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36화 (136/338)

< 엉터리 손 코치 >

관심을 기대하지 않기에 상담에 성의를 보일 이유도 없다. 상대가 예의를 차리지 않기에 진혁 또한 자세를 굽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자리는 상담이 아닌 상호 설득을 위한 설전장일 뿐이다.

진혁은 덤덤하게 말했다.

“시험 잘 보는 건 재능이 아니에요. 공부 잘하면 뭐해요. 인간이 되어야죠. 출세라는 목표 같은 거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과거에는 현실 도피를 노렸으나, 지금의 진혁은 굶는 일에 이골이 난 나머지 탈출을 꿈꾸는 영혼이 아니었다.

“야, 목표가 있어야-.”

“목표가 있어야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하겠죠. 그러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혼나고 좌절할 테구요. 잠깐 방황이라도 하면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 욕하고 손가락질을 해요. 제자리로 돌아오면 어른이 잘 가르친 게 되고, 끝내 엇나가면 없는 사람 취급을 해요. 남들이 없는 사람 취급해도 좋아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갈래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과 어투를 유지하면서도 진혁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늘어놓았다. 남이사 옆으로 걷든, 뒤로 걷든 참견하지 말라. 내 가족만 날 믿고 기다려주면 더 바랄 게 없다.

푸우욱- 긴 한숨을 내쉰 교사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째 학생에게 잔소리를 들은 기분 아닌가. 그래도 이대로 물러선다면 대한민국 교사가 아니지. 숨을 들이쉬고 금싸라기 같은 가르침을 내리려 할 때였다.

“가족과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진혁은 더이상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이제 먹히지 않을 걸 알기에 속으로 삭였다.

‘자신도 없어.’

과학고는 아니었지만 전생에 명문 사립고를 나왔고 그때도 1등을 놓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과학고는 진짜 수재들이 가는 곳이다. 진혁은 스스로 엄격하게 선을 그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고려했을 법한 학교였으나 현재의 두뇌는 과거처럼 공부만 생각하지 않는다. 학업에만 몰두할 정도로 순수하지도 못했고, 한 가지에 매달릴 정도로 절실하지도 않았다.

태양고등학교는 지방의 작은 학교지만 입학 커트라인도 제법 되는 학교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친해진 친구들도 있고, 이승훈과 신우성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라도 함께 고등학교를 다닐 생각이었다.

‘그리고 동생들.’

진혁이 너무 잘 나가면 동생들은 비교당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전 생에 똑똑하다는 이유로, 제 자식들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욕을 먹었던가. 의붓누이들의 날 선 눈빛도 수없이 받아야 했다.

노려보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인성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날 선 눈빛 뒤에 숨은 원망이 진혁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었다. 왜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비교당하게 만드느냐는 원망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도 들곤 했다.

자신이 부자 오빠, 좋은 형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동생들은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진혁에게서 소리 없이 뿜어나오는 투기가 반항으로 비쳤을까, 교사는 포기한 듯 책상 위로 볼펜을 굴렸다. 샐쭉한 얼굴로 입맛을 다신 교사가 마지못해 질문을 던졌다.

“음······, 그래도 좋아하는 거나 특출나게 잘하는 게 있을 거 아녀?”

어찌나 당황했는지, 서울 출신 교사가 입에 붙지도 않은 사투리까지 썼다.

음, 연애 빼고 다 잘하긴 하지만.

“좋아하는 거 있어요.”

엄마와 아빠도, 유진이도 좋아하는 것.

잘 웃지 않는 진혁이 진지한 표정을 풀고 슬쩍 웃었다.

느허허-.

***

“아이코-!”

손유진은 또 넘어졌다.

다른 친구들보다 팔다리도 길고 튼튼한데 잘 넘어진다. 엄마가 그러는데 빨리 달리려는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어쩐지, 걸을 때는 안 넘어지는데 달릴 때만 이러더라.

“아이고, 우리 친구 넘어졌네요. 괜찮아요?”

함께 정글짐을 향해 달려가던 이동호가 손유진을 일으켰다.

이동호는 유치원 선생님이 가르친 대로 행동하는 친구다. 넘어진 친구를 돕는 것도 그렇고, 말도 선생님이 책에서 읽어준 것처럼 하잖아. 서울에서 온 녀석이라 그런가?

툭툭 털고 일어난 손유진은 정글짐을 바라보았다.

짹짹짹-.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들이 한데 엉킨 모습이 감나무에 매달린 참새떼 같다.

“난 달리기 할 거다요.”

