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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39화 (139/338)

< 엉터리 손 코치 (4) >

***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홍기준이 욕실에서 나왔다.

수화기를 들고 고양이 눈을 껌뻑이는 아내가 시야에 들어온 탓에 그의 발이 멈칫했다.

“왜 그래? 이상한 전화라도 걸려왔어?”

“아니······.”

유세라는 나라 잃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진혁이가 전화를 먼저 끊었어······.”

“유세라야. 자다가 깬 거 아냐? 진혁이가 전화를 해? 광연이나 진혁 엄마가 아니고?”

게다가 먼저 끊었다고? 어이없는 아내의 말에 소리 없이 웃느라 홍기준의 가슴이 들썩였다.

“진짠데······.”

여전히 초점 없는 아내의 눈을 살핀 홍기준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유세라는 허언증은 없는데 가끔 자다 깨서 저렇게 헛소리를 한다. 그나마 지금처럼 한국말로 할 때는 알아들을 수나 있지, 독일어로 하는 날이 더 많아 홍기준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읏챠-.

아기의 요람을 흔들다 잠들어버린 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홍기준은 건강을 위해 틈틈이 운동을 한 보람을 느꼈다. 요즘 부쩍 큰 딸인데도 가뿐하게 들 수 있었으니까.

“당신 먼저 자. 나는 응접실에서 일 좀 볼게.”

“츄릅-. 어? 어. 또 미국 투자사 통화해야 해?”

저도 모르게 흐른 침을 닦은 유세라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곧 로켓 시험 발사잖아.”

“아, 그렇지. 당신도 정말 대단해. 정부를 어떻게 구워삶았대?”

“그러게 말이다.”

진작 손 좀 쓰고 돈도 풀걸 그랬다. 그랬다면 초고속 인터넷 사업도 앞당길 수 있었을 텐데. 내심 그리 생각하며 홍기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유명선이 그룹을 휘어잡았던 때였으니 그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딸을 안고 나가는 남편의 등에 대고 유세라가 나무라듯 말했다.

“어렵다, 머리 아프다 하면서 당신 혼자 사업 다 하는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홍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은 구하되, 실행은 혼자 다 할 생각이었으니까.

손진혁이 복수니 뭐니 설칠 시간을 줄 마음도 없었다.

‘그게 내가 돌아온 조건이다. 유세라야.’

뭐, 그놈이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는 건 별개고.

문석일에게 듣기로 대정을 향해 칼을 가는 것 같다던데, 칼을 가는 건 자유다.

그러나 웬만하면 칼을 쓸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쯧.

‘즐기면서 살라고 했는데도 그러는 거 보면 그놈도 수상해.’

여느 아이들이 품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장 내일 숙제를 걱정하면서 도색잡지를 뒤적이는 게 정상 아니던가.

친구 손광연이 미끼처럼 슬쩍 빼둔 에로 비디오테이프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제목이 베니스의 정사랬나?’

그거 재밌는데.

아무튼 수상쩍다.

마침내 홍기준의 머리가 손진혁과 보낸 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상영하며 복기하기 시작했다.

사고의 흐름 속에서 혓바늘 같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 처음 만났을 때 날 이상하게 본 이유가 혹시?’

쿵-.

딸의 머리통이 계단 난간에 부딪히는 것도 모른 채 홍기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지나치게 바쁘게 살았고, 다시 얻은 생이 행복해 다른 이를 의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수정이를 끔찍하게 챙기는 것도 그저 동생 같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쿵-.

사실이라면, 시골 아이의 수줍음이 아닌 차가움을 탑재한 소년 손진혁이 왜 홍수정에게 유독 다정하게 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는데.’

홍기준으로서는 애매한 상황이 많았다.

기껏 친구의 소재를 파악해 찾아갔는데 친구 아들과만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가설일 뿐이니까.’

쿵-.

재밌네. 재미있어. 홍기준은 가슴팍에서 흉통처럼 올라오는 간질거림을 즐기며 중얼거렸다.

“아빠, 재밌냐?”

“응?”

“내 머리가 박이냐? 잠 다 깼네!”

***

장점을 극대화할 것인가, 단점을 최소화할 것인가.

스포츠 선수뿐 아니라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진혁은 전날 유세라의 조언을 떠올렸다.

사실, 이 친구들은 장점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굳이 찾자면 또래 중 달리기를 잘하고 즐긴다는 점이랄까. 전문 선수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능력치였다.

단점 보완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근거였다.

조슬찬의 장점은 준족.

