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 (3) >
***
동네 개들도 잠든 깊은 밤, 진혁은 옥상을 서성였다.
모기 뜯기며 서성이는 진혁의 곁을 지키는 존재는 나방을 아삭아삭 씹는 장군이뿐이었다. 장군이는 옥상 조명에 홀려 몰려든 나방을 앞발로 후려쳐 잡았는데, 원샷원킬의 솜씨가 돋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고양이나 호랑이로 착각할 법한 동작이었다.
후우우-.
몇 번이고 한숨을 쉬어도 켜켜이 재가 쌓인 듯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여?’
그 누구도 진혁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불량스럽다 못해 발랑 까졌던 두 누나가, 아니 누나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세상에 둘도 없는 모범생이란다.
“장군아, 이게 말이 되는 소리니?”
나방이 입맛에 맞는지 꿀꺽 삼키고는 입맛을 다시던 장군이가 진혁을 올려다보며 갸웃거렸다.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을 인지한 후 하소연하던 아홉 살 진혁을 이상하게 볼 때와 흡사한 표정이었다.
“사람은 안 변해. 나만 봐도 그렇잖아. 신체 나이는 어려도 정신연령은 아직 늙은이거든?”
분명 조금씩 젊어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늙어도 아이라는데 스스로 젊어졌음을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정신연령을 판단하는 절대적 척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제 입으로 마음만은 젊다고 말하는 사람, 상대를 무조건 꼰대로 매도하며 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던 최미경 유부녀의 말이 떠올랐다.
- “넌 특히 조심해야 돼.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인데 얼마나 쉽게 물들겠냐.”
아, 왕년에 민용락 부장과 어울리며 물들어서 이렇게 아재 같은 건가.
아무튼 진혁은 돌아오기 전과 성격상 달라진 점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누나들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아, 설마.
나 때문인가?
그 사람들이 나를 알지 못하고, 연이 닿지 않아 원래의 다른 운명을 따라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진혁의 생각은 거기에 미쳤다.
‘그럼 과거에는 내가 그 사람들을 악인으로 변하게 만든 나쁜 놈이었나?’
나만 쓰레기야?
이상한 결론이었다.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논리를 바로잡으려, 질끈 눈을 감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논리에는 문제가 없는데.’
전제가 잘못되었다.
진혁이 고려하지 않은 변수가 있었다.
‘황영모.’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할 때, 변하지 않은 건 그 사람뿐인 듯했다.
여전히 이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벌어둔 돈을 빼앗아 간다고.
‘내가 거기 살 때는 그사람도 손이 커졌겠지.’
멋대로 팔아치울 수 있는 땅이 있었으니까.
목돈을 쥔 사람이 판돈을 키우듯 점점 욕심이 커졌을 테고, 진혁이 숨긴 땅문서에 혈안이 되어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분명 그런 사람이었어.’
황영모는 김응녀나 딸들에게도 화풀이를 하곤 했다.
한창 예민할 시기였던 황가윤과 황가영이 겉돌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지직거리는 라디오처럼, 당시의 고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모에게 욕설을 하며 진혁과 짜고서 땅문서를 숨긴 거 아니냐고 소리를 지르는, 술에 취한 황영모의 목소리였다.
진혁이 땅문서가 뭔지도 모르던 나이, 몇 가지 서류와 도장 따위를 주며 김응녀는 진혁에게 신신당부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죽인 채였다. 어른이 될 때까지 절대 꺼내지 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이모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진혁을 보면 우애 깊던 동생의 얼굴이 생각나서 그랬던 건 아닐까.
진혁의 가족사진을 빼앗으면서도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뻔히 보이는 곳에 숨긴 이유도 보고 싶으면 보라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가족사진을 정말 빼앗을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찢어버리지 않았을까, 괴롭힐 생각이었다면 중요한 서류를 진혁에게 맡길 이유가 있었을까.
‘그땐 내가 이모를 오해했던 건가.’
그렇다 해도 진혁의 잘못은 아니다.
주위를 볼 여유가 없었으니.
이제 과거의 김응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진의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직접 보고, 녹취 증거가 있어야만 사람의 논리가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한번 트인 물꼬는 이성이 원치 않더라도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이모가 나한테 팍팍하게 굴었던 것도 어쩌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남편은 쓰레기에, 딸들은 겉돌아서?’
