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과 구상 사이 >
***
6월 말이 되어 참가선수 선발을 위한 도 예선에 앞서 이병세가 선수들 프로필을 살폈다.
“조슬찬이가 평균 키 정도 될라나?”
이병세는 한동안 육상대회에 갈 일이 없었다. 선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초등부에서 꼬박꼬박 육상대회에 출전하던 녀석들이 중학교에 진학했다. 덕분에 시합 때마다 공식적으로 땡땡이를 칠 수 있었다. 연령도 낮고 실력도 빼어나지 못해 성적은 늘 도 대회 본선 탈락이었지만.
승합차 운전하고, 선수들 여관 잡아주고, 자신은 멀찍이 떨어진 방을 잡아 다방 커피나 마시고. 다음날 예선 탈락한 녀석들을 데리고 복귀하면 끝이다. 그렇게 3년째 무늬만 육상부를 맡아 후원금과 예산을 쓰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병세가 하는 일이라고는 간식 사다주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100m 기록을 측정하는 것이 전부였다. 육상 훈련에 대한 건 염병택과 조슬찬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사고 없이 대회만 치르면 되는 일이었다.
손진혁과 약속한 대로 3학년이 되어 전국대회가 잡혔다고 알려준 며칠 후. 빈둥빈둥 출근해 보니 처음 보는 녀석이 함께 있었다.
“너는 누구여?”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충분히 껄렁한 목소리와 불량스러운 인상으로 이병세가 물었다.
햇빛에 번쩍이는 이병세의 금이빨에 박상기가 움찔하며 허리를 숙였다.
“전학생······인데요.”
“전학생?”
한눈에 봐도 제법 운동을 한 몸이다. 키도 크고.
옆에 있던 진혁이 또렷이 말했다.
“선생님, 상기도 우리 학교 학생이니까 도 예선 출전할 수 있죠? 대회 같이 가면 좋겠는데요. 계주도 있잖아요.”
“흐음-.”
이병세가 턱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종목 늘어난다고 땡땡이를 못 치는 건 아니니까.
“그려, 해보자.”
이병세는 100m 기록부터 측정했다.
「100m 기록」
손진혁 11초 5.
염병택 12초 7.
조슬찬 12초 6.
박상기 12초 9.
염병택은 트랙에서 달리면 0.5초 가량 단축이 된다. 조슬찬의 발바리 주법으로는 트랙마다 큰 차이가 없고. 박상기는 축구하던 놈이라더니 운동화 신고도 모래땅에서 제법 기록이 나왔다. 염병택이나 조슬찬은 몇 번 숨 고르면 회복되는 것에 반해 힘들어하는 걸 보니 육상이 몸에 밴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폭발적인 스프린트만큼은 봐줄 만했다.
‘그런데 손진혁 이놈은 정말······.’
기록도 기록이지만 후우우-, 한 번 숨을 내쉬더니 바로 호흡을 안정시키는 게 아닌가?
태양초등학교 김영태와 엊그제 통화한 내용이 생각난다.
- 진혁이는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전국구가 되어 있던 놈이에요. 그런 놈이 꿈이 농부래요. 너무 아까워요.
육상하다가 은퇴하고 농사지으면 꿈 이루는 거 아닌감?
김영태의 말을 떠올리는 이병세의 눈이 웃고 있었다.
- 아휴, 늘 하던 대로 하루 만에 올 줄 알았는데, 진혁이 이 녀석이 결승에 오르는 바람에 그때 여관 하루 더 잡았어요. 하하하!
이번 땡땡이는 잘하면 4일 이상짜리다!
이병세의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선생님,”
“어? 어어? 왜?”
도시의 다방 커피를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구상할 때였다. 들떠있던 이병세가 진혁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여름방학 때 합숙 훈련하나요?”
얜 왜 갑자기 타오르냐.
너도 다방 커피 좋아하니?
***
의외였다.
홍기준은 딸이 잠든 사이에 진혁의 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서운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징역 오빠에게 해바라기 같은 홍수정이었으니 마땅히 품을만한 우려였다.
이번 생은 가족에게도 충실하겠다 다짐한 홍기준으로서는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당연한 일. 한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쿠쿠-, 우리 수혁이 맘마 잘 먹네?”
홍수정은 동생 홍수혁의 빠끔거리는 입에 이유식을 밀어 넣기 바빴다. 외할아버지를 좋아하더니 감탄사마저 늙은이처럼 구성지다. 홍수정은 엄마 유세라보다 아기를 끔찍이 돌보는 누나가 되었다.
