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 (2) >
***
호로롭-.
“크으-, 이 맛이여-.”
홀로 평상에 걸터앉은 진혁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자유를 누렸다.
커피 마시면 잠 못 잔다, 키 안 큰다는 어른들이 많은 세상인지라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면 몰래 마시곤 했다. 뭘 해도 잘한다고 할 부모님이지만, 정말 잘해서 잘한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 없는 진혁도 알고 있다.
기말고사 기간에 머리나 풀 겸 C++로 게임을 만드는데, ‘어이구, 잘한다’라며 귓불을 살짝 꼬집는 엄마를 본 후,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튼 커피는 맛있다.
달달하고 쌉쌀하고 뜨거운 것이, 사나이 고독을 달래주는 맛이다. 좋아하던 에스프레소를 구하기 어려운데 믹스라도 있는 게 어디냐. 어차피 운동으로 몸을 피곤하게 만드니 잠은 늘 잘 잤고, 믹스커피는 운동할 때도 훌륭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특히 관절과 근육에 자극을 주기 위해 중량 운동을 할 때 특효였다.
‘그게 커피 덕분인지, 프림 덕분인지는 모르겠고. 내 알 바도 아니고.’
더위에 지치고, 종일 뛰어놀다 방전된 동생들이 거실에서 뒹굴거리는 틈을 타, 마당에 모깃불을 지피고 즐기는 쌉쌀한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달콤했다.
- “다 쏟아내고 오세요. 그런 거 담아두면 병 된대요.”
아들로서, 맏이로서 엄마에게 진심으로 전한 조언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형편이 펴고, 세상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맥을 얻었음에도 엄마의 눈 밑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가끔 한숨도 쉬었는데, 진혁은 엄마를 달래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미 홍기준에게 들어 아는 내용 중에는 잘못 전달된 사실도 있었다. 엄마가 받았던 충격이 컸던 만큼 기억이 왜곡된 탓이려니.
- “엄마한테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 보고 싶어. 가끔 전화해서 아무 말 않고 끊는 사람이 언니 같아.”
그리 말한 엄마는 옹알이하는 아기처럼 삐죽삐죽 우셨다. 코와 눈썹 부근이 벌게져서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럽게 우는 모습에 진혁은 제가 품었던 악감정을 물리기로 했다.
혈연이 아니면 어떠랴.
애가 닳도록 그리울 정도로 정이 든 사람이 곧 가족 아니던가.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는 자체가 주제넘지만, 진혁은 그런 말로 엄마를 설득했다. 자신보다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어차피 나는 이번엔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인데, 엄마만 용서하시면 되는 거잖아.’
엄마가 그 가족을 용서하면 진혁도 잊을 생각이었다.
진혁은 전생에도 굳이 그들을 찾아가 해코지하거나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었다.
진혁의 사정을 아는 이가 있다면 병신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나, 이제 현재를 사는 진혁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고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빛과 그림자의 분리가 불가하다지만, 남부럽지 않은 행복에 어두운 기억이 얹혀 빛이 바랠까 애써 잊는 중이기도 했다.
‘나는 두 번째 사는 거지만 엄마는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 엄마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겨.’
호로롭-.
크으-, 좋다.
“장군이도 한 모금 할 쳐? 근데 이거 마시면 키 안 큰대. 우리 장군이는 안 그래도 숏다리잖아-.”
으르르-.
장군이가 세모눈을 뜨고 이빨을 드러냈다.
“너 그거 충동성 발작이야. 세상을 좀 아름답게 보렴.”
으르르르-.
그러나 장군이 눈에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혁은 장군이를 외면하고 커피나 홀짝이기로 했다.
이 새끼는 사실을 말해도 이러더라.
억울하면 키 크든가.
장군이를 외면하며 믹스커피의 풍미를 즐길 때였다.
유진이가 짝짝이로 신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오빠, 저도 코피 마시고 싶다요.”
“안 돼! 키 안 커.”
***
한참 동안이나 통곡하던 김응녀와 한유영은 진정된 가슴으로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마주 보는 자리가 아닌, 옆에 바짝 끌어안듯 앉은 자세였다.
손광연이 자리를 피해준 덕분이었는데, 눈이 충혈된 채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이 자매에게는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는 배려로 비쳤다.
김응녀는 10년도 전에 뺑소니 사고를 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한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잘못을 저지르고 눈치를 보는 사람이 으레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우리 엄마, 아부지 산소에 가끔 다녀간 게 언니였지?”
“그렇지 뭐.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아들 진혁 덕분에 용기를 냈으나 마음의 빗장을 허물고 밖으로 나서는 용기는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해마다, 철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두고 간 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한유영은 오늘 찾아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윤이랑 가영이 보니까 내가 계속 이렇게 살먼 안 되겄더라. 공부 잘해서 둘 다 태양고 갔어. 둘째는 올해 졸업반이구. 어릴 때부터 학교 끝나면 엄마 돕겠다고 다방으루 오는디 담배 연기두 그렇구 못 볼 꼴 많이 보잖아. 입에 풀칠은 해야 하고 기술은 없고. 목구녕이 포도청이라고 애들 공부도 갈쳐야 하니까 하기는 했는디, 가영이 대학교 갈칠 때까지만 하고 나도 정리해야지.”
