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과 구상 사이 (2) >
***
우우우웅- 콰콰콰-!
진혁과 문석일을 태운 콤비보트가 무서운 속도로 수면을 내달렸다. 물살을 가르는 게 아닌 물수제비 타듯 경쾌한 기동이었다. 수면과 부딪힌 보트는 철썩임이 아닌 찻찻- 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푸 솟구쳐올랐다.
‘으어어-, 무섭다.’
하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른쪽 중간에 앉은 진혁은 안쪽 넓적다리에 힘을 빡 주었다.
혼자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문석일과 삭도에서 나온 요원들은 얼굴에 물이 튀어도, 머리카락이 김은정네 아빠 김춘식 아저씨처럼 소가 핥은 헤어스타일이 되었어도 구름 위에 누운 신선처럼 태연했다.
역시 초인적인 훈련을 버티고 살아남은 요원들다웠다.
첫 번째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삭도에 방문하기로 한 이유 말이다. 홍기준으로부터 매월 달러로 월급을 받는데 관리를 문석일에게만 맡겨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물론, 삭도 내에 고정 관리인이 있다지만 진혁은 관리자 위의 관리자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로 미래 구상을 위한 안배도 있었다.
‘십 년, 이십 년은 금방이다. 준비를 해야 해.’
홍기준은 유명선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유명선 회장의 가신이랄 수 있는 세인그룹의 오랜 공로자들을 대부분 내쳤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젊은 경영인으로 채웠다.
진혁의 눈에 그 목적이 훤히 보였다.
홍기준은 미래를 앞당기려 하고 있었다.
유명선의 서재에서 보았던 보고서와,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민용락이 건네는 화두가 그 증거였다. 홍기준의 개혁 속도를 보며 진혁은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물론 혼자만의 판단이었지만.
‘아저씨라면 힌트만 줘도 알아서 움직이시겠지.’
진혁은 홍기준이 더이상 아이템을 발굴하지 못할 때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보안이 철저한 연구소가 필요하다.
콤비 보트가 날치처럼 30분가량을 날았을 때, 드디어 섬이 보였다.
삭도는 특별할 것 없는 섬이었다.
암반과 모래톱, 우거진 소나무가 천혜의 요새처럼 어우러져서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해안과 다른 점이라면 수심이 완만하지 않고 급격히 깊어지는 점이랄까.
보트 조종간을 잡은 요원이 능숙한 솜씨로 해수욕장처럼 모래밭이 펼쳐진 곳으로 접안했다.
“삭도에 온 걸 환영한다.”
날렵하게 모래밭으로 몸을 날린 문석일이 씨익 웃었다.
아마도 수많은 훈련생들은 저 미소를 보며 사악하다고 느꼈겠지.
***
‘리조트를 지어도 멋지겠다.’
삭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올라선 진혁의 감상이었다.
자연 서식한 소나무와 참나무 따위로 가려진 암반지대였는데, 맑은 날이면 멀리 해안선이 보인다고 했다. 외부는 감시가 가능하면서도 저는 가려진, 훌륭한 요새였다. 그런 곳이니 일찌감치 특수부대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거겠지.
시골 분교 같은 콘크리트 건물의 1개 동에 관리직과 교관 사무실, 훈련생 숙소가 있었다. 홍기준이 신경 써서 새 단장을 했다더니 현대식 샤워 시설과 목욕탕도 갖추고 있었다. 내부 마감도 꼼꼼히 된 덕에, 시멘트가 노출된 열악한 다른 국가시설과도 비교가 되었다.
“좋네요. 가둬 놓고 고시 공부를 시켜도 되겠어요.”
큭-.
엉뚱한 비유에 문석일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과묵한 사람답게 별도의 촌평은 없었다.
진혁은 진심이었다. 대정그룹도 우등생을 미리 장학생으로 선발해 지원하고 있는데 세인그룹이라고 못할 일인가.
다른 1개 동에는 매트가 깔린 대규모 훈련장, 식당, 체력단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합-! 쿵-!
무더워진 날씨, 습기 가득한 바다 공기로 폐를 채우며 요원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진혁의 눈에도 하나같이 호랑이 같은 사내들이었다.
