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49화 (149/338)

< 곽란의 서머 캠프 >

***

불현듯 고개를 든 슬픔에 아침 운동을 걸렀다.

곰짐 준공 후에는 악천후에도 거르지 않았던 운동인데, 그 정도로 내상이 심하다고 해야 할까. 명치에서 폭풍 속 대양이 너울거리는 듯 울렁거렸다.

평화롭지 못한 감상을 적당한 운동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알고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호흡이 조절되지 않는 탓에 신체 리듬이 깨질까 우려스러웠다. 의욕도 생기지 않았고.

씁씁- 후- 후우-.

닭 존슨 주니어들이 울고, 늦잠 자는 부하견들에게 장군이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제 학교 가야지.’

심장을 가득 채웠던 진홍의 열기가 소거되었다 하여 삶을 내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기치 않은 희노애락에도 불구,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런 나약한 성정의 소유자였다면 일찌감치 생을 저버리거나, 되는대로 살다가 폐인 또는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진혁은 그리 허약한 사람이 아니었고, 전생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에헤헤헤헤-, 방학이다.”

조금 다른 의미의 다른 사람이지만. 뭐 다른 건 다른 거니까.

진혁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구름을 걷어내려 연기가 나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오르막과 내리막, 커브와 직선도로.

매일 다니는 길은 옆에서 보아도, 하늘에서 보아도 절대 2차원적 평면성으로 해석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 생겼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길이 제아무리 길고 굽이졌다 한들, 인생의 곡절만큼 입체적이지는 못할 터였다. 10킬로미터 거리는 어느새 진혁의 머릿속에 한 점으로 축약되어 자리 잡았다. 아무리 좋게 쳐주어도 개울을 건너기 위해 디뎌야 하는 징검다리 하나와 비슷한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휘이-! 상쾌하구먼!”

느림보 승용차를 추월한 진혁이 마침내 등교를 마쳤다.

연료처럼 태운 간밤의 애상은 재가 되어 고요히 침전했다.

상념이란 일부러 걷어내려 애쓰지 않아도 당면한 현실에 집중하면 사라지기 마련 아니던가.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진혁은 그 분야에 무서우리만치 특화된 사람이었다.

‘집중, 집중. 챙길 일이 많아.’

중학교 3학년생들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여름 방학에도 보충수업을 했다. 시골 중학교에서 무슨 보충수업이냐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 나름 영재라는 학생들은 과학고나 명문 사립고 진학을 목표로 학업에 매달렸고 인문계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태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한데 합숙 훈련을 하자면 진혁은 물론 친구들도 보충수업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운동 때문에 학생의 본분에 소홀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1교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진혁은 채규호를 찾았다.

방학 날을 맞아 소란스럽던 교실이 진혁의 등장에 일시 조용해지며 홍해처럼 갈라졌다.

“삼 학년 이 반 안녕?”

“어어-, 회장도 안녕.”

웬일로 먼저 인사하는 학생회장을 의아쩍은 눈으로 보며 학생들은 인사를 받았다. 친구들 간의 인사가 불법도 아닌데, 그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닌 손진혁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진 탓이다.

학생회 학예부장 채규호가 반색했다.

“어? 회장이 웬일이야? 먼저 찾아오고?”

“해가 서쪽에서 뜰 거 같니?”

“해는 원래 서쪽에서 떠! 정확히는 해는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자전하면서-.”

“아, 됐고. 과학고 결과 나왔니?”

진혁은 엉뚱한 데 꽂혀서 발끈하는 채규호의 말을 급히 끊었다.

모범생 채규호도 어쩔 수 없는 사춘기 남학생이었다. 이놈의 사춘기 녀석들은 얌체공 같아서 한 가지 주제로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아직. 방학 중에 나올 거야. 광복절 지나야 나온대. 우리 형 때도 그랬어.”

채규호는 과학고 입시를 위한 시험을 치른 상태였다.

진혁은 채규호의 합격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몇 명의 학생도 함께 응시했는데, 그중 채규호의 학업성적과 두뇌가 단연 최고였다.

‘내가 봐왔던 사람 중에 가장 똘똘해.’

채규호는 학구열에 창의력을 더한 응용력까지 겸비한 녀석이다.

