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터리 손 코치 (2) >
***
이병세 선생이 진혁을 찾아왔다.
보통은 교사가 학생을 호출하기 마련이지만, 찾아오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학교의 최대 후원자를 아버지로 둔 이 모범생을 껄렁한 체육 교사가 호출했다가는 다른 교사들은 물론 교장과 교감으로부터 어떤 지청구를 들을지 모르는 일이니.
“9월에 육상대회가 잡혔다.”
“정말요?”
어쩐 일로 반가운 기색을 띠며 또래 아이들처럼 웃는 진혁이었다. 유세라가 전해준 일정표로 이미 확인했으나 저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낯선 모습에 이병세가 움찔 물러섰다.
“7월부터 준비하면 될까요? 계주도 있나요?”
“계주는 선수가 될라나 몰르겄다.”
“그럼 100미터, 200미터 나가면 되는 거죠?”
“그려. 선수 등록헌다잉?”
“참! 선생님.”
다소 띠꺼운 표정으로 돌아섰던 이병세가 진혁을 돌아봤다.
“중등부는 400미터도 있죠?”
“있는디 해볼쳐? 선생님은 말리구 싶다.”
“네, 그럼 두 종목만 나갈게요.”
이병세의 눈이 커졌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나. 뚱한 얼굴이 고집불통으로 비치는데 막상 대화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또래와 비슷해지고 친근하게 구는 것이, 그저 낯을 가리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놈이다.
“알었다.”
코치가 선수에게 보고를 하는듯한 모양새였지만 이병세와 진혁은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교실을 나서는 이병세 선생을 보며 몇몇 친구들이 킥킥거릴 뿐.
운동복 바지춤에 손을 넣어 북북 긁으며 걷던 이병세는 ‘뭔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3학년 때는 나간다고 했으니께.’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꾸준히 육상을 하지는 않았다지만 체육 시간과 체력장 때 지켜본 진혁의 주력이라면 염병택보다는 잘 뛰겠지. 태양중학교가 언제인들 대회 성적이 좋은 적이 있던가. 이병세에게는 콧바람이나 쐬고 오는 행사다.
***
이전 생에서도 중학교 3학년이 바빴던가? 진혁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책이 너덜거리다 못해 찢어질 때까지 공부한 기억밖에 없었다. 교과서로는 부족해서 학교 도서실에 있던 온갖 서적을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외우다시피 읽었으니.
그런데 지금은 바쁘다.
뭐, 자기가 선택한 생활이니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여전히 해뜨기 전에 일어나 삼촌들을 꼬리처럼 달고 구봉산까지 달리기를 하고, 씻고 아침을 먹으면 바로 자전거에 올라탄다.
“다녀오겠습니다!”
10킬로미터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달려 학교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30분 남짓 걸렸는데 이제 20분이면 도착하는 것 같았다. 무리해서 속도를 내지 않는데도 중간 정차가 없으니 버스보다 빨랐다.
“진혁아, 안녀엉-.”
몸을 푸는데 먼저 운동장을 돌던 염병택과 조슬찬이 손을 흔들었다.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 씨름부 야외 훈련장에서 밧줄을 잡고 오른다. 터질듯한 팔 근육을 보면 팔 힘만으로 오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턱걸이를 할 때처럼 등의 힘을 보태 팔의 피로를 최소화한다. 팔을 뻗어 밧줄을 잡으면 등 근육이 부챗살처럼 펴지고, 당길 때는 대흉근과 함께 등 근육도 쥐어짠다.
“아이구, 죽겄다! 진혁아! 이게 육상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으껙!”
진혁을 따라 하던 조슬찬이 모래판으로 떨어졌다.
후욱-후우욱-.
15회 왕복을 마친 진혁이 숨을 골랐다.
‘그러게? 무슨 상관이 있으려나?’
없으면 또 어떤가.
그냥 재미있고 늘 하던 일이라 하는 거지. 근육에 팽팽한 긴장이 올라오며 몸이 달궈지는 것만큼 즐거운 게 또 없다.
정해진 아침 운동을 소화한 진혁은 육상부 친구들의 자세 교정을 도왔다.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하던 것인데, 이 녀석들이 도망을 치는 통에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한데 대회가 잡히니 조슬찬과 염병택도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슬찬아, 달릴 때 무릎을 의식적으로 안쪽으로 붙인다 생각하고 뛰어 봐.”
조슬찬은 여전히 발바리 주법을 쓴다.
초등학교의 김영태 선생님도 조슬찬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운동하기를 바란다며 크게 교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세는 좀 잡아주시지······.’
어떤 교사는 때려가며 자신의 스타일이 나오도록 교정을 하거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김영태 선생님은 교정을 하지 않았다기보다 방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하며 보낸 시간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선생이었으니.
