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54화 (154/338)

< 산책 >

***

가장 힘든 기간이랄 수 있는 첫 주를 무사히 보냈다.

제아무리 운동선수라 한들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깨우고 폐활량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과정이 수월할 리 없는데도, 태양중학교 육상부는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첫 고지를 밟았다.

그런 친구들이 대견했던 진혁은 친구들에게 특별대우를 해주고 싶었다.

“꼭 다시 와라. 저녁 일곱 시까지 우리 집으로 모이는 거야.”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단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특별대우를······.

주말을 맞아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에게 다짐받듯 건네는 말에는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선수들이 모여야 훈련을 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런 것이었지만······.

“걱정 마러! 일욜 저녁쯤이 뻐쓰 타고 올겨-!”

“누나들이 나 알아보려나? 너무 까매졌어.”

“회장님, 해브 어 나이스 위켄드······.”

지나치게 밝은 염병택과 박상기의 표정을 보며 진혁은 인간에 대한 불신의 불이 확산됨을 느꼈다. 그래서 덧붙였다.

“안 오면 잡으러 간다.”

진혁은 그 순간 보았다.

두 녀석의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역시 튈 생각이었구나.’

도망쳐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다 이놈들아.

“내가 꼭 데꾸오께!”

먼저 버스에 오른 조슬찬이 힘차게 외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진혁 바라기였던 조슬찬은 합숙기간 내내 할머니를 걱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즐기려는 모습을 보였다. 어두운 한편으로 밝고 적극적인 친구, 진혁은 조슬찬을 보며 인간 내면의 빛과 그림자는 결국 분리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과거와 현재처럼.’

정류장 근처 집 2층에서 최미경 청소년이 지켜보는 것도 모른 채, 진혁은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장군이처럼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유를 찾은 친구들은 버스에서 수다도 떨고, 훈련 이야기도 하고, 진혁의 뒷담화도 나누며 우정을 키우리라.

우정은 우정이고.

‘으흥흥, 도망치려면 쳐봐라.’

도망친 친구들을 추노하는 재미도 색다를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오빠 팬티 입어본다고 조르다가 거절당한 유진이가 최미경 청소년네로 가출했던 날 찾으러 갔던 것만큼이나 쉽고 재미있을 듯했다.

튀어봤자 벼룩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한마디 말이면 사방으로 출동할 삼촌들도 상시 대기 중이다. 그리고 진혁만큼 벼룩을 잘 잡는 사람이 또 있을까.

헤헤헥-.

지금도 장군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올려보잖아.

목욕은 싫어해도 털 빗는 건 참 좋아하는 녀석이다.

“날도 더운데 훈련 돕느라 장군이가 진짜 고생했어. 집에 가서 벼룩 잡아줄게.”

둘만 남아 조용해진 들녘을 산책하듯 걸었다.

“우리 장군이가 제일 뛰어난 코치다.”

뿐만 아니라, 훈련받은 대형견이 새로 들어왔음에도 주눅들지 않고 여전히 당당하게 개지랄하는 녀석이 기특했다.

빗질하는 손길에 한껏 애정을 담았다.

모처럼의 휴식이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SSS와 세인그룹을 챙겼고, 방학 중에는 훈련과 과외까지 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지붕 삼아 모닥불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은 사나이와 한 마리 늑대. 장군이와 둘만 남으니 가슴이 따끈해지는, 진혁만이 아는 판타지 감성이 차올랐다. 뭐, 모닥불도 없고 하늘은 한껏 흐린 데다 장군이는 늑대가 아닌 발바리지만 외형이 중요한 건 아니지.

“우리 장군이가 제일 기특하고 이뻐.”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이 특별한 거다.

진혁은 장군이와 있을 때면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헤헤헥-.

칭찬이 듣기 좋았는지 장군이는 배를 보이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손광연과 한유영, 진혁에게는 하는 행동이었다.

“아이고 이놈아, 부끄럽지도 않냐? 찌찌 다 보이게 뭐하는 짓이여?”

유진이가 배를 만지기라도 하려 들면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녀석. 오직 진혁과 어른들만이, 장군이가 인정하는 서열을 짐작할 뿐이었다.

“아픈 데는 없는 거지?”

월-.

그렇다는 것 같다.

뭐, 매일 유진이가 만져주니 건강한 개 생활에 도움이 되려나.

생명의 절반 정도를 태웠으니 이 녀석도 장년인가?

모처럼 차분해진 심정으로 장군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흠······, 어려 보이는데? 오 년 전과 다를 게 없어.”

근육이 더 붙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장군이는 여전히 건강하고 지랄 맞다.

진혁은 그 점이 더욱 기꺼웠다.

벼룩을 달고 사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털 많은 짐승의 숙명이려니.

“진혁아.”

“네?”

비 갠 후 더욱 후텁지근해져서 모든 생물이 힘겨워하는 계절, 김인랑이 빨간 모자로 부채질하며 다가왔다.