‘역시 여자는 안 보이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받을 수 없는 보수와 대우에 지원자가 넘쳐났다고 했다. 초청 형식으로 극히 일부에게만 공개된 선발이었는데도 말이다. 시험에 시험을 거쳐 문무를 두루 갖춘 요원들만 선발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여성 요원은 무력 측정에서 밀렸으리라.
“사고 위험도 있어서 여자는 배제했다. 부회장님 지시도 있었고.”
미세하게 올라간 진혁의 눈꼬리를 살핀 문석일의 설명이었다. 함께 한 기간이 길지도 않은데, 문석일은 진혁의 심기를 정확히 짐작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물론, 성별 불문 채용하자는 진혁의 기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고에도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실력자겠죠.”
별다른 뜻 없이 뱉은 대꾸였다.
홍기준이나 문석일의 결정에 토를 달 마음은 없었다. 알아서 잘들 하겠지.
의아한 얼굴로 진혁이 물었다.
“그런데 인원이 많이 없네요?”
야외 훈련장에 스무 명 남짓, 실내에 또 스무 명 정도.
전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백 명이 넘는 인원이라고 했는데 절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문석일이 곁에 대기하던 교관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개 조는 바다 수영을 나갔고, 다른 한 조는 휴가 중입니다.”
나긋하나 절제된 음성의 교관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해산물 불법 채취 같은 건 하지 않겠죠?”
“네.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련 중인 요원들을 시큰둥한 얼굴로 보며 진혁이 턱짓을 했다.
“그런데, 실력이 많이 모자라네요.”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문석일은 변화 없는 표정으로 이마를 쓸었다.
양강욱을 메치는 녀석에게 누군들 성에 찰까.
한데 진혁은 요원들의 수준을 뜻한 게 아니었다.
“아뇨. 교관들요. 말로만 설명하잖아요.”
전학온 친구 박상기가 그러는데 말로만 설명하는 건 좋은 코치가 아니랬어.
*
꾸웅-. 쿵-.
다섯 명의 교관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모두 매트에 꽂혔다.
좌정한 훈련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시범 대련이었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진혁은 입을 쉬지 않았다.
“다음 동작을 준비해 둬야죠.”
“결과를 예측하지 마요. 이번 공격이 실패할 때를 가정해두세요.”
“힘보다 중요한 게 스피드예요.”
“스피드가 아무리 뛰어나도 힘이 없으면 파리 날갯짓이에요.”
모순된 교수였다.
속도를 강조할 때는 언제고 말을 바꿔 힘을 더 중시한단 말인가.
‘아휴-, 시발 것 말은 쉽지.’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금세 땀에 전 교관들이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어려도 너무 어려 보였다.
이 젊은 남자는 도대체 누구기에 우리를 물풍선처럼 가지고 논단 말인가. 대동한 훈련대장 문석일이 절제된 몸짓으로 수행하는 걸 보고 그저 고위 관리직이나 오너 일가 사람이 아닌가 추측했었다. 한데 무술 실력을 보니 외부에서 초빙한 무도 강사일지도 모르겠다.
청바지 차림으로 홀로 무쌍을 찍는 진혁을 보며 문석일이 힘없이 웃었다.
실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저거 순 엉터리네.’
그게 말처럼 쉽게 된다더냐.
차범근이 초등학생에게 드리블 쉽다고 시범 보이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초등학생은 죽을 맛일 텐데.
양강욱보다 더한 녀석이었다.
적어도 양강욱은 상대가 곰이 아님을 인정한 상태에서 적당히 응하는데, 진혁은 상대도 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이기적인 시키.’
그래도 문석일은 저 안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홍기준은 홍수혁을 안고 응접실을 서성였다.
다른 손으로는 보안 전화기를 들고 통화 중이었다.
“그래? 진혁이가?”
손진혁이 SSS 양성소를 방문한다고 했을 때는 그저 혈기왕성한 청소년의 호기심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 문석일의 한숨 섞인 보고를 들으면서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역시, 그림자 이 새끼······. 나한테 구라를 치신 건가?’
아이답지 않은 행보를 보였을 때는 그저 비범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 전생에 지켜본 바, 냉철하고 영민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한데 최근 들어서는 존재 자체에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홍기준이 먼저 기대하고 수작을 부리기는 했으나, 민용락을 통해 올라오는 보고는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 한들 단언하듯 의견을 개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도박사들조차 월드컵 우승국을 확률로 점치는데, 이놈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기업의 생리를 객관식 답안지처럼 내놓지 않던가.