사투리와 서울말이 섞인 듯한 말씨, 거의 20년 만에 듣는 언니의 말투에 한유영은 어릴 때가 생각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윤이는 어떻게 지내요? 애기 때 보고 못봤네.”
“대학 갔어. 서울루 갈 수 있는 성적인데 등록비 비싸다고 대전에 있는 국립대 갔지. 아르바이트도 해서 지 엄마 화장품도 사다 주고 그려. 벌써 삼 학년이다?”
은근슬쩍 딸 자랑을 하는 김응녀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감돌았다.
발그레하게 핀 한유영의 얼굴도 밝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말대로 쏟아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응녀의 한바탕 통곡에 있던 손님들도 자리를 뜬 후였기에 홀에는 조용한 음악과 두 여자의 목소리만 조용히 흘렀다.
남편도 동행했고 건장하고 날렵한 경호원이 둘이나 있는 데다, 막상 와보니 두려워했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형부는?”
“어휴, 그 인간말종······.”
길게 한숨을 내쉰 김응녀는 다시 눈물을 찍어냈다.
“뻬 빠지게 모아두면 애들 참고서 살 돈까지 싹 가져가서 놀음하고, 돈 숨기면 내놓으라고 주먹질하고······.”
“언니, 고생 많았겠다.”
“애들 때문에 그저 꾹 참고 살았지. 공부도 잘하는데 못 갈치면 아깝잖어.”
주름진 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응녀도, 한유영도 같은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때는 상고가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경쟁률이 치열하고 여학생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아마 김응녀도 공부 머리가 있으니 그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나왔겠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연두색 머리핀을 꽂고, 감색 여고복을 입었던 김응녀의 모습이 어설피 떠올라 한유영이 미소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호랑이 같은 현실에 올라타 정신 줄만 붙들고 사는 중년 여인. 한유영의 눈에 측은한 빛이 돌았다.
‘우리 언니가 어쩌다 그런 인간을 만나서.’
상고를 졸업한 김응녀가 작은 건축사 사무소에서 경리로 근무할 때 만난 건달이었다. 제 버릇 개 줄까, 여전히 패악질을 부리며 사는 모양이다.
“한번은 무릎 꿇고 빌면서 사정했지. 딸들도 다 컸는데 애들 봐서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라고. 그 후로 정신 차렸는지 뭔 사업을 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 같더라만, 사업을 하는지 놀음을 하는지······.”
“집에 돈은 가져와요?”
“어허이-, 그거 다 까닭 웁는 소리지. 그 인간이 돈을 가져와? 사채나 안 쓰먼 다행이지······. 이 가게두 한 번 넘어갈 뻔한 걸 내가 겨우 막었어. 한번 나가면 한 달은 얼굴 못 봐. 차라리 안 보는 게 마음 편치.”
에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여인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맞잡은 손을 꼭 쥔 채였다.
“가윤이 얘는 이모 왔을 때 얼굴 보면 좋을 텐디-. 가만있어 봐. 가영이라도 인사시켜야지.”
“입시생인데 그냥 둬요. 근데 가윤이 방학이라고 집에 왔나 봐?”
“이이, 방학 동안이두 낮에는 과외도 하고 저녁에는 친구 만나구 그래. 친구들은 다 서울로 대학 갔지. 아니 근디 요새는 친구들보담두 메칠 전부텀 웬 총각을 만나는 거 같더라.”
그 말에 한유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모녀 팔자 대물림이라는데, 김응녀의 남편 황영모 같은 사람을 만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죠?”
“이상헌 사람은 아닌 거 같어. 키두 크구 잘 생겼어. 우리 다방에 가끔 와서는 아가씨들헌티 찝적대두 않구 조용히 차만 마시구 가는 손님여. 이 동네 사람 같지는 않더라.”
한유영은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주억일 뿐, 궁금해도 더 묻지 않았다. 김응녀가 속으로 어찌 생각할지 모르는데 제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속속들이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 여겼기에.
“지가 좋다구허먼 나이가 걸리든, 직업이 걸리든 뭇 말리는 거지 뭐. 울 어메두 내 고집은 뭇 꺾었어······.”
김응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이야기였으니.
***
다음을 기약한 한유영은 김응녀를 달랜 후 다방을 나섰다.
명현우가 운전대를 잡고 한유영 전담 경호원 유태화가 조수석에 앉았다.
손광연이 아내의 손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속은 좀 풀렸어요?”
“네. 언니가 해준 밥 먹으니 좋네요······.”
진정 좋았으나 김응녀의 신세한탄에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황영모의 꼬임에 넘어가 팔자를 망치고, 오랫동안 가족이었던 사람의 남은 재산이 털리는 꼴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연신 미안해했다. 잘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며, 손광연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도 했다.