짧은 다리, 짧은 보폭으로 발발거리며 달리는데 100 미터를 12초 50에 주파한다. 그것도 모래땅에서 말이다. 발발이 주법이다 보니 힘의 손실이 없다. 모래땅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아 가능했다.

그런데 그뿐이다. 단순히 빠르다는 점 외의 장점이 없었다. 키가 크지도 않고, 다리가 길지도 않다. 그렇다고 지구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물론, 운동을 하지 않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뛰어나지만 다른 육상선수들에 비하면 1회용 선수였다. 거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영양공급도 원인이 되었으리라.

오다리가 먼저냐, 발발이 주법이 먼저냐 묻는다면 당연히 오다리가 먼저라고 하겠지만, 다리 때문에 그렇게 뛰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리를 더 길쭉하게 뻗을 수 있음에도 보폭을 짧게 잡기 때문이다.

초등 육상부 시절 김영태 선생이 손을 안 댄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육상선수의 주법이 아니었기에, 김영태는 때론 혼내기도 하고, 때론 타이르며 조슬찬의 주법을 고치려 애썼다. 그러나 조슬찬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조슬찬은 어른을 어려워했고, 삼촌처럼 잘 대해주는 김영태 선생님조차 어른이라는 이유로 어려워했으니까. 아니, 그것은 어려워하는 마음이라기보다 반항심으로 보는 게 맞을 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 후 조슬찬은 부모 또래의 어른이 하는 말은 듣지 않게 되었다.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것도, 성장이 더딘 것도. 어찌 보면 할머니의 말투와, 영양을 고려하지 않은 옛날 사람의 식습관에 의한 것일지 모른다.

아무튼, 그랬던 조슬찬이 손진혁 코치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50미터를 달리고 숨을 고르는 조슬찬의 곁으로 다가온 염병택이 호들갑을 떨었다.

“조슬이 달릴 때 보면 무릎이 완전히 붙어! 진혁이 자세 같어!”

“진짜여?”

“무릎 붙는 거만······.”

다리가 많이 벌어지지는 않는데 여전히 발발이 주법이다. 보폭을 더 벌려도 될 것 같은데 몸에 밴 습관이, 그것도 한 번에 여러 가지가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염병택은 거기서 조금만 고치면 조슬찬도 뛰어난 육상선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폭을 늘리고, 무릎을 두 뼘 정도 더 차올리고, 어깨도 더 강하게······. 아, 조금이 아니구나. 손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그래도 자세는 진짜 이뻐.”

“그려? 옛날보다 이쁜 겨? 내가 옛날이는 어땧깐?”

“옛날엔 그냥 개 같았지. 지금은 사람처럼 달리고.”

염병택이 코를 후비며 대단치 않다는 듯 말했다.

“암만 그래두 그렇지. 개 같다니, 이새꺄. 염병아 너는 친구도 아녀 개새꺄-.”

“허이구, 칭찬해줘도 지랄은-? 그리고 개새끼라니? 울옴마가 개냐 십새꺄?”

키키키키킥-.

오랫동안 함께 육상을 한 염병택과 조슬찬이 노을 지는 운동장에서 시시덕거렸다.

누군가 콘크리트 스탠드에 앉아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지만 두 친구는 신경 쓰지 않았다.

***

사람의 발 모양은 제각각이다.

육상선수도 마찬가지다. 염병택은 평발에 가깝고 발이 크며, 발바닥 중간 부분의 면적이 넓다. 그것 때문에 팔자걸음으로 뛰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염병택의 걸음이나 주법은 유전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팔자걸음이다.

“병택아 이렇게 해봐.”

아침 운동 시간에 진혁이 시범을 보였다.

까치발로 걷는 거다. 뒤뚱거려서도 안 되고, 새끼발가락에 힘이 실려서도 안 된다.

“엄지로 걷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실제로는 앞발로 걷는 거지만. 천천히, 꾹꾹 누르면서 걸어봐. 종아리하고 발목에 힘줘야 해.”

염병택은 뒤뚱거리면서도 진혁을 곧잘 따라 했다.

“어어-, 이렇게 걸으니까 발목이 아프다.”

아무리 달려도 발목이 아픈 적은 없었는데.

“발목 바깥쪽하고 앞쪽이 아프지?”

“으응. 어떻게 알았어?”

“아마 휘어졌던 발목 인대가 제자리를 잡느라 그런 걸 거야.”

김영태 선생의 지도를 받을 때도 염병택은 일시적으로 교정이 됐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정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친 자세를 유지하려면 선수가 그 자세를 계속 의식하고 달려야 하는데. 매일 하는 훈련도 아니었고, 대회가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염병택은 다리의 힘은 좋았지만 머리의 힘이 좋지 못했다. 결국 김영태 선생도 아이들이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자세 교정은 손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그도 결국은 한 명의 체육 교사였을 뿐, 육상 코치는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하면 기록이 좋아질까?”

