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어른 (2) >
지금의 홍기준은 그저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노인이 아니었다.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어른으로서 진혁에게 당부를 남기는 중이었다.
진혁으로서는 굳이 반항심을 발동할 이유가 없었다.
“선동하지 않는 소수가 될게요.”
어차피 먹고살 걱정은 없다.
한 달에 땅을 열 평씩만 팔아도 몇 대가 먹고살 부자인데 굳이 권력을 탐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삶은 평범하지 못하다. 그렇게 얻은 권력 때문에 가족이 다칠 수도 있다. 보는 눈도 없는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 그래. 문 팀장 통해서 하려는 일도 네 욕심만 채우려는 시도는 아닐 테지.
진혁은 통화를 마친 후 홍기준이 했던 말을 복기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뒤끝이라 얼토당토않게 칭할지도 모르지만, 홀로 세상을 배우던 진혁이 도태되지 않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모든 말이 의미 있었지만 유독 진혁의 뇌리를 물고 늘어지는 말이 있었다.
- “지금처럼만 해. 회장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니? 세상 사람들은 그룹 회장이 놀고먹는 줄 알지. 가끔 카메라 앞에 얼굴이나 비추고, 정치인 만나 악수나 하는 줄 알아. 공장 가서 손이나 흔들고 대학에 나가 강연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처럼 생각해.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잘못된 인식이랄 것도 없지만, 기록에 남지 않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는 사람도 있지. 우리 손 회장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지금처럼만 해. 아이처럼, 어른처럼.”
전생의 홍기준 회장 자신을 위한 변명은 아닐 터였다.
짧은 대화였으나 진혁의 모든 생을 통틀어 홍기준이 던진 메시지 중 가장 의미심장한 명제를 함의한 말이었다.
‘손 회장이라······.’
친구들도 반장이나 회장이라 부르는데, 이 아저씨도 따라하네?
그렇게 부르면 재밌나?
아무렴 어떠냐. 뭐라 부른들 존재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회장.’
복수 따위 꿈꾸지 말라는 뜻에서 그럴듯한 목표를 주입하려 한 것임을 모를 리 없다. 비단 진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었어도 설렐만한 말이었으니.
컴퓨터 전원을 끄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장맛비에 깨끗해지는 공기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해졌다.
갓 면허를 따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도로주행을 나선 기분도 들었다.
‘아, 나 운전을 별로 안 해봤지.’
홍수정 전무의 차를 몇 번 운전해 본 경험이 전부였다. 강릉에 조개구이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였나. 아무튼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홀가분하게 들린 홍기준의 목소리도 이색적이었다.
홍기준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진작에 시그널을 보낼걸 그랬네.’
직접적인 존재의 증명만 없다면 그림자도 제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홍기준과 커뮤니케이션에도 큰 제약이 따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마주보기.
허례의 시선을 걷어내고 심리적 안전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대화할 수 있도록 관계를 재정립한 통화였다.
똑똑-.
열심히 과거 사건을 기록하는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우리 유진이 왔어?”
“네, 에헤헤.”
오늘 하루도 종일 뛰어노느라 피곤할 유진이가 반쯤 감긴 눈으로 오빠 방을 찾았다. 한팔에는 베개를, 한팔에는 아찌곰이라고 이름 붙인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양 팀장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양강욱에게 미안했고 곰아지찌라고 붙이기에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그렇게 붙였다.
“이제 우리 유진이도 누나니까 혼자 자야지?”
“유치원 다닐 때까지는 오빠가 괜찮다고 했다요. 나는 아직 어린애다요.”
“그래.”
제 입으로 어린애라고 하는 동생을 보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동생 정원이에게 엄마를 빼앗긴 유진이를 위해 진혁이 이해하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유진이에게는 따로 오빠를 찾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진혁도 유진이가 지친 이유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다. 유진이가 행했던 이적을 되짚은 기억을 통해 깨닫게 된 까닭이다. 긴가민가했던 순간들이 어느 순간 퍼즐처럼 맞춰진 덕분이었다.
“유진이 오늘은 누구 쓰다듬었어?”
“광마 만져줬다요. 뒷산에 갔다가 오소리한테 코 물렸다요.”
진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얼마나 기특한 동생인가.
함께 놀던 도베르만이 오소리에게 물렸다고 치유를 해주다니. 광마는 경비견 출신답게 유진이를 보호하기 위해 오소리에게 덤볐겠지.
유진이는 운동을 많이 해서 힘든 날에도 홀로 체력을 회복하고는 오빠의 팔을 베고 잠들곤 했다. 진혁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오빠 일찍 자라요.”
“그래.”
