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어른 (5) >
***
예년보다 무더운 7월도 훌쩍 흘러 하순이 되었다.
똑똑-.
부회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군수산업 관련 서류를 검토하던 홍기준이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부회장님, 정동준 차관님 오셨습니다.”
“모셔요.”
서류를 정리한 홍기준은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까지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권력이라는 게 좋긴 좋구나. 고위관료가 20분이나 일찍 도착해?’
진혁의 요청으로 성구대교에 대한 전체적인 진단을 요청한 상태였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다방면으로 압박을 가하기는 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악수를 나눈 정동준 차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위에 계신 분께서 심경이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나름대로 부담을 주고 생색을 내려는 목적으로 꺼낸 말이었으나, 정동준의 기대와 달리 홍기준의 입꼬리는 여유 있게 올라갔다.
‘아이고, 이 양반아······. 진혁이 덕에 욕 덜 먹는 줄도 모르고.’
홍기준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비쳤을까, 정동준은 애써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며 넥타이 매듭을 늦추었다.
“크흠-. 홍 부회장께서 요청하신 일이 경쟁사 죽이기로 비출 수도 있는 문제라서-.”
“이보세요. 정 차관.”
홍기준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만들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대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전생의 홍기준에게 철혈 협상가의 이미지를 심어준 포커페이스였다.
차가운 홍기준의 어투에 정동준이 급히 입을 다물고 허리를 세웠다. 자신보다 젊은 홍기준이라고는 하나, 대한민국을 휘어잡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영향력을 떨치는 그룹의 부회장. 섣불리 하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권력자였다.
‘참아야 한다.’
홍기준은 지금 스스로 강자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누가 감히 부처 장관을 휘두른단 말인가. 대한민국이었고, 세인그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가 우리 경쟁사라고 하는 겁니까?”
“실언을 했습니다.”
정 차관이 머리를 숙였다. 상석에 앉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되새기면서였다.
‘세인은 경쟁자가 없다.’
정동준의 눈에 홍기준은 몇 년 전 갑자기 등장해 대한민국 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인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 생활용품 제조 및 유통, 판매를 비롯해 반도체와 자동차, 건설, 통신, 조선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업을 총괄한다.
‘군수산업에도 손대고 있지.’
그뿐 아니었다.
자체 개발한 로켓을 쏘아 올려 세계의 이목을 끄는 젊은 사업가. 비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그 로켓에는 위성이 아닌 다른 물체를 탑재할 수도 있다고. 더 무서운 사실은 높이 쏘아 올린 그 물체를 조종해 원하는 곳에 떨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던가.
‘법망 내에서 군대를 키우는 괴물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저 미국이 자발적으로 제재를 풀고 협조하도록 만들었지.’
물론, 정치 권력조차 접근이 불가능한 탓에 기밀을 파헤치지는 못했다.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국격을 높인 기업을 압수 수색해 수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VIP도 세인그룹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이른 터였다. 협조하라는 것도 아니요, 조사하라는 것도 아닌 ‘조심하라’.
사실, 무기화를 염두에 둔다면 국가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자국 영토의 자국 기업이 보유한 기술이 언제든 군 전력에 도움이 된다면 싫어할 정부가 있을까. 연일 국지 도발과 망언을 일삼던 북한조차 비 맞은 개처럼 바짝 엎드려 있는 국면이니, 정권에서는 차라리 웃음을 참느라 표정 관리에 나선 모양새였다.
“됐습니다. 편하게 얘기 듣도록 하죠.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공사 과정의 부실을 따지기는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준공이 10년을 훌쩍 넘긴 데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를 진단한다는 것이-.”
홍기준이 미세하게 주억였다.
정 차관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예상했던 핑계를 들고 올 수밖에 없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100년, 200년을 염두에 두고 지어야 할 다리가 20년도 안 되어 붕괴되는 것이 상식으로 납득 가능한 일인가.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정 차관이 둘 외에 아무도 없는 넓은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상체를 숙였다.
예전이었다면 함께 몸을 기울였을 홍기준이지만,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묻은 상태를 유지했다.
사회적 위치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여유란 그런 것이었다. 어차피 녹음 중이고, 아무리 작게 얘기해도 기가 막히게 소리를 잡아내는 장치가 작동 중이기도 했다.