하긴, 자세를 고치는 것이 쉽지 않아 그 과정에서 그만두는 선수들이 많았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태양중학교는······, 선수는 무슨. 대회 있을 때나 소집되는 발 빠른 학생들이고 이병세도 코치가 아닌 인솔교사일 뿐이다.
“진혁아, 나는 오다리라 무릎이 안 붙어.”
“무조건 붙이라는 게 아니야. 붙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달리라는 거지.”
아마 조슬찬이 성적지상주의 코치를 만났다면 허리띠로 무릎이 묶였을 거다. 아니면 육상에 소질 없다며 쫓아냈겠지. 그 정도로 조슬찬은 심각한 오다리였다. 그 다리로 100미터를 12초대에 주파하는 게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무릎이 벌어지면 땅을 박찰 때 힘이 바깥으로 빠지는 거야. 그러다 무릎 인대도 다치는 거고. 힘은 아래로, 무릎은 앞으로 뻗어야 속력이 나오지.”
실제로 무릎 통증으로 자주 훈련을 쉬었던 조슬찬이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이 좁은 치마를 입고 뛰라고 할 수도 없고. 뜻대로 따라오지 못해 답답하지만 진혁은 최대한 친구들의 자세를 봐주기로 했다. 아직 성장 중이니 자세를 고치는 게 어렵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런 거지만.
“그려, 한 번 해볼게. 으아아-!”
바닥에 앉아 다리를 펴고 무릎을 붙이던 조슬찬이 골반과 무릎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억지로 관절을 자리 잡게 하려니 분명 쉽지 않았겠지.
“슬찬아, 천천히. 조금씩 해.”
진혁이 조슬찬의 다리를 만져 보니 아주 교정이 불가능한 관절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비전문가 진혁의 추측이긴 하지만.
‘관절 양쪽에 부목을 댈 수도 없고.’
바닥에 엎드려 팔로 땅을 받치고 상체만 들어 올리는 스트레칭을 계속하도록 주문했다. 그리고 조슬찬의 발과 무릎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자세가 편할 거야.”
“어, 편하다. 어으으- 션헌디?”
시원하겠지.
대퇴근과 발목이 이완되며 무릎에 가해지던 압박이 일시적으로 완화될 거다.
조슬찬이 무릎을 붙이는 훈련을 하는 동안 진혁은 염병택에게 제자리 걸음을 하게 했다.
“무릎은 명치까지 올린다 생각하고, 발끝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거야. 왼발이 밟은 곳을 오른발이 다시 밟게 해.”
염병택은 심각한 팔자걸음이었다.
달릴 때도 팔자주법을 사용하니 발목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 집이 양반이라 그렇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또래에 적응 중이었지만 이 녀석들의 유머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어린놈들이 재미없는 부장님들이나 늘어놓을 법한 헛소리를 늘어놓지 않는가. 지금도 보라지. 염병택은 제 유머가 마음에 들었는지 진혁의 눈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콧구멍도 벌렁벌렁. 그러나 진혁의 싸늘한 표정에 시무룩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구한말에 양반 신분 샀을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니.’
뼈대 있는 반론을 제기하려던 진혁은 친구의 뼈가 부러질지 모른다는 염려에 말을 삼켰다.
대신 이놈의 양반걸음을 고쳐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발이 벌어지니까 지면의 충격을 발이 받아내지 못하고 발목으로 가는 거야.”
“진혁이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겠니.
그냥 보기에 자세가 안 예쁘니까 그런 거다.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인체에 대한 이해도 상당한 수준이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번 주는 무리해서 뛰지 말고 자세 바꾸는 것부터 차근차근하자.”
“그래. 시방새는 맨날 타이어 끌기나 시키고 재미없어.”
“그런데 두 명은 안 보인다?”
“한 명은 춘천공고 가서 축구할 거라고 전학 가고, 한 명은 관뒀어. 재미없다고.”
계주는 글렀구나.
조금 아쉬웠다. 계주만큼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는 종목이 없었는데.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이어지는 배턴 패스와 모든 주자들의 전력 질주가 혼합된 단거리 계주에는 관중을 열광시키는 힘이 있었다.
시골 중학교의 춘계 체육대회만 하더라도 순위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이 함성을 질러내지 않던가. 그 모습만 보더라도 릴레이가 얼마나 손에 땀을 쥐는 승부인지 알 수 있었다. 관중도 그러한데 선수들은 어떨까.
“어그그-, 계주 웁스니께 아쉽다 그치잉?”
“그러게. 진혁이랑 같은 학교라서 더 좋구만.”
