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52화 (152/338)

< 곽란의 서머 캠프 (4) >

끔찍한 여름이었다.

기록적인 폭염 탓에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노동자가 속출한다는 뉴스가 아니더라도, 시골 들판에는 일하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한반도가 너무 뜨거워서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대표팀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물론, 조일헌이 한 말이니 그 신빙성은 제로에 가깝다 할 수 있었지만.

진혁은 계획 수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내 계획이 약간, 아주 약간 과했나 봐.’

아무리 잘 짜여진 계획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정도는 아는 까닭이다. 참가자들의 의견도 반영하는 임기응변 또한 필요하다. 그런 변별력이 없다면 어찌 기획가라 할 수 있을까.

완벽히 설계된 기계도 조립이나 길들이기 과정에서 무리하게 다룰 경우 고장이 나거나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 진혁은 눈물을 삼키며 순순히 제 과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바보는 아니었으니.

“내일부터는 좀 살살하자. 잠도 한 시간 더 자고, 휴식 시간도 한 시간 더-.”

“예에아-!”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지르는 친구들을 보며 진혁은 확신을 얻었다.

그건 그거고.

“진혁아, 바다이서는 뭔 훈련 허는겨?”

“응, 별거 없어.”

***

바닷가에서의 훈련은 별것 없었다.

2인 1조로 목마를 태우고 백사장을 달리는 훈련이 시작이었다.

“으아아-!”

“가자아아아!”

하나의 훈련을 소화할 때마다 김인랑이 들고 온 수박과 음료라는 당근을 주니 아이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에게 발목이 잡혀 손바닥으로만 전진하는 훈련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운동을 두고 팔운동이라 칭하지만, 폐활량 증가와 복근과 경추 횡돌기간근, 척추를 잡아주는 각종 근육 단련을 위한······ 뭐, 다 아는 내용이다.

“병택! 고개 들어! 숙이지 마!”

“으아아-! 모래 너무 뜨거워요!”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 들면 김인랑의 호통이 매섭게 꽂혔다.

“슬찬! 가슴 내밀어!”

“조슬아- 엉댕이 실룩대지 마! 무거워!”

“월레? 뭔 소리를 글케 섭하게 헌다니? 궁댕이는 흔들라고 있는겨어-.”

푹푹 빠지는 모래땅에서 무릎을 최대한 차올리는 훈련도 필수 코스다.

“상기! 무릎 더 올려! 가슴까지 더!”

“······ 오랜만······이라······ 처음인가······.”

선수라면 하계 훈련 때 흔히 하는 평범한 훈련이었다.

“다 해본 거지?”

“······”

아닌 모양이다.

친구들의 원망 섞인 눈빛에 진혁이 뺨을 긁었다.

박상기는 대자로 뻗은 채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는데, 분명한 건 눈의 초점이 두 개 이상이라는 거였다.

“곧 물 들어오면 수영도 할 거야.”

“오! 진짜루 허는겨?”

“그렇지? 바다에 왔는데 물놀이는 해야지.”

“좋았어······.”

곧 죽을 것 같던 박상기도 언제 퍼져 있었냐는 듯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갯벌과 모래땅에서 달려야 한다는 게 함정이긴 했다.

저 멀리 물까지 달려가는 건 힘드니 여기서 물을 기다리자는 진혁의 설명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진혁은 물이 들어오려면 두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평화로운 내면을 위해.

‘쉬운 녀석들.’

그룹 본사에 근무할 때였다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반론을 제기했을 텐데. 이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친구들이란 말인가.

진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친구들이 그 웃음을 사악하다고 느끼는 것도 모른 채.

***

그늘에 자리 잡은 김인랑은 땡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갯벌과 모래에서 훈련하는 에너지 넘치는 그들을 보며, 여전히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로서 자연히 떠오르는 감상이 있었다.

‘같이 하자고 안 해서 다행이야.’

선글라스를 벗고 풍광을 둘러보았다.

묘한 해변이다.

모래사장이 300미터쯤 넓게 펼쳐졌고, 개발된 해수욕장이 아니어서 나무와 바위가 많았다.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향해 조금 들어가면 바로 갯벌이 나온다.

저 북쪽에 보이는 곶부리를 넘어서면 그쪽은 아예 모래가 없는 갯벌이고. 거기에서 바지락이 많이 나온다던가.

물이 모두 빠진 저 멀리 갯벌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가득한 섬도 있는데,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고 했다. 갯벌 안의 섬이라니.