“······균열이 다수 발견됐습니다.”
“그런데도 부실공사가 아니고 부실 감리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과적 차량의 통행도 무시 못할 정황이어서 말입니다. 단속도 하지 못한 마당에 달리 드릴 변명은 없습니다만······.”
손수건을 꺼낸 정 차관이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에어컨도 가동 중인데 왜 이리 더울까 생각하며.
홍기준의 귀에는 핑계인 동시에 현실적인 사유로 들렸다.
능력 부족이든, 고의 회피든.
원인 규명을 하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 이제 와서 누굴 징치할 수 있을까. 처벌받을 사람이 그때의 담당자가 맞기나 할까.
‘처벌은 덮자는 말로 들리는구먼.’
반드시 처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따로 조사해도 될 일이었다. 홍기준의 손에는 이미 그럴만한 권력도 무기도 있었으니.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의 의제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사람도, 철학도 시간에 의해 버림받는 쓰레기로 전락할 뿐이다.
홍기준은 아직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애초에 진혁이 자신에게 막아달라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이고.
“어쨌든 균열이 발견됐다면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재공사가 시급하다는 의견입니다. 헌데······.”
“편하게 얘기해보세요.”
처음보다 풀어진 표정으로 홍기준이 잠시 머뭇거리는 정 차관을 독려했다.
“명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제도와 적법한 절차를 거치자면 1년이 넘게 걸리는 데다, 당장 재공사를 한다면 시민 불편도 그렇고······.”
흐흣-.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홍기준은 하릴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시민 안전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설령 이 홍기준이 불순한 목적으로 검사 요구를 했다 해도, 위험성이 확인된 이상 보수공사든 재공사든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관님도 장관님이지만 각하께서······.”
에잇, 젠장.
그놈의 정치 관료들. 잠시 이를 악물었던 홍기준이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이제 신사적인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내가 전화 한 통 넣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동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른 앞에서 혼나는 아이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정동준의 인사를 외면한 채 턱에 힘을 주는 홍기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정말 부수는 방법뿐이다.’
전문가인 문석일에게 최후의 방법을 물어본 바 있다.
새벽에 양측 차로를 모두 막고 폭파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다던가.
그래도 대의를 빙자한 테러만은 피하고 싶었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국가 아닌가. 구성원으로서 준수해야 할 규범이라는 것이 있고, 홍기준에게는 이를 따를 만한 양심이 있었다.
‘진혁이 녀석도 저 혼자는 방법이 없으니 떠올린 생각이 그거였겠지. 그래서 내 앞에 나섰을 테고.’
진혁의 심정이 절절이 이해가 되었다.
어두운 미래를 아는 자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으리라는 공감이었다.
부회장실을 나서는 정 차관에게 비서가 쇼핑백에 담긴 건강식품을 건넸다.
정동준은 비서에게도 굽신거리며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홍기준도, 정 차관과 비서도 알고 있었다.
‘푼돈도 아까운 놈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홍기준은 새삼 감탄했다.
전생에는 그저 말로써 타협과 상쟁을 반복했고 논리라는 무기로 상대를 압살하겠다는 의지로 전장에 섰는데, 다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돈과 재벌의 위력을 확인하고 있었다. 돈 앞에서는 논리가 필요 없었다.
‘예전에도 진작 이렇게 했다면.’
수정이가 그 고생을 안 했을 텐데.
가정일 뿐이다.
지난 시간도 아닌 사라진 시간을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그때는 이만한 돈과 권력이 없었기에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듯했다.
‘수정이도 이번엔 편하게 살겠지.’
처음에는 의젓하고 어른스럽던 손진혁이 점점 어려지는 듯한 느낌도 신선했다. 그러고 보니 홍기준 자신도 시간이 흐를수록 젊은 감각을 나날이 깨치는 중이었다.
‘회춘한 거지. 아이 어른으로.’
어른 아이인가? 뭐, 뜻만 통하면 됐지.
홍수정과 함께 있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그 또래로 보일 만큼 진혁은 밝고 싱싱한,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나는 현상 유지나 하며 지원을 하면 그만이다.’
