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44화 (144/338)

< 아이 어른 >

아이디어만 던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에도 홍기준은 최소한의 실행계획조차 내놓지 못하면서 말만 앞세우는 임원들을 싫어했다. 그런 임직원들은 멸시에 가까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입만 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막말로 머리가 없어도 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불평불만 아니던가.

홍기준은 일찍부터 ‘업이 있고 녹을 받는 자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진혁이 홍기준의 그런 성향을 모를 리 없었다.

“기업 주도로 과학 올림피아드 같은 거 개최할 수 있잖아요. 수상한 학생에게는 장학금도 주고 계속 그쪽으로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주면 좋겠어요. 수상자가 아니어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후원하고요.”

홍기준이라면 미래에 써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알아보겠지. 학생 신분인 진혁이 주제넘게 심사위원으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쪽으로 취약하긴 해.”

“취약하지 않아요. 세계 올림피아드 우승도 하잖아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특기를 살리지 못하는 게 문제지. 괴짜라는 인식과 손가락질도 한몫했을 테고. 혹여 특기를 계속 살린다 해도 해외로 나가는 길 외에는 별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좋아. 내가 할 일은 지적하는 게 아니라 정리하고 실현 방안을 찾아 보고하는 거니까. 다른 건?”

“방과 후 수업 교사들 섭외요. 체육, 음악, 예술 등등.”

민용락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방과 후 수업? 그건 갑자기 왜?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민용락의 손가락은 진혁이 말한 단어를 토도독- 입력하고 있었다.

진혁은 시골 학교 학생들을 위한 방과 후 수업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정규 교원 자격이 없더라도 특기 지도가 가능한 사람으로 하여금 아이들의 재능계발을 지도하도록 하는, 어동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내 모든 학교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계획이었다.

“이건 교육부하고 얘기를 해봐야겠네?”

“어느 정도는요.”

역시 두뇌회전이 빠른 민용락이다. 처음 두더집에 왔을 때보다 일머리가 한층 성장해 있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행 절차를 고려하고 있지 않은가. 진혁이 성장하고 세인그룹이 세상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보를 보이는 만큼 민용락도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갔다.

***

정원이의 돌잔치를 앞둔 어느날이었다.

때 이른 장맛비가 밤공기를 적셨다.

내리는 밤비를 눈으로 좇던 진혁은 빗소리를 음악 삼아 생각에 빠졌다. 간질거리는 팔꿈치와 무릎을 주무르며.

‘이렇게 뒤에서 주문만 해도 되는 건가?’

일찍이 전생의 홍수정 전무는 진혁에게 사람들을 활용하라 조언했고, 현생의 홍기준 아저씨는 즐기며 살라는 말을 했다. 그래도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던 진혁으로서는 좀이 쑤셨다. 어쩌면 그래서 관절이 쑤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가.

보고서의 초안 작성부터 실행 세부계획까지 꼼꼼히 점검하던 일 중독자가 지금은 뒤에서 팔짱만 끼고 있다.

특히 홍기준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과거와 입장이 바뀌지 않았나.

그룹의 오너로서 주문하던 사람이 중학생의 조종을 받는 꼴이다. 물론, 홍기준이라는 유명인이 손진혁이라는 촌놈이 제안한 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서늘한 밤공기가 조금 열린 창틈으로 들어왔다. 깊이 들이쉬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세인에서 자체 개발한 CPU가 탑재된 데스크탑 PC인데, 이 프로세서로 인해 인텔에서 펜티엄 프로의 개발을 엎어버릴 정도로 성능 차이가 확연하다고 했다.

‘예전엔 이 나이 때 컴퓨터를 써보질 않아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경쟁사 모델에 비해 성능이 좋은 모양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뭐, 나름대로 쓸만하기도 했고.

‘나도 이제 기록을 해야겠어.’

토다다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추듯 타이핑을 시작했다.

현생의 기록이 아닌 과거의 사건 기록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며 가물가물했던 과거의 기억이 더욱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강퍅했던 성격이 점차 누그러지는 점도 낯설었다.

취향이라 부를 만한 취미조차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차분한 정서였으나 그 속에서 욕구와 충동이라는 것이 종종 꿈틀댔다.

열세 살의 봄바람을 맞던 때는 그저 호르몬에 의한 망상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어쩌면 회춘이 아닐까. 어린 몸에 들어온 영혼이 몸과 동화되기 위해 차츰 젊어지는 과정 말이다. 간접 경험한 기억이 소실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영육의 괴리가 좁아지는 현상은 반가웠다.

