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과 구상 사이 (4) >
문석일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어렵지 않아. 구하지 못하면 만들면 그만이다.”
폭탄 만드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필요가 없으니 만들지 않을 뿐.
자존심을 건드리는 도발에 저도 모르게 확언하고 말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과 능력이 안 되어 못하는 건 상황이 달랐다.
“하지 마라, 그거.”
단호한 어투였다. 핸들을 쥔 문석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석일은 여전히 진혁이 두렵다. 그 뒤에 숨은 저승사자 같던 놈과의 계약도 걸려 있으니 진혁이 강하게 요구한다면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문석일은 내심 놀랐다.
‘별일이네. 좀 친해졌다 이건가.’
늘 진혁의 요구사항을 이행하던 입장이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어른으로서 혼내듯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은 대답없이 시트에 몸을 깊이 묻었다.
누가 뭐라하든 신경 쓰지 않던 성격이었는데, 어른이 단호하게 말한다고 움츠러드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새벽에 양쪽 차선 막고 다리만 무너뜨리면 될 텐데. 어차피 무너질 거잖아.’
하지 말란다고 그냥 두었다가는 또 그 난리가 날 것 아닌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문석일에게 부탁한 건데 까였다.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보유한 정보의 수준이 다른 사람끼리는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플랜B가 물 건너가버렸다.’
하긴, 어차피 무너질 다리라고 희생 없이 부수자고 해도 누가 믿겠나.
아! 한 명 있다.
구상 자체로 테러 모의였으며 실행에 옮긴다면 반국가적 테러로 비칠 것이 분명했으니 누구도 나서기를 꺼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홍기준은 다르다.
진혁은 드디어 홍기준과 까놓고 말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적막을 실은 차가 빠르게 내달렸다.
홍기준에게 어떻게 언질을 주어야 할지 궁리하는 진혁의 미간이 오므라들었다. 제 언행이 홍기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아저씨도 전부 알지는 못했던 거야.’
진혁이 보기에 홍기준은 재난 정보까지는 가지고 오지 않은 듯했다. 알았다면 그 역시 일부러 재난을 방치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홍기준은 사회적 영향력도 진혁에 비할 것이 아니어서 더 떳떳한 방법으로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진혁이 기억해내지 못한 참사 중 일부는 그대로 발생했고, 언론에서는 연일 인재라며 안전불감증을 질타했다. 언론이라는 이름의 감투를 쓴 자들의 행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고로 인한 희생자였다.
그때마다 진혁은 자신의 잘못인 양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기억해주지 못해서.
이 또한 감정 에너지의 소모일 뿐, 타인을 염려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진혁은 스스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막지 못한 사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돌아오는 내내 진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을 때,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렸다.
“오빠아아아-!”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촌닭 유진이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기는데도 유진이는 일부러 갯벌에서 뒹굴기라도 하는지 오후만 되면 몰골이 말이 아니다.
***
치지지직-.
장진남은 문석일이 찾아왔다며 부침개를 만들었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터질 것 같은 이두근으로 뒤집개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맛이 어때오?”
“맛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것보다 훨씬.”
밀가루 반죽에 채 썬 호박과 고추가 전부인 부침개인데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맛있었다. 진혁에게 정신적으로 시달려서 더 맛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맘에 없는 소리는 말구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는지나 말해바오.”
장진남이 주먹으로 어깨를 툭- 치자 문석일의 몸이 샌드백처럼 흔들거렸다. 덩치에 걸맞은 힘이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비운 문석일이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놓았다.
“장 선배······.”
양강욱은 의심의 여지 없는 손광연의 사람이고 민용락은 홍기준의 직원이지만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의 친분은 없다. 게다가 애송이 아니던가.
친구 정상태는 입이 가벼워서 오픈할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장진남이었다.
문석일의 고민을 들은 장진남은 뻐근한 어깨와 목을 돌렸다. 스트레칭을 위한 행동이었으나 진지한 표정이 심각한 심경을 대변했다.
“걔 요새 쫌 이상하긴 했어오.”
“어쩌는 게 좋을까요.”
“석일이는 그게 문제예오. 너무 잡혀 있어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삼촌이잖아오.”
진혁의 명대로 움직이라는 그림자와의 계약 내용을 발설할 수도 없고, 문석일은 고개만 주억였다. 잡혀 있는 건 사실이니까.
“아무리 난 놈이어도 아이 혼자서 사는 세상은 부서져오. 우리 어릴 때 장난감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봐오.”