이제 와 김응녀의 말을 믿고 안 믿고는 한유영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용서의 문제랬어요.”
“진혁이가요?”
손광연이 되묻자 한유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할 수밖에.
‘용서할 수 있을까.’
2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왜곡된 기억은 치유될지언정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너무 어렸기에 더 큰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사건인데.
아들 진혁은 가족을 위해 용기를 내라는 말을 했다. 인연이란 무서워서, 절대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난다고.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데 그때도 무섭다고 도망칠 거냐고 물었다.
‘언제까지고 그럴 수야 없지.’
용서의 문제라는 말이 옳다고 믿는 한편, 김응녀를 믿고 싶기도 했다.
오늘 알게 된 사실 중에는, 그때 김응녀는 뱃속에 둘째 딸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믿고 싶었다. 아기를 가진 여인 복중 아기를 위해 억척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재채기도 조심스레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험한 일에 적극 나설 수 있을까.
처음 보는 이모에게 수줍게 인사하던, 수수한 고3 수험생 황가영의 모습도 한유영의 생각에 설득력을 얹었다.
발언을 채용하고 신뢰하는 것은 이지의 영역이다.
지역 내 최고 유력자를 남편으로 둔 사람으로서, 자신의 과거는 이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나 한유영은 오늘의 재회를 제 인생에 큰 발전으로 받아들였다.
앞으로 다시 경험하기 힘든 정신과 감정의 성숙이 소득이랄까.
감정의 정화.
마치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맨발로 부드러운 흙을 밟듯, 부드러운 바람 앞에 실크 가운만 걸친 나신으로 산책에 나선 듯. 한결 편안하고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용기를 준 아들에게 고마웠다.
진혁을 생각하자 한유영의 눈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우리 아들이 복덩이예요.”
맏이는 듬직하기 마련이라지만 그런 자식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진혁이 낳고 살림이 확 폈으니 항상 복덩이였다고 볼 수 있죠. 근데 요샌 좀 이상한 것도 같고······.”
입술을 비죽 내밀며 미간을 좁힌 손광연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호흡을 골랐을 때, 부부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다정해졌어요.”
“푼수 됐어요.”
음?
부모가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엄마에게는 다정한 아들이고, 아빠 눈에는 푼수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들어서는 차를 향해 울며 달려오는 유진이를 본 부부는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아아아아-! 오빠가 커피 안 준다요오오!”
평상에 앉아 있던 아들이 차를 발견한 후 서둘러 커피를 원샷하는 모습이 부부의 눈에 포착되었다.
‘아오, 저 새끼 저거······.’
동생 눈에 띄지나 말든가.
아이들 울리는 놈들은 꼭 저렇게 눈앞에서 약 올리듯 얄밉게 굴더라.
복덩이 아들이 어린 동생 울리는 못난 오빠 새끼로 변하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
진혁의 방에 다섯 식구가 모였다.
아기와 꼬맹이는 창문 너머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도와주는 건 어떨까?”
손광연은 정원이 옆에서 아찌곰을 끌어안고 잠든 유진이의 이마를 쓸어넘겼다.
한유영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찌꺼기처럼 남은 감정을 정리하려면 시간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황영모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데 특화된 진혁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엄지발가락의 굳은살을 떼어내던 진혁은 다소 퉁명스럽게 굴었다.
“각자 살아야죠. 뭘 도와요······.”
용서는 용서고, 재정적 지원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엄마가 가족처럼 여긴다 한들, 현실은 남 아니던가. 기특한 마음에 조슬찬을 후원하는 방식과도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조슬찬은 어려운 형편에서 사는 미성년자였고 김응녀는 이미 일가를 이루어 독립한 사람이다.
“가영이 누나는 어떻게 지낸대요?”
“음, 공부를 잘- 네가 이름을 어떻게 아니?”
“아, 그······. 아까 이름 살짝 얘기하셨어요.”
그랬었나?
한유영은 그런가 보다 할 뿐, 다행히 더 묻지 않았다.
“반에서 일이 등 한대. 연수대 정도는 갈 수 있을 것 같다는데 지 엄마 힘들다고 언니처럼 국립대 가겠다고 한다나 봐.”
충격적이었다.
첫째 황가윤은 멀리 면소재지의, 원서만 넣으면 합격하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본드와 가스에 손댔었다.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핫팬츠 차림으로 남학생의 오토바이에 뒤에 올라 읍내를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뭐? 대학을 가? 국립대에 장학생으로?’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엄마에게 화장품도 사다 준다고.
다방 금고에 손대다가 빗자루로 맞던 모습이 아직도 흑백영화처럼 떠오르는데, 모범생에 효녀라니.
둘째도 그렇다.
똑똑했어도 공부와 담쌓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학급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우등생이라고.
진혁은 귓가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천지진동의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진혁이 알던 사람들이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