미쳐버릴 것 같던 정신이 진혁과 터놓고 통화 후 안정을 찾은 것 외에도 홍기준은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세간에서 예지에 가까운 행보라고 칭송할 정도로 경제생태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니, 예전처럼 수 싸움을 하며 손익을 계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던 고생이 사라지고, 그저 계속 앞서나가면 되는 일만 남았다.
권력을 쥔 채 제 뜻대로 일을 펼치고, 경쟁자를 따돌리고 나니 비로소 정보를 가진 회귀자의 특전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달까.
이제 중앙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충분히 견딜만하지만, 곧 편히 쉴 수 있겠어.’
시간은 빠르다.
아이들은 금세 자랄 테고, 세상은 홍기준의 활약에 힘입어 더 빨리 변할 것이다. 이제 자신은 사람에 투자하며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길 날을 기다릴 셈이다.
멀지 않은 날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홍기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아직 식지 않은 커피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수정이가 세라보다 여우야.’
엄마는 아기를 돌봐야 하고, 아빠는 바쁘니 방학 때 홍수정 혼자서라도 징역 오빠네 놀러 다녀오라고 일렀거늘. 홍수정은 도 닦는 신선처럼 눈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헤프면 안 된다나? 제 엄마는 엉뚱하고 욕심 많은 사람이었어도 홍기준의 청을 물리치거나 감정싸움을 유도한 적은 없었는데. 이래서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는 거겠지.
그러면서도 홍수정은 무조건 냉랭한 모습으로 일관하지도 않았다.
밀당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훌쩍 큰 키만큼이나 담력도 대단해졌달까.
‘손진혁 이놈. 고생 좀 해봐라.’
크크큭-.
홍기준은 아들의 돌잔치 때 두 녀석이 연출한 풋풋한 장면을 떠올리며 마왕처럼 웃었다.
***
방학을 앞둔 날, 진혁은 창문을 열고 합숙 훈련 계획을 점검했다.
“체력 훈련이랑 심폐 지구력 향상 훈련은 등산으로 하고, 스타트 훈련에 닭 존슨 주니어 오 세도 넣을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닭 존슨은 중학생한테 상대가 안 돼. 회복 훈련은 이 주 차부터. 알을 좀 배기게 만들어야 훈련하는 맛이 나지······.”
중얼중얼-.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듣는 이도 없는데 대화하듯 홀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는데, 최근 들어 집중력이 떨어지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저도 모르게 그리되었다.
“정리가 안 되네.”
탁-. 키보드를 두드리던 진혁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월어월어월월월-!
밤하늘에 퍼지는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아직도 이상하게 두근댄다.’
그건 아마도 전생과 현생, 두 홍수정의 영향일 터였다.
심장어림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
홍수혁의 돌잔치를 마치고 시골로 내려가기 전, 진혁은 용기를 냈다.
몸을 낮춰야 열매를 찾을 수 있고,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진리를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몸을 낮추면 이제 홍수정보다 눈높이가 낮아질 테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현재에 발을 디뎠으면서도 진혁은 전생의 홍수정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나 이제 사라진 시간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임을 안다.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인데 나만의 집착은 아니었을까······.’
현생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는 훌쩍 자란, 꼬맹이였던 홍수정과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징역 오빠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빼액 울던 모습부터, 개울에 자빠져 버둥대며 애타게 오빠를 찾던 모습까지.
응큼한 마음 따위 품을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껌딱지처럼 달라붙으며 공허한 가슴 한구석을 채워주던 개구쟁이 홍수정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기억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며 진혁의 삶 한 조각을 채워주는 사람이니까.
‘발 디딘 시대에 책임을 져라.’
유명선이 손광연에게 전하던 가르침을 떠올렸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팔을 활짝 벌렸다.
꽐라 홍수정에 대한 작별 인사이자 꼬맹이 홍수정을 향한 손징역 오빠의 화해의 제스처였다.
‘눈 감으면 안 된다. 창피해하면 안 된다.’
세상 누가 손가락질해도 아무렇지 않을 심장이었는데.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철면피였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저 간절하게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진혁은 진심임을 표했다.
“수정아······. 오빠 가면 또 한참 못 보잖아.”
“······.”
휘둥그레진 눈으로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려던 홍수정이 멈칫했다.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자제력이었다.
홍수정은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사방의 눈치를 살폈다.
보는 눈이 많다.
엄마가 그랬다.