공부병을 지병처럼 가족력으로 갖춘 데다, 중학교 내내 진혁에게 과외까지 받았다. 나중에는 진혁도 채규호를 가르치는 일이 불필요하다 느낄 정도였는데, 녀석이 졸업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고집한 탓에 함께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니 지켜야 한다는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진혁은 졸업할 때까지 채규호를 가르치겠다는 약속을 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신우성과 이승훈과 약속한 기억만 있었다.

물론,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채규호보다 뛰어난 인재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진혁은 채규호에게 주입했던 계획을 되새겼다.

“너 의대 가겠다는 소리하면 알지?”

“에이, 내가 왜.”

채규호의 형들은 모두 의대에 진학했다.

한데 채규호는 얌전해 보이는 성격과 달리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집에서는 공부도 하지 않고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RC카를 만들어 조종하는 등 취미활동에만 매달린다고.

다행스럽게도 채규호의 부모님은 막내아들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편이라고 했다. 학업성적이 좋으니 반대할 명분도 없을 터였다.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실까?”

“울 엄마랑 아빠는 이제 늙어서 잔소리도 안 하셔.”

진혁은 자신을 따라 태양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녀석을 겨우 설득해 과학고에 진학하도록 했다. 진혁과 함께 태양고등학교에 다니면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나?

채규호의 오해였다.

진혁은 외우는 타입이었기에 중학교 과정이 수월했을 뿐, 고등학교 학업 과정은 자신이 없었다. 전생에는 홀로 살아남기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공부에 매달렸을 뿐이다.

뭐, 채규호의 꿈이 소년등과라면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규호는 누가 봐도 공돌이의 피가 흐르는 녀석이었다.

“아무튼 나랑 약속한 거 잊으면 곤란해.”

“아, 걱정 말라고. 형들이나 신경 쓰는 거지 막내는 원래 망나니짓을 해도 오냐오냐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 말도 있잖아. 아들 부잣집 망나니 막내아들.”

머리가 굵었다고 제법 말대답을 하는 채규호였다.

‘그런데 그런 말이 있어?’

진혁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좀비와 사이보그가 결합된 괴란한 혼종을 목격한 느낌이랄까.

채규호는 로봇공학자가 꿈이라고 했다.

진혁은 세인그룹에서 앞으로 진행할 장학생 지원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꿈을 키울 기회가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해온 터였다. 잘하면 미국 유학도 보내준다는데 솔깃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너랑 비슷한 애들 있으면 확실히 꼬시는 거 잊지 말고.”

“걱정 붙들어 매랑께-.”

능글맞은 말투로 채규호가 어울리지 않는 유머를 시전했다.

순진해 보여도 속에는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 녀석이니 이 정도면 알아서 하겠지. 진혁은 미래 구상의 한 조각을 채규호로 채워두었다.

수다를 떠느라 잊고 있었다.

진혁은 뒤늦게 본래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내가 부탁한 건 가져왔니?”

“당연하지! 누구 부탁인데!”

진혁은 채규호에게 1학년 때부터 함께 공부하며 필기한 내용을 요약해 제본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입학시험 시기가 빠른 채규호였기에 그에게도 좋은 복습 기회가 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고맙다. 귀찮았을 텐데.”

“고맙기는! 따지고 보면 회장이랑 같이 만든 건데.”

진혁은 채규호가 만든 교재를 합숙 훈련 기간에 친구들을 위해 활용할 계획이다.

채규호가 낑낑대며 사물함에서 제법 두툼한 책을 다섯 권이나 가져왔다.

“회장, 여기 잔돈.”

“잔돈은 너 가져라.”

“무슨······.”

옆구리에 책을 끼고 나서는 진혁을 채규호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장은 정말 현실 감각이 없나 봐.’

제본하는 데 10만 원 수표를 준 것도 모자라 8만 원 가까운 잔돈을 가지란다. 복사비, 스프링 제본비 다해서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

하긴, 현실 감각 없고 겁대가리 없는 회장이니 1학년 때 선배들을 두들겨 팬 거겠지.

‘나중에 이자 달라는 건 아니겠지?’

내가 만약 회장에게 일수 찍힐 때면, 누가 날 구원해주나······.