“당연히 좋아질 거라고 봐. 손실 없이 힘을 직선 방향에 집중할 수 있을 거야.”

염병택은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속으로는 갸웃거렸다.

‘공부 잘하는 애라 그런가 말이 너무 어려워.’

그래도 시도해 보자.

시방새의 호통보다 진혁의 자상한 설명이 훨씬 듣기 좋으니까.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면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하면 된다. 초등부에서는 꾸준한 운동이 어려웠는데 중등부 되니 뭔가 다르긴 하다. 힘이 넘쳐서 덜 지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시합. 매일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 같다.

“병택아, 근데 저 친구는 누구니?”

“누구? 어? 어제 걔네?”

“어제?”

“응. 슬찬이랑 둘이 훈련하는데 구경하더라고. 청주에서 전학 온 애야.”

진혁이 흥미롭게 바라보는 곳에는 전학생과 조슬찬이 함께 있었는데, 전학생은 바닥에 선을 긋고 그 위에서 조슬찬이 스트레칭 하도록 돕고 있었다. 앞으로 뻗은 다리는 무릎을 구부리고 뒤로 뻗은 다리는 무릎이 땅에 닿도록 하는 자세였는데, 두 발과 몸의 중심, 그리고 뒷무릎이 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중이었다.

비록 땅바닥에서 취하는 볼품없는 동작이지만 오다리인 조슬찬의 자세 교정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 같았다. 조슬찬은 균형을 잡기 위해 비틀거리며 애쓰고 있었다.

진혁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운동 좀 해본 녀석이구나.’

체격이 예사롭지 않았다.

***

박상기는 일주일 전 청주에서 태양중학교로 전학을 왔다.

일주일간 친해진 친구도 없지만 딱히 친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아주 잠시 전학을 온 것이어서 11월에 다시 청주로 돌아갈 계획이다. 그리고 청주에 비하면 아주 작은 학교인 이곳 아이들과 수준도 맞지 않았다. 이 촌놈들은 박상기에게 청주에 두고 온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신기해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무리 남자중학교라지만 여자친구 있는 녀석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 근처에 임시로 입주한 집의 옆집에 사는 이준희라는 여자애는 남자친구가 있다던데. 아, 남자친구가 고등학생이랬나. 역시 어딜 가나 여자가 빠르다.

이틀, 사흘까지는 참을만했다.

청주에서 축구부 활동을 했던 박상기는 좀이 쑤시는 걸 느꼈다. 청주로 다시 돌아가면 축구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니 틈틈이 체력훈련이나 하려고 방과 후 운동장에 나섰다가 육상부원들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즐거워 보인다.’

육상부원이라고 해봐야 두 명뿐이었지만 두 녀석은 장난도 치고 서로 마사지를 하기도 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날, 녀석들이 이른 아침에도 훈련을 할까 싶은 마음에 구경이나 하려고 일찌감치 학교에 나왔다. 운동을 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동하는 모습만 봐도 배울 게 있고 재미를 느끼니까.

그런데 어제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있다.

‘코치 선생님이신가······.’

어려 보이는데 몸이 되게 좋네.

육상부원 두 명의 자세를 잡아주는 걸 보니 코치나 선배 같은데 대화를 들어보니 친구인 모양이다. 180이 넘어 보이는데 등빨이 대학교 럭비선수보다 좋아 보였다.

‘설명으로만 자세를 교정하려고 하다니. 순 엉터리네.’

등빨 좋은 녀석이 오다리를 만져주더니 팔자걸음에게 갔다. 그런데 오다리 이 녀석이 요령을 피우네?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 갈 촉망받는 윙 포워드로서 설렁설렁 운동하는 꼴은 절대 용납할 수 없지. 박상기는 저도 모르게 오다리에게 다가갔다.

지익-지이익-.

운동장에 선을 하나 그었다. 전학 오면서 새로 산 운동화인데 좀 닳겠군.

“이 금 위에서 다리 최대한 벌리고 균형 잡아 봐.”

“어? 어, 그려-. 그러까? 그러지 뭐.”

다리 짧은 오다리 녀석이 한 번 힐끗 보더니 순순히 말을 들었다.

역시 촌놈들은 착한 건가.

그때 뒤에서 들려온 엉터리 코치의 음성이 박상기의 몸을 돌려세웠다.

“친구는 백 미터 몇 초에 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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