“내일은 토요일인데 왜 쉬는 거니?”

“주 오 일이에요.”

“그래······. 그럼 나도 내일부터 훈련은 쉬는 건가?”

김인랑이 시원하게 다듬은 머리를 긁적였다.

“네. 다음 주는 헌창 삼촌이 같이 해준댔어요. 그래도 아침 운동은 같이 하실 거잖아요.”

“응. 그럴 거야. 그럼 난 시내에 일이 있어서······.”

“명자 누나랑 데이트 있어요?”

“어헛-!”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김인랑이 헛숨을 들이켰다.

진혁의 반개했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뭘 놀래요? 훈련 중에도 틈만 나면 보안 전화로 어디 전화하던데요.”

그뿐 아니다.

김인랑은 매일 훈련이 끝나면 차를 몰고 나갔다.

집도 이 근처인 사람이 말이다.

“아하하-. 짜식 눈치는. 근데 명자 씨는 아냐.”

“흐음-, 촌에 틀어박힌 분이 재주도 좋네요.”

굼벵이도 짝이 있고 짚신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리도 부지런히 전화를 하고 밤 드라이브를 나갔으니 짝을 찾은 거겠지.

진혁은 기분 좋게 헤벌쭉 웃었다.

저런 실력이라면 나중에 인랑 삼촌에게 연애 기술을 배워도 되지 않을까.

“데이트 비용은 있어요?”

“에라이-, 인마! 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딱콩-.

“악-!”

진혁의 머리를 쥐어박은 김인랑은 머리 위로 모자를 흔들며 멀어졌다.

세인보안시스템스에서 매달 받는 월급이 일반 회사원의 세 배가 넘는 사람에게 어디 조그만 녀석이 애정전선 군자금 걱정을 한단 말인가.

스읍-.

머리통을 비비며 진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만나면 뭐해요?”

순수하게 궁금했다.

남녀가 만나면 오작교 모텔 말고 어디에 가는지, 주둥이를 맞대고 설왕설래하는 일 말고 뭘 하는지.

이성과 감정적 교류가 부족한 진혁이 아는 연애라고는 흥냐냐- 흐애앵- 하는, 본능에 충실한 번식행위뿐이었으니까. 뭐, 전생의 세계는 아예 사라졌다고 했으니 D 드라이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손진혁도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오직 운동으로만 해소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는 결함이 있었지만.

“영화 보려고!”

“무슨 영화!”

“이연걸의 보디가드 개봉했다더라!”

액션물보다는 로맨스나 드라마가 여자에게 먹힐 텐데?

말려야 한다!

꼴에 주워들은 게 있는 진혁이 벌떡 일어섰다.

“그건 안 돼요! 프리 윌리 봐요!”

“시원한 액션영화 보고 싶다더라!”

별일이네. 여자들은 액션물 싫어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역시 현실은 온라인에서 설치는 방구석 박사들의 말과는 다르구나.

‘아니면 뭘 하느냐보다 상대 외모가 중요한 걸지도······.’

그래도 드라마가······.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스읍-.

그나저나 인랑 삼촌 손이 매우 맵네.

꿀밤을 맞았어도 기분 상하기는커녕 쌓인 친분을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진혁은 다시 쪼그려 앉아 개 빗을 들었다.

그러나 거실에서 정원이와 놀던 유진이의 외침에 금세 일어서야 했다.

“오빠아아아-! 정원이 똥 쌌다요오오오-!”

“어어-! 갈게! 오빠가 간다!”

바쁘다, 바빠!

친구들은 달콤한 휴식을 취하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진혁은 할 일이 남았다.

엄마와 아빠는 읍내에 볼 일이 있다며 친구들보다 먼저 나간 탓에 진혁이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이구구-, 구수하다.”

거실에 정원이를 눕히고 기저귀를 개봉한 진혁이 늙은이 같은 감탄을 뱉었다. 아빠가 정원이 기저귀 갈 때마다 이런 소리를 내더라.

“안 구수하다요. 구린내다요.”

“애부우-. 아르륵-.”

아직 손길이 서툰 유진이는 오빠가 하는 것을 꼼꼼히 관찰하며 참견을 해댔고, 개운하게 싸지른 정원이는 기분이 상쾌한지 혀를 굴렸다.

“반어법이야. 유진이가 애기였을 때도 오빠가 구수하다고 했어.”

“아, 그래요? 기억 안 난다요.”

“애부우-?”

당연히 안 나겠지.

그런 말 한 적이 없으니까.

‘숨을 안 쉬어서 냄새도 기억 안 나.’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한껏 차려입고 가시더니 늦으시네.

어디에, 뭘 하러 가셨는지 뻔히 예상하는 까닭에 늦어진다는 걸 좋은 징조로 여겼다. 명현우와 유태화가 함께 갔으니 위험할 일도 없을 테고.

아무래도 저녁은 동생들과 먹어야 할 것 같다.