여럿이 덤벼도 안 될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돈을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채규호는 1학년 때의 악몽이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액수를 확인 후 입이 귀에 걸렸다.

이히-.

이 돈이면 BB탄총이 몇 자루냐.

레고를 살까?

***

태양중학교의 모든 학생이 태양고등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는 남녀 학급으로 나뉘는 데다 학생 총원도 줄기 때문에 태양중학교의 학생 수만 따져도 절반 이상이 다른 고등학교로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게다가 다른 지역 중학교 출신들도 지원을 하다 보니 태양고등학교의 경쟁률은 3:1을 넘었다.

“에, 그럼 박상기, 염병택, 조슬찬은 손진혁의 집에서 합숙을 하는 것으로 하고 방학 보충수업은 열외로 하겠습니다. 각 반 담임 선생님들께서는 그렇게 아시고-.”

“교감 선생님, 그래도 되나요?”

조슬찬의 담임 교사가 물었다.

“전교 일등이 과외해준다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술 먹고 놀겠다는 것도 아니고 육상 대회 준비도 한다는데 말이오.”

“예.”

진혁은 일찌감치 부모님과 학교에 허락을 구했다.

학생회장이라는 감투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진혁과 친분이 쌓인 교감 선생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합숙 훈련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방학이 시작된 날 학교 운동장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육상부 친구들도 미리 허락을 구한 터라 불참자는 없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진혁이 친구들을 맞았다.

각각 차를 몰고 나온 문석일과 김인랑이 친구들의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와-, 차 좋다잉-.”

“슬찬이는 할머니 허락받은 거 맞지?”

“아-, 그렇다니께! 진혁이네 간다니께 좋아하시던디? 근디 둔은 진짜 안 줘두 되는 겨?”

“자꾸 돈 얘기하면 개집에 재운다?”

조슬찬의 가방을 트렁크에 실으며 진혁이 실실거렸다.

콧대 높은 장군이가 슬찬이와 합방을 할리 없으니 개집 1층에서 자야 할 텐데, 대형견이 셋이나 있어서 쉽지 않을 거다. 별것도 아닌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진혁이 실실 쪼개는 모습에 조슬찬도 씨익 웃어버렸다.

“병택이네 부모님은 뭐라셔?”

“얼른 꺼지래. 날씨도 더운데 나 없어야 누나들 편하게 벗고 지낸다고.”

천하장사 소세지를 우물거리며 염병택이 중얼댔다.

염병택의 집은 읍내에서 다방을 한다.

다방이 참 많기도 했고, 일하는 누나들도 많았다. 염병택은 그들을 ‘김양 누나, 박양 누나’라는 식으로 불렀다.

“상기는?”

“나야 뭐······.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시던데.”

말수 적은 박상기가 그리 대답하며 뚱한 얼굴로 먼 산을 보았다.

박상기는 다른 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방학식 전까지 며칠간 함께 아침마다 운동을 했는데, 전생의 진혁만큼은 아니어도 숫기가 없고 말수가 적은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여자친구가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 거기 전화기는 있겠지······. 여자친구랑 통화해야 하는데······. 집은 넓은가······. 나는 코 고는 사람이랑 못 자는데······.”

중얼중얼-.

혼잣말은 엄청 많이 하는 녀석이었다.

“삼촌, 가시죠.”

“그래.”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탄 태양중학교 육상부가 합숙 장소인 진혁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차창을 내리고 활짝 웃으며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는 조슬찬, 고급 승용차 내부를 구경하는 염병택, 눈을 사선으로 올려 뜨고 중얼거리는 박상기.

이들은 선수들에게 무관심했던 이병세로부터 해방됐다는 생각과, 바닷가 마을에서 여름 방학을 지낼 수 있게 됐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막상 도착하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고 멋진 곳이었다.

“와-,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무화과나무, 자두나무, 포도나무······. 이건 이파리 보니까 앵두나무 같네?”

조경 전문가를 꿈꾸는 염병택이 마당 주변에 심어진 유실수를 보며 감탄했다. 염병택은 대학진로도 조경 관련학과로 이미 정한 상태였다. 물론, 대학에 갈 수 있을 때의 얘기였지만.

“워-. 큰 개가 세 마리나 더 생겼는디? 장군이 워쩐다니? 눈칫밥 먹겄다아-.”