징역 오빠만 보며 미친년처럼 헬렐레하다가는 징역 오빠가 지겨워할 거라고. 여자란 자고로 콧대를 높이고 도도하게 굴어야 한다나? 남자들이 상사병에 걸려 죽을 만큼 아프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했어.
‘아프면 병원 가야 하는데.’
다시 징역 오빠를 보았다.
촉촉하게 빛나는 거인의 눈이 저만을 보며 웃고 있었다.
병원에 보내기 아까운,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이었다.
홍수정의 입이 저도 모르게 입이 헤에- 벌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행동은 조심조심 새침하게.
유세라 엄마도 아빠 앞에서 돼지 다리뼈 뜯는 거 보면 그다지 도도한 것 같지는 않더라.
*
허어어-.
길게 한숨을 내쉰 진혁은 서울 꼬맹이가 턱을 기댔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홍수정이 다독거려준 등에도 손을 뻗어 조심조심 더듬었다. 손끝으로 꽐라 홍수정의 탄력이 전해지는 듯했다.
- “오빠 아프지 마.”
무슨 말인지 뜬금없었지만, 제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목소리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직접 경험한 과거도 서서히 흐릿해져 갔으나 절대 잊을 수 없는 존재도 있는 법이었으니, 하필 꽐라 홍수정의 음성이 겹쳐진 까닭에 진혁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괜히 발도 동동 찼다. 미래에는 이불킥이라고 부르던가, 그러나 속뜻은 달랐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감전될 듯 옆구리가 찌릿거리는 탓에 자연스레 나온 동작이었다.
이히히-. 갑자기 푼수처럼 웃음이 나왔다.
늘 다음 할 일을 생각해두고 계획을 세우던 사람인데, 방학이 시작되면 당장 합숙 훈련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다.
지금 누굴 생각하는 것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아이고, 내가 왜 이러냐.”
이히히히히-.
유진이가 두고 간 아찌곰을 와락 끌어안고 인형 허리에 트라이앵글 초크를 걸었다. 진혁의 각력을 버티지 못한 아찌곰의 배가 50대 부장의 술배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
그 밤.
또렷한 꿈은 오랜만이었다.
신나서 다리를 동동거리는 꽐라 홍수정을 업고 서늘한 밤거리를 걷는 꿈.
그간 간절히 그리워했는데 꿈에라도 나타나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텅 빈 거리에는 사람이나 자동차 대신 안개가 자욱했다.
‘오퐈는 꿈이 모에야?’
‘오퐈 고자에야?’
오냐오냐했더니 꿈에서도 선 넘네.
뭐라 대답하려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는 입이 아쉬워 진혁의 어깨가 떨렸다.
‘지금이 더 좋아야?’
‘오퐈는 나 안 보고 싶어야?’
이제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다.
머뭇거리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지금이 좋지만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하루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혼자만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내내 그녀에게 미안하던 터였다.
겨우 힘을 끌어내 마음속으로 대답하자 잠든 몸에서 끄으- 앓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어깨가 가벼워지며 꽐라 홍수정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불처럼 몸을 감싸는 짙은 안개 속에서, 늘 그랬듯 혼자가 되어 어리둥절하게 밤거리를 두리번거렸다.
홀로 멈춰 서는 것만큼 익숙한 일도 없는데 희한한 일이다. 해일처럼 밀려들어 심장을 옥죄는 도시 한복판의 냉기가 낯설고 또 낯설었다.
전생의 손진혁은 아이다운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끝내 아이로 남았다. 시계와 달력의 지시대로 나이라는 수치만 적산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온 이 영혼은 아이인가, 어른인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아프지 마.’
소리가 들린 곳에 꼬맹이 홍수정이 진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질세라 등 뒤에서 홍수정 전무가 물었다.
‘언제까지 아이로 머물러 계실 거예요?’
흑백사진을 몰래 꺼내보는 진혁에게 홍수정 전무가 하던 말이었다.
본능에 이끌려 제멋대로 뒤돌려는 몸을 잡아 세웠다.
이제 앞으로 가야 할 때임을 아는 까닭이다.
과거의 아이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늘까지만요······.’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었다.
긴 속눈썹에 이슬이 맺히며 가슴이 한차례 들썩였다.
안녕, 전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