‘멋진 곳이다.’

바위 그늘에 스치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에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별빛 한 점 없는 비무장지대에서 갈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았고, 몇 년 전까지는 적병과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이는 꿈을 꾸며 식은땀을 흘렸더랬다.

‘저 녀석을 만난 후부터 악몽이 사라졌어.’

홀로 사시던 어머니를 설득해 이 마을에 모시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여기저기 마실도 다니시고 작은 텃밭도 가꾸며 사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미소가 봄꽃처럼 피어났다.

이제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해도 되지 않을까. 오래 머물 곳이 생겼으니 가정을 꾸려 정착하고픈 욕심도 생겼다.

‘형님네 회사 경리 직원 예쁘던데.’

이름이 이명자 씨였던가.

특별할 것 없는 성장기를 거쳐 군대에서 10년을 보냈다.

비무장지대에서, 북한 모처에서 비트를 파고 긴장 속에 보내던 세월을 생각하니 여기가 천국이다.

흐뭇하게 웃다가 아이들과 갯벌에서 뒹구는 진혁을 보았다.

180cm인 김인랑보다 이미 커 버린 녀석.

‘저놈이 그 괴물이었다는 게 믿기질 않아.’

튼튼했기에 별다른 후유증 없이 지내고 있지만, 일반인이었다면 크게 고생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김인랑조차 잠시 의식을 잃었었으니.

‘그건 뭐였을까.’

의식을 잃었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건네는 단순한 메시지였다.

- 【살고 싶으냐?】

아마 죽기 전에 찾아온다는 저승사자 같은 거였겠지.

악몽이나 망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긴커녕, 더욱 선명히 살아나는 기억이었기에.

- 【계약의 유효기간은 내가 풀어줄 때까지다. 결코 오래 걸릴 듯하지는 않군.】

어머니도, 김인랑도 만족스러운 평화였기에 이제 와 계약이니 뭐니 신경 쓸 이유는 없다. 하나 여전히 또렷한 음성은 김인랑으로 하여금 딴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불러왔다.

보나마나 헌창이나 형들도 같은 목소리를 들었겠지. 떠벌리지 말라고 했으니 거론하지 않는 것일 뿐.

“삼추운-! 살려주유! 으껙!”

다급한 조슬찬의 외침에 퍼뜩 놀란 김인랑이 상념을 깨고 일어섰다.

아이들의 안전은 자신의 책임,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김인랑은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짜식들.”

아이들은 갯벌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진혁이 친구들을 메다꽂는 광경, 얼핏 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대로 보였지만.

서서히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밀물을 기다리며 잠시 놀이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인랑의 대흉근이 웅장하게 부풀었다.

후우웁-.

“에라, 모르겠다.”

티셔츠를 벗으니 단단한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운동화를 고이 벗어두고 반바지 차림으로 진혁을 향해 돌진했다.

“이야아아아아-!”

보디체크를 할 생각으로 두 팔을 뻗었다.

이대로 허리를 끌어안고 밀면 아무리 괴물 같은 손진혁이라도-.

‘어?’

갑자기 진혁의 얼굴이 사라지고 갯벌이 나타났다.

그래, 까맣고 시커멓고 질퍽거리는 땅을 대개 갯벌이라고 부른다.

김인랑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은 진혁이, 달려온 탄력을 역이용해 머리 위로 넘긴 것이었다.

찰푸닥-.

부웅- 날았지만 볼썽사납게 처박히지 않고 회전 낙법을 펼쳐 빙글 굴렀다.

“오······, 터미네이터다······.”

“와, 삼촌 몸이 아주 막 기냥- 진혁이 같어.”

“야! 삼촌 조져!”

박상기와 조슬찬이 감탄할 때 염병택이 외쳤다.

“조지라니! 염병이 싸가지 웁는 새꺄! 조져드려!”

조슬찬이 맹렬히 돌진하며 염병택의 뒤를 받쳤다.

보스 몬스터가 너무 강할 땐 중간 보스부터 처치해서 레벨을 올리는 것이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쯤 아는 조슬찬이니까.

뒷걸음질 치는 김인랑의 허리를 염병택이 끌어안고 매달렸다. 힘이 좋은 탓에 염병택만의 힘으로는 넘어뜨리기가 불가능했다. 조슬찬이 김인랑의 목에 팔을 감고 등에 매달렸다.

“울트라슈퍼 살인 태클!”

오늘이 아니면 언제 발바닥으로 태클을 해보랴. 박상기는 즉시 레드카드를 받아도 변명 못할 하단 태클로 기어이 김인랑을 자빠뜨렸다.