1학년 여름 방학 때 한 번 와 본 조슬찬이 장군이를 보며 속 모르는 소릴 해댔다. 장군이가 눈동자만 굴려 하찮다는 눈빛을 보내거나 말거나.

박상기는 잔디 정원에 관심을 보였다.

“······나무만 없으면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다.”

마당은 족구장보다 넓었고, 주변에는 여름을 맞아 온갖 꽃이 만발해 있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은 어울리지 않게 꽃향기를 맡고 개를 만지며 즐거워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서 와. 편하게 지내렴.”

유치원생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진혁의 아버지도, 돌배기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친구들을 반겼다.

“오빠 친구들 잘 왔다요.”

“애부우-.”

정원이도 인사성 밝은 누나를 따라 뭐라 뭐라 인사하는 것 같았다.

특별한 재회를 맞은 조슬찬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므니, 아부지 안녕하셨대유-.”

“아이구, 우리 슬찬이 또 울어?”

한유영이 조슬찬을 안아 다독였다.

한창 예민할 시기인 조슬찬의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까, 한유영은 암암리에 후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금세 들통났지만.

조슬찬은 후원을 알게 된 후로 한유영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효심을 보였다. 선의를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아는 녀석이어서 다행이었다.

“짐부터 풀자.”

아이들은 짐부터 풀기 위해 진혁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도 방이 세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진혁의 방이었다. 박상기가 작은방 하나를 혼자 쓰고 염병택과 조슬찬이 함께 다른 방을 쓰기로 했다.

“2층에도 냉장고가 있는디?”

“와아-, 이거 다 진혁이가 먹는 거야?”

“오······, 빠나나다······.”

냉장고에는 과일과 스포츠 음료, 보리차와 결명자차, 오렌지주스와 우유,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너희들 온다고 엄마가 채워두신 거야. 실컷 먹어. 슬찬이 바나나 좋아하지?”

혹시 눈치를 볼까, 진혁이 바나나 껍질을 벗겨 조슬찬에게 건넸다.

***

“히야-, 최고로 멋진 여름 방학이다!”

염병택이 평상에 벌러덩 누워 외쳤다.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진혁의 집에 도착해 진혁의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구경을 하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저녁에 장어 숯불구이를 먹고 널찍한 평상에 누워 별을 볼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멋진 여름 방학이었다.

잠들기 전, 진혁이 합숙 훈련 계획을 브리핑했다.

모름지기 목표라는 것이 있어야 훈련도 그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나. 합숙의 목표를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각인시킴으로써 동기를 부여하고 금쪽같은 경험을 쌓게 하려는, 뭐 그런 거룩한 계획이었다.

세인그룹 회장을 사로잡았던 프리젠테이션 실력이 빛을 발했다.

「광런(光run)의 Summer Camp」

제목을 본 염병택이 물었다.

“썸머 캠프? 여름성경학교 같은 건가?”

“이번 합숙 훈련 이름이야.”

작전명 같은 거다.

아무렴, 작은 행사에도 이름을 짓고 목적을 붙여주어야 그럴듯하지 않던가.

야구나 축구 선수들만 스프링캠프 하란 법 있더냐. 우리는 서머 캠프다.

“진혁아. 광런은 뭐여? 광란 아녀?”

“빛처럼······ 달린다?”

조슬찬의 의문에 박상기가 답을 내놓았다.

금세 흡족한 미소로 화답한 진혁이 괘도를 넘겼다.

팔락-.

“첫째 주는 체근력 훈련, 둘째 주는 민첩성 훈련, 셋째 주는 회복 훈련이야. 넷째 주는 트랙 훈련만 할 거야. 큰 틀만 이렇고, 각자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주력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아이들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괘도에 그려진 훈련 일정표와 진혁을 번갈아 보았다.

놀러 온 거 아니었어? 아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미친놈아, 계주 한 종목 나가는데 무슨 합숙을 4주나 하냐.’

육상 선배랄 수 있는 염병택은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삼켰다.

에어컨을 너무 강하게 틀었을까, 아이들은 한기에 몸을 떨었다.

일정표에 빼곡히 들어찬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아, 여자 친구한테 전화하는 거 깜빡했다······.”

박상기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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