사흘간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나절이면 걸려오던 진혁의 전화는 뚝 끊겼다. 기말고사와 합숙훈련이었던가? 아무튼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 바쁘다는 소식이었다.
딸 홍수정은 아무래도 좋은 눈치였다.
곧 돌을 맞는 동생과 노는 일이 지상과제인 아이처럼 굴지 않나.
“딸.”
“응? 왜?”
홍수정은 아빠를 돌아보지도 않고 홍수혁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일에 집중했다. 누가 유세라 딸 아니랄까 봐 건방진 말투마저 복제한 모양새였다.
“징역 오빠한테 전화 안 해도 돼?”
“내가 왜?”
그제야 홍수정이 돌아보며 갸웃거렸다. 엄마를 쏙 빼닮은 고양이눈을 깜빡이며. 그 눈동자에는 ‘무관심’ 세 글자가 짙게 새겨져 있었다.
홍기준은 볼을 부풀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벌써 징역 오빠에게 흥미를 잃은 건가.
이래서야 필사적으로 그룹을 키우는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가. 어떻게든 홍수정에게 그 수혜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말이다.
아들도 있으니 괜찮지 않으냐 따질 수도 있겠으나 홍기준에게는 말 못 할 사정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은 회귀의 조건이었다.
‘내가 괜한 호언장담을 한 건가.’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그림자에게 계약으로 걸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데 홍수정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사람 일 모르는 거라고 아빠가 매사에 신중하게 결정하랬잖아.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이것저것 잘 따져서 경영하라며.”
홍수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표정에 가까운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홍기준은 딸의 입꼬리가 새침하게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딸이 한 말의 옳고 그름을 저저이 따지기 전에, 목젖을 때리는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내 딸이 언제 이렇게 컸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의젓해진 건가?
제 엄마와 성격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아니, 유세라도 어릴 때는 의젓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사춘기 때는 의젓했는데 철들면서 맛탱이가 갔다고. 그렇다면 벌써 사춘기가 온 건가. 요즘 아이들은 빠르다더니 정말이었구나.
과거에는 가족에 소홀한 나머지 딸이 어떻게 자랐는지도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홍기준의 가슴에 감동이 차올랐다. 놓쳤던 시간을 다시 잡은 자의 새삼스러운 기쁨이었다. 출발 시간이 경과되어 떠나버린 줄 알았던 버스가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의 희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지난 삶의 후회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홍기준은 딸을 덥석 끌어안았다.
“어어어-? 이 아빠가 징그럽게 왜 이래?”
기겁했으나 홍수정은 이유식을 흘리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줄 뿐, 어깨를 털거나 뿌리치지 않고 아빠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어우우부-.”
아무것도 모르는 홍수혁이 벌린 입으로 숟가락을 추적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달칵-.
그때 쟁반에 야채주스를 올린 유세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 허그 상태의 부녀를 본 유세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딸 같은 애 데리고 뭐하는 거야, 인마!”
딸 같은 게 아니고 내 딸 맞는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이쪽저쪽 합치면 함께 산 시간이 50년이 넘는데, 저 여자는 언제 봐도 이상하다.
하찮은 구석이 많아.
***
태양군은 땅덩이도 그렇지만 도로도 구불구불하다.
“아! 상쾌하다!”
시속 80km/h.
조수석 창밖으로 팔을 뻗은 진혁이 탄성을 질렀다.
본격적으로 더워지려는 계절, 손에 잡히는 바람이 시원한 듯 따스했다.
‘음. 계속하다 보니 이 느낌을 실제처럼 생각하게 되네. 이게 바로 가상 현실인가.’
실제 므야므야의 감촉이 어떤지는 몰라도, 진혁은 반복적인 망상을 어느덧 현실로 인지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꾸불거리는 길을 내리 지나며 진혁은 인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과거 진혁의 삶을 누군가 멀리서 지켜보았다면 횡스크롤 게임처럼 여겼을 것이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등장하는 장애물을 파괴하고 시스템이 유도하는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게임.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 다음 에피소드를 열거나, 그 자리에 머물고 싶으면 방향키를 조작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진짜 재미없게 살았어.’
한데 다시 태어난 삶은 복잡했고 아케이드처럼 구간이 나뉜 것도 아니었다.
집이 있고, 학교에 가야 하고, 비공식으로 소속된 회사도 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운동을 하고, 회사 일도 챙겨야 했다. 김응녀 가족과 박대순, 대정그룹도 염두에 두고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마치 꼬부랑 길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는 것처럼, 신호등 없는 교차로를 건너는 것처럼 둘러보며 살필 일이 많았다.