참새는 예쁘지만 다가가면 날아가버린다.

정글짐에 앉은 참새의 평화를 위해 손유진은 가까이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늘 못 놀면 내일 놀아도 되니까. 손유진은 똑똑한 유치원생이라 다음을 기약할 줄도 안다.

손유진은 운동장을 달리며 오빠가 가르쳐준 대로 팔다리를 놀렸다.

배에 힘을 주고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야 땅을 강하게 찰 수 있다고.

땅을 딛는 게 아니라 밀어낸다고 생각하고 발목에도 힘을 주라고 했다.

‘역시 뛰는 건 힘들다요.’

손유진을 따라 달리던 이동호가 뒤에서 숨찬 소리를 냈다.

어느새 합류한 김호진도 무릎을 짚었다.

우우웩-.

헛구역질한 김호진이 물었다.

“손유진은 왜 뛰는 거여?”

손유진이 멈춰 섰다. 누군가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을 해야 하는 까닭이다.

허리에 손을 얹고 오빠에게 들은 대로 대답했다.

“잘 뛰는 사람이 오래 뛸 수 있다요.”

뭔 소리야······.

그게 이유가 될 수 있나?

뭔가 이상한 대답이긴 한데 김호진과 이동호는 지적할 만한 지성을 아직 쌓지 못했다. 그저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딩동댕동-. 쉬는 시간이 끝나자 손유진이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가자요.”

먼지 앉은 운동화를 툭툭 턴 손유진이 유치원 교실을 향해 걸었다.

길게 호흡을 고르면서였다.

달리기가 좋긴 한데, 장군이를 이기려면 아직도 멀었다.

‘장군이를 이겨야 오빠도 이길 수 있다요.’

오빠와 경쟁하려는 욕심은 아니다.

다만, 저 때문에 오빠가 마음껏 달리지 못하고 천천히 걷는 게 미안했을 뿐이다.

손유진은 오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 걷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비슷하거나 빨라야 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서울에 사는 홍수정 언니도 그래서 운동을 한다고 했다. 손징역 오빠에게 업히지 않고 옆에서 함께 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건강해져야 한다고.

언젠가 정원이도 뛰어다닐 텐데, 정원이도 오빠처럼 키가 커지면 누나보다 빨라질 때가 온다고 엄마가 알려줬다. 그렇다면 손유진은 동생에게도 짐이 될 거다.

오빠는 손유진을 끔찍하게 사랑해서 보조를 맞추지만, 정원이는 동생이라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내리사랑이라나? 어려운 말이지만 손유진은 알아들었다.

그래서 빨라져야 한다.

오빠처럼 빨리 달리고, 오래 달리기 위해.

그래야 동생과 맞춰 걸을 수 있다.

아주 쉬운 이야기였다.

‘오늘도 집에 가서 진남 아지찌하고 운동한다요.’

수영도 배우는데 운동하는 게 너무 즐겁다.

오빠는 손유진에게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손유진은 빨리 크고 싶었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

신우성은 오늘도 이승훈에게 매달려 붕붕 돌았다.

신장 차이 때문에 일단 들리면 대책이 없다.

“허리! 허리!”

지켜보던 손진혁이 외쳤다.

허리에 힘을 줘 다리를 당기라는데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무릎 굽히지 말고!”

손진혁이 시킨 대로 운동한 것도 벌써 2년이 넘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이 주를 이루었는데, 덕분에 신우성은 체급에서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이승훈에게 놀아나는 건 순전히 체급과 힘 차이 때문이다.

신우성은 언젠가 손진혁에게 물었었다.

왜 그리 열심히 돕는 거냐고.

- “빚진 느낌이라.”

이상한 놈이다.

백 원 한 장 빌려준 적이 없는데 뭘 빚졌다는 건지.

어쨌거나 신우성은 오늘도 이승훈과 훈련을 한다. 손진혁이 지켜보는 곳에서.

처음에는 순진해서 시키는 대로 했고, 나중에는 손진혁이 가르쳐준 훈련법이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아서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중학교 때만 돕겠다고 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더이상 돕지 못할 거라고.

신우성은 일찌감치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자신의 성적 때문이었다. 씨름을 계속하려면 태양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특기생이라고 무조건 받아주지는 않는다. 입학시험에서 필요점수를 획득해야 입학이 가능했다.

생각만 해도 아쉬웠다. 씨름을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저런 친구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코치나 선배들은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정확하게 시범을 보이지도 않는데, 손진혁과 이승훈은 다르다. 친구라 그런 거였겠지.