동생이 자라는데 자야지. 진혁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는 옆자리를 들춰 유진이가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성능 배터리가 침대에 눕자 유진이가 불을 껐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이야. 세상에는 그런 재주가 있는 사람이 또 없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해. 그리고 조금만 빼 가. 오빠 내일 학교 가야 하-.”
“딴도그, 로르브 니므-.”
“오빠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아, 유진아.
설마 유진이가 중얼거리는 요상한 말에는 닥치고 잠이나 자라는 뜻이 있는 건가?
그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혁은 목에 힘이 풀려 고개가 돌아갔다.
카아-.
***
손정원의 돌잔치는 동네 잔치로 치러졌다.
마을 청년회에서 마당과 잔디 정원에 걸쳐 천막을 치고 상을 놓았다. SSS 요원들도 아침부터 상을 닦고 수저를 놓는 등 일을 도왔다.
‘아, 봉투 좀 받지.’
축의금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아빠를 미워하며 진혁은 정원을 누볐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캠코더를 들고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돌잔치의 주인공을 찍는 거다.
호스트인 부모님은 손님을 맞아야 하고, 이런 가족 행사 때는 삼촌이 캠코더를 들기 마련이었다. 뭐, 삼촌은 아니고 삼촌뻘인 형이지만 주변인 손진혁이 마땅히 맡아야 할 임무라는 것쯤 알았기에 불평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 가족이 있어 비로소 고을의 이름에 걸맞게 볕 가득한 터가 되었으니, 그 광영이 오늘에 그치지 않고 대를 이어······.”
공공의 어르신 천길룡이 하와이언 셔츠 차림으로 축사를 낭독했다. 그의 축사에 눈을 감는 마을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천길룡은 꿋꿋하게 5,500자의 축사를 모두 낭독하는 정력을 과시했다.
‘한 이십 분 읽었나?’
‘그 정도는 읽은 거 같지.’
‘워치케 노인네 체력이 우덜보담 더 좋댜?’
때 이른 뙤약볕 탓에 천막이 없었다면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천길룡의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SSS 의무담당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가주의 행사를 보조하기 위해 대기했다.
돌잔치라고는 하나 특별한 식순 없이 편하게 먹고 마시는 동네의 잔치였다.
점심때도 되지 않은 시각, 한유영과 장진남, 동네 아낙들이 함께 준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시원한 막걸리와 맥주로 갈증을 달래던 마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저건 뭐여?”
“손 사장 차보다 좋은 거 같은디?”
무려 다섯 대의 검은색 고급 세단이 줄지어 들어섰다.
서울에서 행차한 귀한 손님이었다. 어떤 하객인들 귀하지 않겠나만, 손광연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유명선 회장이었다.
유명선 회장과 홍기준의 가족이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방문한 것이다.
유진이의 손을 잡은 손광연과 한유영이 서울 손님들을 맞는 동안 진혁은 쉬지 않고 캠코더를 들이댔다.
“좋은 곳에 사는구나.”
“직접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쁘지 않은 늙은이 움직이는 게 무에 어려울까. 그저 차에 몸만 얹으면 되는데 말이다. 젊은 사람들 노는 시간 방해한 건 아닐지 모르겠구나.”
에흠-.
그때 손광연의 뒤에서 천길룡이 띠껍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어디 어린 녀석이 젊은 사람들 타령을 하냐는 듯이. 천길룡은 유명선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티비에서 보던 사람이다, 신문에서도 봤다, 대통령만큼 유명한 사람 아니냐, 유명해서 유명선이냐······.
하객들을 향해 허리를 숙인 유명선이 천길룡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허허, 어르신도 계신 줄 몰라뵈었습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에흠! 어르신은 무슨. 오셨는데 늙은이끼리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곽향림과 함께 잔칫집을 찾은 조일헌이 벌떡 일어서서 유명선을 자리로 안내했다.
서울에서 회장 일가를 수행하며 내려온 SSS 요원들의 눈에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하객이 다른 하객을 안내하고, 음식을 함께 나른다.
사적으로는 예식장이나 장례식장을 이용했고, 재벌 일가를 수행하면서는 호텔 예식만 참관한 그들로서는 신선한 풍경이었다.
선글라스 뒤에서 눈동자를 분주히 굴리는 수행원들을 양강욱과 문석일이 맞았다.
양강욱이 악수를 청하자, SSS 서울 팀장이 절제된 동작으로 손을 맞잡았다.
“에스 팀 양강욱이다.”
“영광입니다.”
SSS 창립 멤버 양강욱과 훈련대장 문석일을 본 수행원들은 허리를 다시금 곧추세웠다.