“네 이놈드을-!”

갯벌에 짤딱- 자빠져 깔린 김인랑이 악을 쓰며 버둥거렸다.

조슬찬이 김인랑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으헤헤헤헥! 항복!”

“항복은 웁슈!”

에헤헤헤-.

온몸에 펄투성이인 남자들을 구경하던 진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들썩였다.

‘헤에-, 재밌겠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상황에 개입해 진화하는 것보다는 관객으로 머무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을 테니까.

저만치 오던 밀물이 금세 무릎까지 차올랐다.

***

모두가 지칠 때까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 해수욕을 했건만.

야속하게도 여름 해는 길었다.

세 명의 태양중학교 육상부원은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손진혁과 김인랑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진혁아아-. 모래 가방은 왜 다시 메고 가는 거야?”

“내일도 메고 와야지.”

그렇게 쉬운 걸 묻다니, 바본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닌데. 안 먹히네.’

염병택은 슬픈 예감에 사로잡혔다.

20kg, 그리 무거운 무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걸 지친 몸으로 한 달 내내 메고 다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우리-.”

“백 미터 시합해서 나 이긴 사람은 열외.”

시발.

뭔가 사정해보려던 염병택은 입을 다물었다.

재미는 없어도 좋은 형 같은 친구인데, 훈련할 땐 재수 없어.

집으로 가기 전, 개울에 들러 민물로 씻었다.

소금기 때문에 팽팽하게 당기던 피부가 민물을 만나 이완되니 살 만했다.

개울가의 수박밭에서 잘 익은 수박을 골라 하나씩 따 들고 집으로 향했다.

“삼춘두 육상했슈?”

햇빛에 번들거리는 김인랑의 근육에 감탄하며 조슬찬이 물었다.

근육뿐만이 아니다. 김인랑은 아침에 조깅할 때도 지치지 않았고 산을 오를 때도 거침없었다.

“요즘 들어 하는 편이야.”

진혁 덕분에 김인랑뿐만 아니라 세인에서 파견된 경호원들도 아침저녁으로 달리고 있다.

진혁과 멀리뛰기 내기도 하는데 대충 뛰어도 7미터를 넘기는 진혁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

마늘과 인삼이 찹쌀보다 많이 들어간 삼계탕으로 점심을 해결한 선수들에게 꿀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친구들이 유진이와 장군이를 데리고 노는 동안 진혁은 친구들의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방에 들러 학교에 부탁해 받아온 보충수업 문제지를 살폈다.

‘방학 동안 2학기 진도를 미리 뺄 생각이었구나.’

역시, 고입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안배였다.

씨름부도 예외 없이 방학 보충수업에 참석하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 별건 없네.’

채규호와는 이미 3학년 2학기까지 진도를 나간 상태였고, 진혁이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채규호가 만들어준 교재와 더불어 보충수업 교재도 풀면 친구들의 학업도 충실히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공부할 내용은 많은데 반해, 저녁 여유 시간은 짧았다.

회복을 위해 오후 휴식 시간을 너무 길게 수정한 것도 문제였다.

“얘-.”

친구들을 부르려던 진혁이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나 신나게 노는데, 오후 휴식을 없애자고 하면 정말로 욕을 할지 모른다.

“까하하-! 잡아봐라요-.”

“······거기 서라아······. 다리 알 배겨서 힘들다아-.”

그 무뚝뚝한 박상기도 유진이와 술래잡기를 하며 환하게 웃지 않나.

진혁은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밤에 빡세게 하자.’

태양이 누그러질 무렵, 흙집 근처에서 오후 훈련이 시작되었다.

진혁이 멀리뛰기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곳에서 진행한 스프린트 훈련이었다. 대략 50미터 거리였는데 의외로 박상기의 순간속도가 다른 두 친구보다 괜찮았다. 중등부 윙 포워드 축구선수의 탄력과 폭발력에 스파이크가 더해진 결과였다.

‘상기가 신호 반응 속도만 좋으면 스타트를 끊어도 될 텐데.’

집중 훈련을 보통 담금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겠지.

단점이라는 불순물을 제거해 장점이라는 순도 높은 금속을 얻기 위한 고된 여정.

‘슬찬이는 어떤 금속일까, 병택이와 상기는-.’

진지한 얼굴로 친구들을 살피던 진혁이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파고들어 궁리하면 친구들 머리 위에 원소기호가 뜰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