욕실에서 정원이를 씻긴 후, 보송하게 닦고 베이비 파우더까지 찹찹- 뿌렸다.

흐음-, 베이비 파우더 스멜-.

진혁은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기저귀를 채운 후, 열심히 관찰하는 유진이에게 물었다.

“유진이 뭐 먹을래?”

“계란 맘마요.”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엄마는 잘 하고 계신가······.”

명현우와 유태화가 동행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진혁에게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처럼 걱정되는 부모님이다.

요즘들어 엄마가 한숨 쉬는 일이 잦아져서 부추긴 일인데, 괜한 용기를 불어넣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

아들에게 용기를 얻어 큰마음 먹고 찾아온 곳이다.

남편은 산책하듯 편하게 생각하라 말했으나,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제어되는 것이던가.

앞에 앉은 사람을 보는 한유영의 눈시울은 발갛게 물들었고, 물기마저 머금어 촉촉했다.

“나 계란밥 해줘요. 나 학교 다녀오면 언니가 그거 해줬잖아. 나 그거 먹고 싶어. 밥에 날계란 올려서 들기름이랑, 왜간장이랑 깨소금 뿌려서 해줘요.”

습기를 품은 목소리가 잘게 떨었다.

하나 내용과 달리 음성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고개 숙인 김응녀는 벗은 앞치마를 꼬깃거릴 뿐, 한유영의 눈을 미처 똑바로 보지 못했다.

신수 훤한 선남선녀가 다방에 들어서서 주인을 찾는데, 주방에서 그 모습을 본 김응녀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한유영이 건네는 첫인사에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 “언니, 잘 지냈어요?”

몇 달 만에 만난 사람처럼 수줍은 듯 어색하게 건네는 인사였다.

그렇게.

18년 만에 만난 의붓동생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도둑년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제 어머니가 망동을 부려도 말리지 못했고, 남편이 동생에게 칼을 들이댔어도 겁을 집어먹었을 뿐, 뜯어말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방관자였으며 공범이라고, 김응녀의 양심이 그리 손가락질했다.

“기억이라는 거 웃기더라. 나도 그땐 겁나고 놀라서 얼마 전까지 다 싸잡아 미워했거든. 근데 나이 먹고 아이들 낳고 살면서, 나 어릴 때는 언니가 얼마나 나 예뻐하고 챙겨줬는지 생각나더라. 그날 언니가 나 보호하겠다고 끌어안고 같이 떨던 기억도 나고······. 솔직히 우리 셋째 낳을 때는 언니가 옆에 있었으면 했어요.”

조곤조곤, 웃는 듯 울먹이는 듯 나열되는 감정의 파편이 품을 파고들자, 김응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였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요?”

한유영이 제법 표독스럽게 받아쳤다.

“전화했다가 아무 말 않고 끊은 사람도 언니였지?”

김응녀는 답하지 못하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푹 숙인 김응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들바들 떠는 주름진 손, 그 골짜기를 따라 흐른 눈물이 검지와 중지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한유영의 눈이 한층 젖어들며 독기가 서렸다. 남편과 자식들은 생전 구경하지 못한, 무섭다고도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으면 말을 해야지!”

아내가 빼액 소리를 지르자 손광연이 흠칫 놀랐다. 분위기를 망치거나 아내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이내 표정을 고쳤다. 아내의 손을 잡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커피잔만 만졌다.

“나는 엄마가 없잖아! 내가 아기 가졌으면 언니 네가 엄마 노릇해줘야지! 날 그렇게 버리고 갔으면 잘 살기라도 하든가!”

차라리 절규였다.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말 중간중간 울음이 섞였다.

앞치마를 들어 올려 얼굴을 덮은 김응녀는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한유영이 아기일 때부터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지켜본 언니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동생은 제 엄마만큼이나 언니를 따랐다.

헤어질 때까지 매일 보고 지낸 아이가, 그 세월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찾아와 떼를 쓰듯, 어리광을 부리듯 내뱉는 소리가 어떤 칼보다 날카로웠다. 용암보다 뜨거운 서릿발은 칼날이 되어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팠다.

“으그윽······.”

김응녀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 가슴을 두드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바보처럼 물개 소리만 나오고 말이 터지지 않으니 흉통만 더욱 거세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유영은 김응녀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등을 팡팡 때렸다.

“언니 네가 왜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울려고 나 버리고 갔니!”

“미안해, 언니가 미안해. 언니가 죽일 년이여······.”

한유영은 김응녀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당겼고, 김응녀는 한유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

어색한 표정을 만든 손광연은 구석에 자리 잡은 명현우와 유태화를 힐끗거릴 뿐,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즐기고 우스개를 좋아하는 사나이지만, 낄 자리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었다.

‘쉬 마려운데 일어날 수도 없고······.’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더니 이뇨 작용이라는 녀석이 궐기했다.

붉어진 눈시울을 훔친 손광연은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우리 자기 오해도 풀린 모양인데 적당히 화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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