“병택아 쉬지 말고 계속 다리 올려 봐, 엄지발가락으로 땅 딛는다고 생각하면서 발끝으로만 딛는 거야.”
염병택의 자세를 잡아주는 진혁을 보던 조슬찬이 히죽히죽 웃었다. 이미 키가 180이 넘어버린 진혁은 누가 봐도 운동부 코치 같았다. 가르치는 내용이 영 근본은 없지만 말이다.
“으히히히-! 악-!”
스트레칭을 하던 조슬찬이 엎드린 자세로 웃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진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 친구들과 아침마다 함께 운동하는 건 즐겁다. 벌써 3년째다.
염병택과 조슬찬의 자세를 만져준 후 씨름부 비품실로 향했다.
“코치님, 안녕하세요. 튜브 좀 쓸게요.”
“이이. 그려. 근디 쥬부는 뭐 헐라고?”
스트레칭하는 씨름부 선수들을 살피던 성부현이 물었다.
분명 서울 출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2년 새 말투가 완전히 태양군 토박이로 변해 있었다.
“어깨 운동요.”
진혁은 씨름부 사물함에서 검은색 튜브를 두 개 꺼내 철봉에 걸었다. 철봉 기둥에 대고 두 손으로 당기는 튜브가 아니다. 폭이 한 뼘 정도 되는 좁은 튜브 두 개를 철봉 가로대에 걸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하듯 한 팔씩 번갈아 당겼다. 팔꿈치는 직각으로, 당긴 팔은 지면과 수직이 되는 위치까지만, 일정한 속도와 힘으로 반복해서 당기는 거다. 그러면서도 상체는 앞으로 구부리고 턱도 당겨 들리지 않게 했다.
후욱-후욱-.
금세 굵은 땀방울이 곳곳에서 솟았다. 턱에서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진혁아, 그건 무슨 운동이여?”
“어깨랑 옆구리.”
“그거 하면 달리기 빨라져?”
“도움은 되겠지.”
육상 단거리는 10초 남짓한 시간에 인간의 안에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경기다. 다리의 힘만으로 달려서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고,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리만큼이나 고생하며 힘을 내는 팔도 마땅히 동작과 힘을 고려해야 한다. 단거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다 보니 모두가 알면서도 간과하는 부위가 팔이었다.
“단거리는 어깨가 좋아야 해.”
“진혁이는 어깨 좋잖아.”
“더 좋으면 더 빨리 뛸 수 있겠지.”
염병택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 괴물 같은 녀석은 얼마나 어깨 뽕을 세우려고 저러는 걸까. 옆구리에도 갈빗대 무늬로 근육이 잡힌 것이, 옆구리만 보면 마치 지난 주말 TV에서 본 미스터코리아 같지 않은가.
“나두 해볼랴.”
땅바닥에서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던 조슬찬이 튜브 당기기에 도전했다.
철봉은 팔을 뻗어야 닿는 높이에 있으니 어차피 조건은 비슷하다. 진혁은 조슬찬에게 발 디딜 곳과 자세를 알려준 후 지켜보기로 했다.
“흡!”
조슬찬의 얼굴이 폭발할 듯 시뻘겋게 익었다. 금방이라도 출산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튜브는 한 뼘도 당길 수 없었다.
지켜보던 염병택이 묵직하게 한마디 던졌다.
“똥 싸, 똥 싸.”
“흐크큭-! 아오! 왜 웃기고 그렴마! 거의 다 땡겼는디이-.”
염병택과 조슬찬이 배를 잡고 웃었다.
“씨름부 집기함에 보면 더 약한 고무줄 있을 거야. 너희도 틈날 때 해 봐.”
친구들과 어울려 웃던 진혁이 정리를 한 후 옷을 챙겼다.
“나 먼저 씻고 수업 들어간다.”
“그려-, 니열 보자-.”
“진혁아, 잘 가.”
착하고 순박한 녀석들. 친구들에게 등을 보이고 걷는 진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씨름부 합숙소 겸 실내 훈련장에는 샤워실이 마련되어 있다. 비록 냉수뿐이긴 하지만 겨울에도 찬물 샤워를 밥 먹듯이 했었는데 6월에 냉수 샤워가 대수인가.
“코치님 샤워 좀 할게요.”
“허이구, 그냥 허라니께 뭘 매번 허락 맡구 그런다니?”
성부현은 ‘너희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샤워실 만들었다’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말하는 순간 지원이 끊긴다고 했으니까.
쏟아지는 찬물 속에서 진혁은 조슬찬과 염병택에 대해 고민했다.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친구들 수준이 올라와야 진혁도 마음 편히 대회를 준비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저 해맑은 녀석들을 데리고 대회에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