“자네들도 편하게 식사하지.”
문석일의 제안에 서울 팀 리더가 홍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홍기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원들에게 편히 착석할 것을 권했다.
어수선했던 상견례가 마무리되고, 진혁은 홍수혁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돌배기에게 캠코더를 겨눈 채였다.
‘수정이를 닮은 듯 안 닮았네.’
엄마 닮은 건가?
순하게 처진 눈꼬리와 넓은 귓불에서 홍기준의 얼굴도 보였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것이, 정원이보다 우량했다. 지금도 홍수혁을 안은 홍기준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많고 어수선한 분위기, 사담을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기에 진혁은 홍기준과 짧은 인사만 나누었다. 홍기준이 진혁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누는 짧은 시선 교환이 전부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애틋한 눈빛이었다. 시선을 넘어 마음으로 마주보는 순간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래?’
홍수정은 진혁을 흘끗거릴 뿐, 말괄량이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못 본 새 어찌나 컸는지 길쭉해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늘 먼저 다가와 까불거리던 녀석이 얌전하니 어색했다.
그러나 진혁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수정이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와씨.
안녕하세요라니.
인사를 하며 홍수정은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똥꼬발랄했던 홍수정이 세상 조신하게 변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진혁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겨우 2년 정도 못 봤다고 이렇게 변할 일인가? 얼굴은 보지 못했어도 몇 달 전까지는 전화 통화도 종종 했는데 말이다.
“언니, 밥 먹고 나랑 놀자요.”
“응, 그래.”
유진이에게도 어른스럽게 대했다.
홍수정은 유진이를 살뜰히 챙기며 변한 시골집을 구경했다.
‘섭섭하네.’
쩝.
진혁은 눈동자로 홍수정을 추적하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방학 때마다 떨어지지 않고 팔을 베고 자던 녀석이 갑자기 내외하니 그럴 수밖에.
‘내가 뭐 잘못했나?’
특별히 이상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 또한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와! 법관이 되려나 봐오!”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정원이 뿅망치를 잡자 장진남이 목소리를 높였다.
법봉을 대신해서 둔 뿅망치라는데, 진혁이 보기에는 뾱뾱- 소리가 나는 망치가 신기해서 잡은 듯했다. 뭐, 저것도 꿈보다 해몽이려나.
‘짜식. 실 잡으라니까. 출세 같은 거 안 해도 되는데.’
유진이는 돌잡이 때 청진기를 잡았고, 진혁은 지폐를 잡았다고 했다.
같은 부모를 둔 형제의 돌잡이 취향마저 이렇듯 제각각으로 갈렸다.
잔치가 끝물에 이르고, 진혁은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왜 아니겠나.
아빠들끼리, 엄마들끼리, 그리고 딸들끼리 뭉쳤다.
돌배기 손정원과 홍수혁은 엄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부둥켜안고 옹알이를 시전하고 있었다.
“빼-! 떼떼!”
“어우우우-.”
홍수혁이 빼액 소리를 지르면 정원이가 달래는 모양새였는데, 엄마들은 연신 깔깔거리며 박수를 쳤다.
진혁의 캠코더에 그 모습이 빠짐없이 담겼다. 주인공은 아기들이니까.
‘나는 누구랑 노나······.’
이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익숙해져서 함께 놀 수 있는데, 또래 최미경은 조일헌과 가을에 결혼하기로 한 곽향림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고, 장진남은 SSS 서울 팀에 섞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민용락은 좋아하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역시 내 친구는 장군이 뿐인가······.’
하객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잔치도 파장 무렵이 되었을 때, 진혁은 비닐봉지에 먹을 것을 넉넉히 담았다.
그러나 장군이를 찾았을 때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 새끼 배 터지겠네.
장군이는 도토리나무 밑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뭘 얼마나 먹은 건지 새끼를 가졌을 때보다 배가 더 불룩했다. 그 곁에는 마찬가지로 배가 불룩한 광마가 보초를 서듯 앉아 있었고, 홍시와 천마는 더위를 피해 수영을 간 듯했다.
‘아 씨······.’
짜증나.
군중 속의 고독이라니.
어차피 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어째 동생들이 생길 때마다 더욱 후순위로 밀리는 진혁이었다.
카메라와 캠코더를 아빠에게 건네고 상이나 치우기로 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외로움이 덜할 테니.
묵묵히 정리를 거드는데 홍수정이 다가왔다.
“저기-.”
저기 뭐 왜 뭐.
흥! 쌀쌀맞게 굴어야지.
나 지금 기분이가 썩 좋지 않다!
철부지 손진혁이 뚱한 표정으로 홍수정 어린이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