달라진 과거와 현재. 두 세계의 정황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코올중독에 상습도박과 폭행을 일삼던 사람.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거 아주 나쁜 새끼네?”
전생에 세 모녀의 결말이 어땠는지 아는 진혁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세 사람의 인생이 바뀐 만큼 현생에도 그리 되라는 법은 없지만, 황영모가 존재하는 한 반복될지도 모른다.
‘뭐, 지금은 날뛴대도 무섭지 않지만.’
차라리 날뛰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혼내줄 방법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워얼-.
진혁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을까, 장군이가 걱정스럽게 경고를 날렸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한 진혁은 웬만큼 홀가분해진 상태였다.
“장군아, 가자. 너도 자 인마. 늦게 자면 키 안 커.”
으르르-.
등 뒤에서 장군이가 으르렁거리자, 등골이 오싹해진 진혁은 2층 제 방으로 재빨리 내뺐다.
‘어려지긴 했나 봐.’
걸핏하면 장군이에게 깐족대잖아.
전에 없던 성격이었다.
*
창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때까지, 침대머리에 아찌곰을 받치고 기대앉은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아······.”
차분히 생각하니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싶을 만큼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영이 누나를 학교에서 봤을 때 왜 몰랐을까.’
전생에도, 현생에도 황가영도 황가윤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학교 이름은 지금과 달랐다.
다른 학교에서 태양고등학교로, 불량학생에서 우등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았던 진혁의 불찰이었다. 그들은 변한 게 아니라 이름만 같을 뿐,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다. 재물에 눈먼 부친 때문에 삐뚤어진 과거의 자매와, 엄마를 가여워하며 공부에만 매달린 현재의 자매를 비교하면 안 될 듯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엄마를 위해 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을 속단한 데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어우우우! 멍청한 놈!”
퍽퍽퍽-!
진혁은 마치 제 잘못인 양, 아찌곰의 배에 사정없이 주먹을 꽂았다.
아마 사람이었다면 장파열로 죽을 정도의 힘이 실린 주먹이었다.
깊이 따져 들더라도 제 잘못도 아닌데, 이상하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퍽퍽퍽퍽퍽!
진혁의 주먹질은 아찌곰의 옆구리에서 솜이 폭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에이 씨-. 튼튼하게 좀 만들지.”
꾸역꾸역 솜을 집어넣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의외로 가벼웠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김응녀 모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떠는 너스레였다. 나름대로 기분이 풀린 까닭이기도 했고.
“뭐, 좋은 사람들이면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면 되는 거지.”
그래도 아직은 안 된다.
황영모가 있는 한, 도움이 어떤 방식으로 변질될지 모를 일이니까.
‘조금만 궁리하면 도와줄 방법은 많아.’
엄마와의 관계가 회복된 이상, 조만간 어떻게든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내키지 않는 만남이지만 혼자 사는 집도 아닌데 진혁 혼자만 이유 없이 피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는 일이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아빠와 상의하면 될 거다.
도움이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보태주는 일이니까.
‘아, 이 곰 버려야겠는데.’
너무 많이 찢어져서 솜이 계속 지방처럼 꿀렁꿀렁 삐져나왔다.
***
덜컹-.
박상기가 버스 천장을, 조슬찬이 창문을 열자 한껏 찡그렸던 염병택의 얼굴이 펴졌다.
“으어어-, 좀 살겠다.”
뜨거운 바람이라도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시외버스는 에어컨도 빵빵하게 잘 나오던데, 진혁이네 집에 가는 버스는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다. 승객이라고는 중학생 세 명뿐인데도 사우나처럼 후끈거렸다.
“여름이는 원래 더운 건디 뭔 호들갑이라니?”
“에어컨 있는 집에 있다가 꽉 막힌 우리 집에 가니까 미치겠더라. 다방 하는 집은 구조가 좀 그래.”
두 친구의 대화를 들으며 박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칠 듯 더운 여름, 훈련은 힘들어도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 개운하게 씻은 후 에어컨 밑에서 보내는 여름이 특별했다. 축구부 합숙소에서도 벽걸이 선풍기 몇 대로 여름을 나곤 했었으니까.