이 또한 살아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가족과 친구 등 없던 존재가 주위에 있는 것과는 다른 감상이었다.

사람이 변하고 계절이 흘러도 저만은 맞지 않는 톱니처럼 홀로 헛도는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세상의 한 조각이 된 기분이랄까.

떠오르는 대로 열심히 입력할 때였다.

드드드드드-.

책상 위에 올려둔 보안 전화기가 덜덜 떨었다. 수신 기능까지 갖춘 새 전화기인데, 세인에서 개발해 테스트 중인 일반 휴대전화를 문석일이 보안 전화기로 개조한 물건이었다.

‘누구지?’

가끔 걸어본 적은 있으나, 시험 삼아 문석일과 통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화를 받아본 일이 없었다.

조심스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 날쎄.

와씨, 놀래라.

진혁은 저도 모르게 바닥을 박차고 일어섰다.

***

홍기준은 얼마 전 올라온 문석일의 은밀한 보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모르면 바보지.

- 성구대교를 부숴야 한답니다.

문석일의 보고를 들은 홍기준은 한바탕 통쾌하게 웃었다. 기침이 터져 가슴이 아팠고 그 고통에 눈물이 솟을 정도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본능은 더이상 답답하게 굴고 근신하는 자세로 일관할 때가 아니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미 확실한 것 같지만 시험을 해볼까?

“날쎄.”

- 예,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보안 전화기를 든 홍기준의 손은 덜덜 떨렸으나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이 고였다.

“다리 문제는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가 알아서 할게.”

- 알겠습니다.

“혹시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니?”

- 제게 말을 조심하셔야 한다는 정도는 압니다.

“얘기가 쉽겠구나. 민 대리를 괜히 보낸 모양이야.”

- 바쁘실 텐데 저만 상대하실 시간은 없지 않겠습니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화기 너머 진혁의 말투가 평소와 다름을 인지한 홍기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던 대로 대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손 팀장이 아니라 진혁이로 대하고 있잖니.”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고민하는 진혁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홍기준은 전생의 마지막 날, 회장의 차에 오를까 말까 고민하며 흔들리던 손진혁 팀장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듯했다.

그때 차에 태우지 않았다면 홍기준에게도 두 번째 기회는 없었으리라.

- 그럴게요.

“고맙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 말이 늘 하고 싶었다.”

- 이유를 모르겠네요. 아, 당장은 말 못 하실 이유가 있으시죠. 언젠가 꼭 들려주세요.

역시 상황파악이 빠른 녀석이다.

한껏 찡그린 채 피로를 호소하던 홍기준의 미간이 기분 좋게 펴졌다.

“약속하마. 어디 가지 마라.”

- 네.

편안해진 마음으로 홍기준이 입술을 축일 때였다.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를 죽인 진혁이 말했다.

- 신풍백화점도 부탁드려요. 아직 시간이 있을 거예요. 잘 안 되면 제가 나설 수밖에 없어요.

“그래, 거기가 있었지.”

- 전부는 모르시는 거죠?

“아는 게 이상한 거지. 작년의 사건을 열거하라 해도 못하는 게 사람이야. 나이가 들수록 더하지.”

홍기준은 차마 300년 세월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 동의해요. 기록해둔 거 이메일로 전해드릴게요.

그래도 이렇게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쁘던가.

홍기준은 안락한 서재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다리도 접어 올려 의자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좋구먼!’

더럽게 반가웠다.

아이와 어른으로 다시 만났지만 아무렴 어떤가. 군대에서 괴롭히던 선임을 우연히 만나 주먹다짐을 벌였을 때보다 짜릿한 쾌감이 따랐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쉽지만, 저만 조심하면 되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지금처럼만 해. 회장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니? 세상 사람들은 그룹 회장이 놀고먹는 줄 알지. 가끔 카메라 앞에 얼굴이나 비추고, 정치인 만나 악수나 하는 줄 알아. 공장 가서 손이나 흔들고 대학에 나가 강연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처럼 생각해.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잘못된 인식이랄 것도 없지만, 기록에 남지 않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는 사람도 있지. 우리 손 회장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지금처럼만 해. 아이처럼, 어른처럼.”

홍기준은 고개를 돌려 벽걸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유치원생이던 홍수정이 하원 후 엄마에게 종알대던 모습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신이 나서 떠들어댔으니 누군가 그렇게 지적한다 해도 나무랄 마음은 없었다.