태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고등학교 때도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주 간단한 진리였다.

그래서 신우성은 훈련이 끝난 후에는 잠을 쫓으며 공부에 매달렸다.

합숙 훈련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 신우성을 선배들은 신기한 눈으로 보았지만, 하다 보니 공부도 재미있었다.

이승훈도 도움을 주었다.

- “문제 낸 눔이 뭔 소리를 허는지부텀 이해한 담이 답을 찾을라구 허야지. 너는 워치케 된 눔이 답부터 찍을라구 그런다냐. 너는 인마, 그 뭐여. 생각을 좀 체계적으루다 헐 필요가 있다구 본다 나는. 급허게 덤비먼 덤빈 눔이 자뻐지는 거여. 씨름이나 공부나 똑같여-.”

이승훈은 손진혁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더니 제법 훈장님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듣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원래 똑똑한 놈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그렇게.

친구들 덕분에 신우성은 체육특기생이 아니어도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을 노릴 정도로 우등생이 되었다.

운동은 계속할 생각이다.

어릴 때부터 쭉 해온 것이고 씨름선수가 아닌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푸확-!

이승훈이 보기 좋게 쳐박혔다.

손진혁은 이승훈을 가르칠 때 더 터프해진다.

막 굴려도 되는 몸이라 그렇다나?

신우성이 보기에도 이승훈은 튼튼하다.

아마 손진혁 다음으로 몸이 가장 단단할 거다.

보통 중량급 선수들은 운동선수라기보다는 저팔계처럼 보이는데, 이승훈은 잘 다듬어진 조각 몸매였다. 이승훈을 보면 재작년에 졸업한 최태양 형이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천하장사에 올라 지역을 넘어 전국구 유명인사가 됐지.

“천하장사 신우성.”

멍하니 친구들을 구경하던 신우성을 손진혁이 불렀다.

청 반바지 위에 맨 샅바가 제법 잘 어울리는 친구다. 신우성의 개인 코치이기도 했다.

“훈련, 집중, 복기.”

신우성은 1학년 때부터 손진혁이 주입한 단어 세 개를 되뇌며 모래판으로 향했다.

스스로 엉터리 코치라며, 제대로 배우는 건 코치에게 하라는 손진혁이지만 신우성은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다름 아닌 저 친구라는 걸.

‘나도 태양 형처럼 천하장사 될 거야.’

아, 그런데 훗날 내가 천하장사 되면 승훈이는 못하겠네.

***

신우성과 삼세판을 나눈 진혁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성장했어.’

중심이 낮아졌다.

긴 다리가 늘 약점처럼 작용하던 신우성인데, 이제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오랜 단련으로 코어가 강해진 덕분이었다.

이제 신우성도 고등학교에 진학해 씨름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아직은 방심할 수 없다.

“우성아, 무릎을 항상 아껴야 씨름을 오래 할 수 있어. 그것만 명심해.”

“응. 씨름부에서 점프력은 내가 제일 좋아. 고등학교 형들보다 높이 뛰어.”

전생의 신우성이었다면 보일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이미 운동을 접었을 테니.

“올해 대회 몇 개나 남았지?”

“세 개.”

신우성이 퉁퉁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웃으며 검지로 신우성을 가리켰다.

신우성이 힘차게 외쳤다.

“무릎!”

3년째, 운동을 마칠 때마다 외치는 신우성만의 구호였다.

오늘 운동도 끝이라는 반가움과 함께 이승훈이 배를 문질렀다.

“회장, 우덜끼리 우성이네루 도가니탕이나 먹으러 가자.”

진혁은 잠시 고민했다.

유진이와 정원이가 보고 싶어서라도 운동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갔었는데, 우성이네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에 가자는 제안은 갈등이 될 수밖에 없다.

식육점 장사가 잘 되어 신우성의 부모님이 식당을 차렸는데 음식 맛이 끝내줬다. 무엇보다 탕 요리에 건더기가 많아 마음에 들었다. 회식이 잦은 씨름부가 단골이 되어 거의 매일 삼겹살을 팔아주니 매출도 좋다고.

“그래. 회장도 가자. 엄마가 회장이랑 승훈이는 언제든지 환영이랬어.”

신우성이 팔을 잡아끌자 진혁도 못 이긴 척 끌려갔다.

으허허, 우성이 힘 세졌네.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하의 손진혁을 설득하다니, 순진했던 친구들이 세상을 겪으며 교섭능력이 향상된 느낌이었다.

“우성아, 나는 소머리국밥······.”

얻어먹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도가니탕은 비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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