“나는 그 머여, 우리 할머니가 디게 좋아했어. 내가 막, 여름이는 설사허구 난리두 아니었거든? 근디 반찬 웁써두 밥두 잘 먹구 배앓이두 안 헌다구 좋아허시더라.”
조슬찬의 말에 함께 훈련의 효과를 경험한 친구들도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몸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온갖 근육이 꿈틀댔는데, 내 의지로 개별 근육에 힘을 주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주말에도 눈이 알아서 떠지고, 무더위와 높은 습도에 시달리다가도 잠깐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했다.
배를 꽉 잡아주는 복직근과 외복사근 덕분에, 격렬하게 달릴 때마다 내장이 진동하며 일으키던 약한 복통도 사라졌다.
“그 있지, 느낌이 그 머여-. 오향장육이 막 딱딱 맞게 바라시된 기분이라구 허야 될라나?”
“오장육부 나라시겠지 븅시나. 내장 바라시하면 죽어!”
우히히히히-.
할머니 손에 자란 조슬찬은 아이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왜색이 짙은 말과 사투리를 곧잘 사용했는데, 친구들이 따돌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함께 오랫동안 운동해 온 염병택은 그때마다 정정해주며 그저 웃어넘겼다. 조슬찬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녀석들의 수다에 적응한 박상기도 슬며시 웃었다.
“······그거, 원래 운동부는 다 하는 운동인데······. 우리가 편하게 지냈던 거지.”
엘리트 체육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운동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이 얼마나 고강도의 훈련을 견디며 피땀을 흘리는지 박상기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역시 잠시 쉬고 있을 뿐, 출신이 그랬으니.
웬일로 말까지 길게 하는 박상기를 보며 염병택과 조슬찬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만 육상부였을 뿐, 훈련다운 훈련을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타고난 재능 덕분에 군에서 가장 빠른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대회에 나갈 수 있었던 거다.
씨름부 선수들만 보더라도 힘든 훈련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매일 아침마다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열 바퀴씩 돌고, 밧줄을 오르고, 턱걸이를 하며 튜브를 당긴다. 지금도 씨름부원들은 주말 구분 없이 합숙소에서 지내며 구슬땀을 흘리는 중일 터였다.
몸이 좋아졌음을 확인한 후에나 실감하는 게 훈련의 효과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다는 게 문제지만.
주말에 쉬는 동안 힘을 쓰고 싶어 용트림하는 근육을 달래며, 친구들은 진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합숙 훈련이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준비된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따지구 보먼 지난주도 헐 만혔어. 잘 먹구 잘 자니께 힘든 것두 잠깐이더라고. 나 가심 나오구 배두 땡땡한 거 보구 할머니 눈이 땡그라지더라니께? 저녁이는 할머니 업고 동네 마실두 댕겼어. 하나두 안 힘들더라.”
“나는 허벅지 두꺼워지고 육체미 선수 같다고 누나들이 막 만지려고 하더라. 도망 다니느라 혼났네.”
“근디 니열부텀은 뭔 훈련이라고 혔더라?”
“가면 진혁이가 알려주겠지 뭐.”
속 편한 녀석들. 훈련이 아닌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분위기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박상기는 말을 아꼈다.
저 역시 친구들과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뭐 한댔더라?’
뇌 기능이 모조리 근육에 쏠린 느낌, 주말 내내 오로지 운동만 생각했다. 그리 힘든 과정을 거쳤음에도 힘이 남아돌아 주말에는 아빠와 등산을 다녀왔다. 무뚝뚝하던 아빠가 헉헉대면서도 너무나 기분 좋은 표정을 짓던 모습이 박상기에게는 큰 소득이었다.
염병택이 화제를 돌렸다.
“조슬이는 공고 갈 거지?”
“그러야지. 나는 기술 배워서 돈 벌어가꾸 울 할머니 환갑잔치 크게 열어 드릴 거여.”
조슬찬의 할머니는 고령도 아닌데 무릎이 좋지 않았다.
저를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몸까지 성치 못하니 착한 조슬찬의 관심사는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염병택이 조슬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슬이는 효자야.”
