지. 그럼 아주 은으은-하게 불이 켜진다. 조가 놈에게 물으니 후랑크톤이라고 하더구나. 우리 형님 살아계실 적에, 바다에 빠져 죽은 원혼들이 흘린 눈물이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더니. 이 늙은이가 순진한 아우에게 뻥을 친 게여.”

가로등 없는 방파제에서 진혁도 본 일이 있다.

테트라포드에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명멸하던, 야광빛을 닮은 연두색 불빛.

‘그게 플랑크톤이었나.’

해외 유명 관광지의 야경 소개 영상처럼 호들갑 떨 정도의 화려함은 아니었지만, 시력을 집중하면 충분히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마도 영양분이 풍부해서 그렇겠거니.

그리 생각하며 이미 비워진 사발에 막걸리를 따랐다.

천길룡은 가볍게 한 사발을 비우고 진혁에게 잔을 내밀었다.

“아니, 저는 아직-.”

“더 따르라고 이놈아.”

“아, 예······.”

쩝.

말이라도 맛이나 보라는 말씀을 안 하시네.

사발을 채우는 탁한 액체의 향기에, 입안에 침이 고인 진혁은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크으-, 좋구먼. 요새 쐬주 마시는 놈덜이 많더라만, 이런 날 쐬주 마시다가는 걍 뒈지는 법이다. 쐬주는 배도 안 불러서 위험해.”

“예······.”

“탁주가 최고지. 배도 든드은-허고 기분도 딱 좋지 않더냐.”

한 모금도 안 주시면서 말씀은 참 잘하시네요.

한 주전자를 다 드셨는데 배가 부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진혁은 육포를 찢어 두 손으로 건넸다.

그러나 천길룡은 다른 대접에 든 총각김치를 손으로 집어 으적으적 씹었다.

‘틀니인가?’

그리 의심될 정도로 천길룡의 치아는 하얗고 단단해 보였다.

아빠도 치아 관리를 잘하는 편이지만, 가끔 치석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천길룡만큼 건치는 아닐 터였다. 손광연은 치과에 가는 게 무섭다며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조가 놈 무생이 말이다.”

“예!”

드디어 뒷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진혁은 꿇은 무릎 위에 다소곳이 손을 올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대나무숲의 사락거리는 소리가 청취를 방해할까 두려웠다.

“알레르기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무식쟁이들도 옻 오르는 건 두려워한단다. 조가 놈은 특히 체질에 안 받았던 게야. 거의 죽을 뻔했다더구나.”

“그런데······.”

어찌 되었든 살아남았으니 자식을 봤을 것 같은데요?

총각 시절에 죽었다면 조일헌은 태어나지 못했을 게 아닌가.

“근처에서 나물 캐던 처자가 있었다는 게여. 깊은 산속에서 어떤 개새끼가 낑낑거리나 싶어서 갔더니 웬 놈이 궁뎅이를 까고 엎어져 있더라는 거여.”

쿡-.

진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급히 막았다.

엉덩이만 까고 쓰러진 나무꾼의 모습을 상상해버린 탓이다.

“얼굴은 벌건데 눈은 까뒤집었지, 입에는 거품을 물었지. 아이코! 이놈이 똥 싸다 뱀이라는 놈한테 물렸구나, 싶었다는 게여. 헌데 방도가 있나? 이 처자가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내려온 게지.”

“옷은요? 엉덩이는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등장인물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물었다.

“잘 물었다! 홑바지 대충 올리고 허리끈은 못 묶었지. 남녀가 유별하지 않겠냐. 게다가 뱀에 물린 줄 알었으니 어차피 확인하려면 벗기지 않았겠냐고-.”

아,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 집까지 와서는 아무리 뒤져봐도 뱀에 물린 흔적이 없거든?”

거기까지 말한 천길룡은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진혁을 보았다.

“그래서요? 그다음은요?”

“아이고-, 취한다아-.”

진혁의 기대에도 불구, 천길룡은 대자로 누워 곰방대를 물었다.

그야말로 신선놀음으로 보이는 팔자였다.

“그래서 뭘 어떻게 돼? 이 약, 저 약 집에 있는 약은 죄다 뒤지다가 허연 가루가 있어서 그걸 멕인 게지. 그런데 이 조가 놈의 좆이라는 놈이 뱀처럼 대가리를 쳐드는 거 아니겄어?”

천길룡이 주먹을 쥐어 팔꿈치를 서서히 접자 팔이 불쑥 올라왔다. 뱀이 대가리를 쳐들 듯.

“나중에 보니 먹인 약이 마 가루였다는 거여.”

“마요? 대마?”

“그거 말고 천마 말이다, 이눔아.”

아, 이따금 아빠가 바쁘다며 식사 대용으로 뜨거운 물에 타 드시던 하얀 가루인가 보다. 진혁은 대상의 이미지를 급히 수정했다. 향정신성 물질에서 건강식품으로.

“봤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 게지, 그 처자 깜냥으로는 말이다. 흐아암-. 책임감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나도 모른다.”

이 할아버지가 모르시는 것도 있다니 신기하네.

아무튼.

그렇게 눈이 맞아 혼인하여 조일헌의 부모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운수 좋은 놈은 똥 싸다 엎어져도 배필을 만나는 게 인생인 게지. 부럽다, 시벌 것. 부러워······.”

드르릉-.

마침내 이야기를 모두 마친 천길룡은 곯아떨어져 코를 골았다.

‘로맨스 같기도 하고, 에로물 같기도 하고······.’

무엇에 쓰는 가루인고?

나무꾼이 천마를 삼킴?

제목을 붙이자면 이런 느낌 아닐까?

조무생의 이야기에 그럴듯한 제목을 붙인 진혁은 천길룡의 곁을 지켰다. 그냥 두고 떠난다면 뱀이라는 놈이 덤빌지도 모르니까.

적적할 때면 주전자 뚜껑을 열어 막걸리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아-! 바람 좋다.’

은근하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알싸한 막걸리 냄새, 바람 닿는 언덕에서 듣는 파도소리가 제법 운치를 돋우었다.

‘훈련도 해야 하고, 수업도 해야 하는데.’

훈련 걱정, 수업 걱정은 잠시 제쳐두었다.

과거에는 바쁜 업무 중간중간 산책을 하거나 흡연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래서 망중한을 즐기라는 거였구나. 여러 고민으로 달구어졌던 머리가 식고 호흡이 안정을 찾으니 그 말에 공감이 되었다.

아니 그런데 이 영감님, 너무 오래 주무시는 거 아닌가.

드르르르릉- 컥컥!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땅이 울리는 듯했다.

스사사아아-.

대낮인데도 대나무숲은 을씨년스러운 데가 있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오싹한 한기에 진혁은 한차례 진저리를 쳤다.

꼬르륵-.

배도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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