“예, 뭐······.”
내구성 문제로 부서지는 것보다는 가지고 놀다가 질려서 부수는 경우가 더 많았지. 재미로 태워버리기도 했다.
“넘치는 힘과 똘끼를 밖으로 표출하는 애들은 차라리 다루기 쉬워오. 근데 진혁이는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에오. 그런 애들이 나중에 변태가 되는 거애오.”
“예?”
“더 들어봐오. 나도 진혁이만 할 때 강아지 똥꼬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서 나뭇가지랑 돋보기 들고 동네를 활보했어오.”
“······.”
뜨거운 부침개를 입안에서 굴리는 문석일의 눈동자가 갈곳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혼자만 알고 있다가는 속병에 걸릴 것 같아 장진남을 찾아온 건데 괜히 온 거 아닐까. 개똥꼬가 뭐 어쨌다고 이러는 거냐.
“그런데 개한테 물린 후로 그 병 고쳤어오. 그 후로 개가 무서워오.”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장진남과 어울리지 않는 얘기였다. 지금도 장진남은 개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잘만 돌아다니니까. 한데 개똥꼬 얘기는 왜······.
“애들은 무서운 어른이 있어야 삐뚤어지지 않아오. 시선을 의식하는 법도 익히고 조심하게 되는 거애오. 내 경우에는 개가 그런 일을 해준 거죠.”
“저더러 개가 되라는 말씀······.”
“석일이한테 술을 괜히 먹였나오? 물거나 짖으라는 게 아니에오. 내가 볼 때 진혁이는 무서운 사람이 없어오. 부모님이 화를 안 내시니 무서워하지도 않고, 사고를 치는 녀석도 아니어서 누구 눈치를 보지도 않아오.”
아, 그래서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문석일의 젓가락이 신경질적으로 부침개를 찢었다.
장진남이 한숨을 쉬었다.
“보고해오. 부회장님께. 현실이 망상보다 무서운 거애오.”
문석일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 그동안은 진혁의 부탁으로 쉬쉬했는데 슬쩍 보고해볼까?
저도 사람인데 돈 주는 사람 눈치는 보겠지.
***
저무는 일요일이 아쉬웠다.
진혁은 모처럼 평상에 앉아 무릎에 유진이를 앉혔다. 누가 봐도 어른과 아이로 보였다. 장군이와 홍시가 곁을 지켰고 천마와 광마는 천길룡에게 부침개를 전하러 간 장진남을 따라나섰다.
“눈은 어디 있나 요기-, 귀는 어디 있나 요기-.”
노래를 부르며 오빠의 얼굴을 더듬는 고사리손이 앙증맞다. 부드러운 아이의 손이 건네는 위안에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유치원에서도 노래를 배울 텐데, 유진이는 아기일 때 엄마가 불러주던 노래를 더 좋아했다.
“오빠, 오빠 이리와- 요것 보셔요-.”
노래 몇 곡을 더 부를 때까지 진혁은 동생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진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바보처럼 웃었다. 여전히 동생이라기보다는 딸 같은 녀석. 눈을 반짝이며 종달새처럼 부르는 노래가 어떤 음악보다 진혁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꾀꼬리 같은 음성을 듣는 게 좋아 진혁은 유진이에게 이것저것 묻는 일이 많았다.
유진이의 노래가 끝났을 때였다.
“유진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차.
진혁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며 왜 저러나 싶었는데, 그런 짓을 자기가 하고 있었으니.
“오빠가 좋다요. 제일 좋다요.”
유진이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느허허-.
논리적인 답변은 아니었으나 이 상황에 이보다 훌륭한 대답은 없으리라. 성공이 다 무슨 소용이냐, 오빠가 가장 좋다는 병아리 같은 동생이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다.
“우리 애기, 유치원에서 힘든 건 없어?”
“음······.”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혹시 괴롭히는 녀석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진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점심밥 안 준다요.”
“엥? 밥?”
그건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게다가 유치원은 오전 교육만 하기 때문에 급식이나 도시락이 필요가 없었다.
“유진이는 유치원에서 밥 먹었으면 좋겠어?”
“소풍날 때 친구들이랑 김밥 먹었다요. 재밌었다요.”
어쩌냐.