염병택은 단 한 번도 조슬찬을 집에 초대하지 못했다. 조슬찬의 집에는 몇 번 갔었는데도 말이다. 다방에서 뛰어놀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염병이는 그 뭐여, 대학 갈라구?”
“가야지.”
시골에 산 적은 없는데, 염병택은 나무와 정원을 좋아했다.
염병택의 스케치북을 펼치면 온통 나무와 꽃, 분수 따위로 꾸며진 동산이 펼쳐졌다.
“상기는 머여, 월드컵 갈라고?”
누가 보내준다더냐, 뽑아줘야 가는 거지.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박상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들이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것 같은데 굳이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야. 축구할 때가 제일 재밌거든.”
축구하는 상상을 하는지 행복한 표정을 지은 박상기를 두 친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여건 덕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만큼 부러운 존재는 없으니.
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고, 그나마 빠른 발 하나라도 있어서 중학교 때까지 나름 인정받고 살았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면 그것도 끝이라는 걸, 일찍 철이 든 녀석들은 알고 있었다.
“진혁이 덕분에 마지막 대회는 화끈하게 준비하네.”
“이이, 내 말이. 한번 원 없이 해볼라고.”
“난 육상대회는 첨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박상기가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가운데 앉은 염병택이 두 친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등학교 가서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자.”
“그려.”
“넌 새꺄 주말마다 볼 거잖아.”
“아녀, 나두 바뻐질 거여. 기술 갈치는 학원두 댕길라구.”
이미 한유영과 장래 상담을 한 조슬찬이었다.
엄한 표정을 지은 한유영은, 정말 할머니가 걱정된다면 주말에 놀지 말고 학원에 다니라고 일렀다. 학원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박상기가 주섬주섬 수첩을 꺼냈다.
주소와 연락처를 교환할 생각이었다.
“상기야, 멀미 난다. 가서 쓰자.”
“맞어. 차이서 글자 보먼 마빡이 울렁거리더라.”
버스 맨 뒷좌석에 앉은 세 친구가 한창 수다를 떨 때, 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최미경 청소년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삐이이-.
박상기가 팔을 뻗어 버저를 눌렀다.
“가자! 불태우러!”
“그려!”
“······오늘 저녁 메뉴 소갈비찜.”
***
한 명, 두 명, 세 명.
친구들이 모두 복귀했다.
평상에 앉아 바느질을 하던 진혁은 친구들을 맞기 위해 일어섰다.
팔짱을 끼고 오빠를 감시하던 손유진이 오빠에게 삿대질을 했다.
“어허-! 하던 거 마저 해라요. 내 아찌곰 살려내라요오-.”
“으응······.”
진혁은 고분고분 다시 앉았다.
커피에 이어 아찌곰까지, 유진이에게 약점을 두 개나 잡혔다.
홍수정 외에도 저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사람 앞에서 진혁이 할 수 있는 저항은 개털만큼도 없었다.
‘죄지은 남자는 그저 조신하게 바느질이나 해야······.’
아빠도 혼날 때면 웅크리고 발가락만 만지더라.
흙집에 살 땐 구멍 난 양말도 꿰맸지.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울고,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개 있다고 했다. 진혁은 그중 하나가 주먹이라는 사실을 유진이의 매서운 눈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곰짐 가서 샌드백을 칠걸······.’
걸핏하면 터지고 찢어지는 통에 샌드백 구타를 자제하던 중이었다. 터지면 샌드백을 좋아하는 명현우가 입맛을 다실 테니.
한데 무서운 유진이를 보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 뻔했다.
질긴 5호 나일론 낚싯줄이 지그재그로 아찌곰의 옆구리를 수놓으며 새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거 더 넣어라요.”
“으응······.”
짝다리를 짚은 유진이가 이불에서 뺀 솜을 가리켰다.
“흉터 안 지게 해라요. 저녁 먹기 전까지다요. 나는 홍시랑 산책 간다요.”
“어디 가려고?”
“미경 언니가 바밤바 준다고 했다요.”
“그래, 맛있게 먹고 천천히 와.”
가득 쌓인 솜을 보는 진혁의 한쪽 입꼬리가 야비하게 올라갔다.
아무래도 아찌곰은 전보다 더 건강하고 뚱뚱하게 부활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