삭도를 방문한 일도 그렇다.
방문객이 아닌 지배자처럼 순시를 하고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고 한다. 연습 대련을 하던 교관 두 명은 탈진해서 수액을 맞혔다고.
물론, 관리의 일부분을 맡기기는 했다. 하나 그처럼 직접 개입해서 활동할 거란 예상은 홍기준도 하지 못했다.
뭐,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네가 요청한 건 아니란 말이지?”
- 예. 진혁이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앞으로는 출입을 못하도록······.
“아니야.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둬.”
어차피 그놈 거니까.
진혁이 아니었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미래 정보를 이용해 그룹을 빠른 시간 안에 장악하고 큰돈을 물쓰듯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신의 회귀는 오로지 진혁의 공이었다.
“다른 건?”
- 남는 부지가 많은데 건물을 더 지으면 안 되냐고 하는데요.
“건물? 용도는?”
- 좀 더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건물이야 몇 개든 못 지을까.
굴삭기로 돈을 퍼 바다에 부어도 버려지는 속도보다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빠르다. 홍기준이 장악하고 재설계한 세인그룹은 그런 재벌이었다.
홍기준은 문석일의 전화를 기다리며 TV를 켰다. 일요일인데 뭐 재미난 거 안 하려나······.
사장직을 모두 내놓고 부회장으로서 중요한 결제만 처리하니 주말에 쉴 수 있어 좋았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 왱알앵알······.
허어-.
문석일의 대답을 들은 홍기준은 뺨이 저릿하고 머리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 어쩌면이 아닌가 본데······?’
홍기준은 암흑 속의 2인 3각을 떠올렸다.
마땅히 떠오르는 그림은 그것뿐이었다.
서로 보이지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나 함께 보조를 맞춰 멀리 보이는 북극성을 향해 달리는.
‘알고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나한테 숙제를 주는 느낌이구먼.’
홍기준이 어렴풋이 파악한 진혁의 메시지는 한가지였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진혁이 존재를 드러내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홍기준의 머릿속에는 더이상 아들 친구도, 똑똑한 중학생도 아니었으므로. 진혁은 뜻하지 않게 홍기준에게 존재의 힌트를 던졌다.
‘멍청한 그림자! 영혼의 무게 어쩌구 하더니 제놈도 몰랐던 모양이구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하하-!”
홍수혁이 놀라 눈을 크게 떴어도 홍기준의 호탕한 웃음은 계속되었다.
그간 말 못 하며 느꼈던 외로움이 일시에 소거되는 느낌이었다.
응접실 TV에 뉴스 속보가 떴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김일성 사망」
하하하하하!
이전의 세상보다 사망일이 빠르다. 하지만 알게 뭐냐.
전군에 비상이 걸리겠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걸 아는 홍기준에게는 또 다른 투자의 기회일 뿐이었다.
두 손에 복싱 글러브를 끼고 지나가던 홍수정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아빠, 김일성 죽은 게 그렇게 좋아?”
좋아할 수는 있지만 너무 대놓고 웃는 거 아닌가?
사람은 괜찮았던 아빠였는데 부회장 되더니 너무 이상하게 변했어.
인성에 문제 생겼나?
***
방문 일정을 마치고 다시 삭도 암벽에 올랐다.
다소 습했으나 여름 해무가 끼어 시원했다.
삭도의 SSS 요원들은 전생에 목격했던 경호원들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만족스러운 방문이었다.
교관들과 대화를 마친 문석일이 다가왔다. 교관들 핑계를 대기는 했으나 진혁의 행보를 홍기준에게 보고하기 위한 시간도 필요했다.
“오다가 들었는데 김일성이 죽었다는구나.”
“우리 쪽에서 누군가 움직인 건 아니죠?”
정확하지는 않아도 6월 사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진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홍기준이 암살 지시를 내릴 이유는 없겠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었다. 뭔가 비밀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진혁은 무표정과 선글라스 뒤에 숨은 문석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나 진혁의 긴장감은 한 호흡도 지나지 않아 풀려버렸다.
‘역시 아닌가 보네.’
문석일의 입꼬리가 메기 수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뭔데 이 아저씨야-.
어울리지 않게 실실 쪼개는 문석일이 마뜩잖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