그렇다고 하원 시간을 미룰 수도 없고, 도시락을 싸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직장인들도 제법 늘었으나 지역민 대부분은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했다. 학원도 없고 방과 후 수업도 없으니 어린아이들은 하교 후 마땅한 취미나 특기 계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개발이 되지 않아 진혁이 어릴 때처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닐 수 있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방과 후 수업이라······.’
여름방학이 되면 어동초등학교에도 급식실 신축공사를 한다고 했다. 학생 수가 증가하고 주민들의 요청이 있어 폐교 논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방과 후 수업을 도입해 도시의 아이들에 비해 열악하달 수 있는 교육환경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나 때도 읍내 애들하고 격차가 컸지.’
읍내 학교로 강제 전학했던 과거, 진혁은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잼버리인지 잼민이인지.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하-, 뭐였더라?’
보이 스카우트니, 걸 스카우트니 하는 유니폼을 입고 자랑하는 녀석들을 비롯해, 태권도장이나 피아노, 컴퓨터 학원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점점 빨라지는 변화 속도로 인해 지금은 그 차이가 더 심하리라. 대도시와 군 소재지가 그럴 테고, 읍내와 시골이 그렇겠지.
구상 하나를 추가한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아. 오빠가 다음 학기부터는 유치원에서 밥 먹게 해줄게.”
“진짜지요? 약속한 거다요?”
눈이 휘둥그레진 유진이가 오빠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뭘 하며 땀을 흘렸는지 꾀죄죄하고 꼬질꼬질한 행색에, 꼬릿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지만 눈만은 별처럼 빛났다.
진혁은 동생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높이 들어올렸다.
“읏챠-. 당연하지! 언제 오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와아-! 신났다아아-!”
유진이는 비행기처럼 팔을 활짝 벌리고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그래, 이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열심히 살기로 한 거였지.
조심스레 동생을 내려 뺨에 볼을 부볐다. 거지꼴에 냄새가 좀 나는 동생이지만 뭐 어떠냐. 세상 가장 예쁜 생명인데.
“어이구구 이뻐라 내 새끼!”
내 새끼는 아니지만 진혁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와, 진짜 얘를 어떻게 시집 보내냐.
진혁은 때 아닌 고민에 빠졌다.
“유진이는 누구랑 결혼할 거야?”
“오빠랑 한다요.”
아니······, 오빠는 수정 언니랑 하기로 약속했는데.
“오빠도 나랑 할 거지요?”
“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룹 회장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의견을 제시하던 손진혁 팀장이었는데, 유치원생의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
장군이와 더 놀겠다는 유진이를 집안으로 밀어넣었다.
“유진이 냄새 나. 오늘은 그만 놀고 씻어.”
“네. 에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엄마를 찾아가는 유진이를 뒤로 하고 민용락을 찾아 나섰다.
주말은 민용락의 근무일이 아니지만 어차피 진혁도 주말에 쉬지 못한 건 마찬가지니 조금만 미안해하기로 했다.
토다닥-톡-톡.
민용락은 진혁이 말하는 것을 키보드로 입력했다. 세인컴퓨터에서 자체 개발한 문서작성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직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진혁이 보기에는 제법 짜임새를 갖춘 프로그램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래의 MS 워드와 흡사했다.
그나저나 타이핑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냥 손으로 쓰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야. 연습해야 늘지.”
“네.”
진혁은 키보드를 빼앗아 대신 타이핑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는데 협조해야지.
홍기준이 민용락을 보낸 데에는 그의 성장에 대한 안배가 있을 터였다. 아주 사소한 스킬이라도. 진혁도 그 점을 모르지 않으니 민용락 스스로 고민하고 깨우치기를 기다렸다. 민용락의 방식을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민용락은 전략적 사고에 능한 사람이었다. 과거 법무팀장으로서 소비자피해보상 소송에서 패소한 책임을 지긴 했으나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소송 진행은 법무법인이 맡았었으니 소송팀의 역량 문제였고, 과실은 기업에서 나왔으니 원인 제공은 회사에서 한 셈이었다. 민용락은 좋지 않은 때에 독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음, 그러니까······. 삭도에 단층 건물을 세 동 지어서 연구인력을 채우자는 뜻이네?”
“네. 맞아요.”
민용락은 미래를 위해 어리고 젊은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빼놓지 않고 추가 의견으로 입력했다.
“방법이 문제네? 뭐······, 부회장님께서 그 방면에 뛰어나다고는 해도 이렇게 의견만 던지는 건 좋아하지 않으셔. 너도 알지?”
알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