하나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다면 집중이 용이하겠으나, 어디 인생이 그렇게 2차원적으로 흘러가던가. 다시 태어나보니 그런 삶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단순하게 살았던 거야.’
운전석의 문석일을 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날렸다.
“다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거겠죠?”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혁은 아직도 끈 떨어진 부표처럼 표류하는 인간 세상의 부적응자였다. 그래서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잘살고 있는 거라고.
“글쎄다.”
문석일은 최선을 다해 성의껏 대답했다.
‘짜식, 지가 벌인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생각은 못하나 보네.’
방학 때 합숙을 한다고 들었다. 친구들 기록 단축을 꾀하고 팀워크를 위해서라는데, 코치도 나서지 않는 합숙을 추진하는 선수라니.
아무튼 재밌는 놈이다. 빈둥거린대도 뭐라 할 사람 없을 나이인데, 세상의 끝을 아는 놈처럼 너무 열심히 살잖아.
진혁을 태운 차가 읍내를 관통해 다른 지역의 바닷가를 향해 2차선 도로를 50분 가까이 달려 해안의 작은 포구에 닿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문석일에게 해경이 다가왔다.
“오늘은 동행이 계십니다?”
“아, 그래 수고가 많다. 조카다.”
자주 보며 안면이 익은 덕분에 해경의 몸가짐에는 여유가 흘렀다.
문석일도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업무상 승선을 위해 자주 들락거린 포구였으니.
“이거 작성해주세요.”
진혁은 해경이 내민 서류 파일을 펼쳤다.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연락처, 보호자 등을 기재하는 양식이었다.
‘내 보호자.’
엄마 이름을 쓸까, 아빠 이름을 쓸까.
진혁은 잠시 행복감에 젖었다. 학교에서도 가족관계 작성할 때마다 여전히 설레는 진혁이다. 이름 쓰는 게 뭐라고 이리도 행복하단 말인가.
슥슥 작성하는데 해경의 추가 요구가 들려왔다.
“신분증도 보여주시구요.”
엇?
주민등록증 만들려면 아직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일요일에 학생증을 들고 왔을 리도 없다.
눈만 껌뻑거리는데 문석일이 품에서 꺼낸 서류를 들이밀었다.
“조카 신분확인증명서다. 이거 확인해.”
“민증 없습니까?”
“주민번호 보면 모르냐? 민증 아직 안 나왔어.”
문석일의 핀잔에 해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봐도 삼촌보다 큰데 아직 미성년자인 것도 모자라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았다니 놀랄 수밖에.
다행히 노안이니, 군인이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삭도.
SSS 훈련장이 위치한 섬의 이름이라고 했다.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서해안의 무인도 중 하나라고.
삭도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진혁은 방파제를 거닐었다.
본격적인 여름을 앞두고 볕도, 바람도 뜨거웠으나 바닷바람에 가슴은 상쾌했다. 테트라포드를 때리는 파도 소리도 고막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여기는 무슨 고기가 잡히려나?’
꿀렁거리는 파도를 받아낸 다음 바닷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는 테트라포드의 구멍이 신기했다.
회사 워크숍 때 가끔 배낚시를 한 적은 있어도 고향이 아닌 곳에서 도보 낚시를 해본 일은 없었다. 홈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신출내기와 다를 바 없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 사회에 나가봐도 교수든 박사든 제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는 그냥 바보 아저씨 아니던가.
진혁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본 문석일이 웃었다. 저 녀석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신기했다.
“왜, 낚시하고 싶니? 우럭 새끼랑 놀래미 나온다더라.”
아, 별거 없구나. 팔짱을 낀 채 테트라포드 구멍을 들여다보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럭이나 노래미라면 진혁의 동네에서도 종종 구경할 수 있는 고기였다. 바위 지형이 많지 않아 망둥어와 숭어, 농어, 감성돔 등이 대부분이었지만.
“배는 언제 와요?”
“연락해뒀으니 시간 맞춰 올 거야.”
문석일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볼 때였다.
진혁의 예리한 시력에 수상한 물체가 잡혔다.
‘저 배구나.’
흔한 어선이나 레저용 보트가 아니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옅게 낀 해무를 해치며 빠르게 등장한 배는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SSS’라는 글자를 입힌 8인승 콤비 보트였다.
진혁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구름다리이며, 구상의 출발선에 서게 해줄 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