***

진혁은 수화기 너머 홍기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마 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을 쓰다듬고 있겠지. 긴장을 풀고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눌 때 홍기준 회장의 버릇이었다. 바지도 걷어 올려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으려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 안 되는 것 말고는 모두 말해 주마.

“제가 누구 아들인지 원래 아셨나요?”

알고 싶었다.

전생에 왜 그리 자신에게 잘해줬었는지.

- 몰랐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동명이인이 한둘이 아니잖니. 서류만 보고 그 사람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특정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 법 아니겠니? 추측만 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그러나 홍기준의 대답에는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저를 찾아오셨던 건가요, 아빠를 찾아오셨던 건가요.”

- 둘 다.

확실해졌다.

“우리가 죽기 전에 아셨나요?”

- 흐음······.

묵직하게 깔리는 한숨이었다.

진혁은 잠자코 홍기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 질문이 틀렸다. 그런데 정정해주면 내가 위험할 것 같구나. 아무튼 대답은 ‘아니오’야.

역시, 사고 후에 뭔가 있었구나.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진혁은 그림자인지 멍청이인지가 뜻하는 봉인된 기억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죽지 않았으니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었던 거야. 그래서 육체 나이에 맞지 않게 애늙은이가 된 거고.’

갑자기 찾아왔던 천길룡이 영혼은 하나라며 방황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던 날이 떠올랐다. 천길룡은 영혼이라는 건 한번 죽으면 끝이라는 말을 했다.

“대정에 대해서······, 아세요?”

- 너보다 먼저 알았지. 네게 양보할 수 없다. 내가 먼저 손을 대고 작업을 시작했거든. 하하하-!

진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손 씨 가족을 위해 홍기준이 먼저 나섰다는 것 아닌가.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 네가 할 일이 없을 수도 있어. 괜찮겠지?

“뭐······,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의욕만 앞세우면 탈이 나니까 구상할 시간도 필요했고요.”

그룹 경영 수업을 받지 못한 진혁으로서는 당연한 고민이었다.

진혁은 업무에 특화된 사람이었지 경영에 특화된 사람은 아니었다. 권력의 핵심에 근접한 적이 없었으니 정치적이고 전략적으로 고도화된 그룹의 생리를 이해할 만큼의 연륜 또한 쌓지 못했다.

- 복수만 꿈꾸며 사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피폐할지 생각해봤었다. 그 목표를 이루고, 더이상 할 일이 남지 않은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러네요······.”

자신을 염두에 둔 말에 진혁은 자연스레 수긍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홍기준은 저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치적 계산은 물론이고 타인의 입장까지 고려하고 있지 않은가.

- 당장 누굴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복수는 어른에게 맡겨둬. 아이는 재미나게 살아야지.

더는 버티지 못한 진혁의 고개가 아래로 스르륵 떨궈졌다.

그래서 볼 때마다 재미나게 살라는 말을 한 걸까. 복수하겠다고 날뛸까 봐 걱정돼서?

“아셨어요? 저에 대해서요.”

- 긴가민가 했지만 몰랐다. 문 팀장이 폭탄 타령을 해서 알게 됐지.

아니었구나.

그냥 덕담으로 한 말이었던가.

- 이번엔 내가 묻지.

“네.”

- 정치에 관심이 있니?

“정치인이 될 생각이 있느냐 물으시는 거라면, 전혀 없어요.”

- 그래. 그쪽은 내버려 두마.

“아버님은 잘하실 것 같은데요.”

- 소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럴듯하게 포장한 말로 다수를 선동하는 게 정치지. 형태와 무관하게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협상가지, 선동가는 못 되는 사람이야.

“그에 대항하는 집단지성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 모르는 소리. 집단지성에 숨어든 일부가 호도하는 순간 집단지성은 광기가 된다. 잊지 마라. 다수는 늘 소수에게 이용당할 뿐이야.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던 진혁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와닿지는 않는. 그렇다고 홍기준의 생각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여전한 관심이 고마웠다.

과거에도 홍기준 회장은 종종 사담을 나누며 어른 없이 자란 진혁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유명선이 손광연에게 하듯이.

- 넌 철저히 소수가 되어라. 아니,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다.

우주 공간 너머에 있는 사람과 교신을 하는 기분이 이럴까.

메시지 자체는 따뜻했으나 뇌리를 공허하게 두드리는 음성은 마치 유언처럼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