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뚱한 협상가 (4) >
아들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연락은 교감으로부터 받은 터였다.
감사패 관련이라면 교무회의 의결 내용이리라.
손광연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윤 과장님, 학교에서 무슨 이유로 감사패를 주고 싶다던가요?”
“학교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로 힘써준 데 대한-.”
“구체적으로요.”
“예. 승강기 설치 지원도 그렇고, 급식사업처럼 선진국 방식 지원도 감사하다고······.”
“아휴- 뭘 그런 걸 가지고. 됐다고 그래요.”
손광연이 손을 내둘렀다.
겸손한 사장의 모습에 감명받은 윤 과장이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우리 회삿돈 한 푼도 안 들어갔는데 감사패 받으면 양심에 털 난 놈이지.’
태양중학교와 고등학교 승강기 설치가 끝난 후 비닐을 벗기면 세인기계 로고가 선명히 드러날 터. 으흥흥-, 찻잔을 기울이는 손광연의 코에서 요상한 소리가 났다.
여전히 친구 삥을 뜯지만 손광연은 양심적인 사람이다. 감사패는 홍기준에게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일이었다. 홍기준 역시 극구 사양했으니 대신 받아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양강욱이 속으로 흉볼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고.
손광연은 아들이 제시한 사업계획서를 읽으며 미간을 짚었다.
절로 나오는 끄응- 앓는 소리가 그의 고뇌를 대변했다.
‘돈이 별로 안 될 것 같은데.’
땅덩이 넓은 지역에 산개한 20여 개의 초등학교와 10여 개의 중학교, 두 개의 고등학교에서 급식사업을 하자는 보고서였다.
김치 등 식자재 생산량이 증가할 것이고 자체 보유한 물류 기업을 이용해 유통하면 되니 사업 자체는 영위가 가능하다.
문제는 마진이었다.
증가할 물동량은 소화한다 쳐도 급식사업에 소요되는 인건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건 원자재비 정도였다. 그나마 식자재는 제너럴 팜 소속의 경작지에서 나오는 물량으로 커버가 가능하니까.
‘이놈은 사회사업을 하고 싶은 건가?’
보고서 상단의 메시지부터 무미건조했다.
「행복으로 돌아오는 베풂」
밥은 중요하다.
성장기에 밥 굶는 일이 많았던 손광연 또한 크게 공감하는 지점이었다. 그 무서운 문석일 일행도 밥으로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중이기도 했고.
그래도 사업을 하려면 수지타산이 맞아야 할 것 아닌가.
‘땅 파서 장사하라는 소린가?’
형식적으로는 고객, 심리적으로는 보스인 손광연의 고뇌가 마음에 걸렸을까, 목 짧은 양강욱이 곰 같은 머리를 슬쩍 디밀었다.
편히 보라는 뜻으로 손광연이 보고서를 양강욱에게 건넸다. 말이 경호팀장이지, 어떤 직원보다 두뇌 회전이 빨라 늘 곁에 두고 조언을 구하곤 하던 터였으니 본다 해도 거리낄 것 없었다.
“양 팀장 생각은 어때요?”
굳건한 턱을 쓸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양강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손광연이 말끝을 흐렸다.
기획의도와는 달리 좀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업 타당성 때문이었다.
“이걸 봐요.”
손광연이 조사지를 내밀었다.
사립고등학교 기숙사의 식비를 조사한 자료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끼 이천 원이 넘어요.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기숙사인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천 원이 안 돼. 시설을 지어주고 식비까지 이렇게 저렴하게 하면 남는 게 없어.”
“사람이 남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을 쓴 거겠지만.
경영자로서 쉽사리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하나 양강욱은 진혁과 통한다고 자부하는 사람 중 한 명. 사나이 가슴에 새겨진 포부를 읽어준 사람인데, 저라도 진혁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서운해할 거라 생각했다. 하여, 경영자가 아닌 한 명의 사나이로서 의견을 개진했다.
“많은 사람이 무시하는 것이지만, 성장기에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커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요. 굶거나 특정 영양소가 결핍된 사람은 결핍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호르몬 분비에도 영향을 주고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습니다. 균형 잡힌 식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성장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행복을 채우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엇나가는 게 아닐까요? 아마도 진혁이는 그저 건강한 세상을 꿈꾸는 낭만주의자가 아닐지······.”
“허헛. 꿈보다 해몽이구먼.”
낭만주의자.
손광연은 진혁에 대한 양강욱의 평가를 속으로 곱씹었다.
일면 그럴듯하게 들렸다. 매일 장군이와 홍시를 달고 뛰어다니지만, 해를 따라 변하는 계절을 놓칠세라 매 순간 즐길 거리를 꺼내 드는 녀석이었으니.
어쩌면 아들은 행복이라는 낱말을 쫓아 그리도 열심히 사는 건 아닐까. 저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다수의 행복. 아니면 다수의 행복을 보는 만족감을 위해서.
‘뭐, 말로는 지역유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자는 뜻이라던데.’
진혁이 직접 설명한 의도는 그처럼 교과서적이고 담백했다.
에휴-, 손광연이 보고서를 덮어 서류봉투에 넣었다. 고민한다고 아들의 속내가 드러날 일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사업에 뛰어든 이유를 다시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그럼.”
우리 아들이 그런 세상을 원한다는데.
앓는 소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적자가 나는 사업도 아니었다. 이 또한 손광연이기에 가능한 사업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많겠구나. 손광연은 지역구 국회의원부터 교육감까지 면담 대상자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홍기준에게 손을 벌려서도 안 된다.
‘더이상 얕보일 순 없지.’
***
그날 진혁의 집 마당에서 조촐한 당선 축하파티가 열렸다.
말이 축하파티지, 바비큐 파티를 좋아하는 손광연이 아들 핑계를 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아하하, 축하는 무슨······.”
지금도 보라지.
축하 인사를 자기가 다 받고 있지 않은가.
숯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는 간단한 파티였지만 경호원들과 최미경 청소년의 가족도 참석했다. 최미경의 축하 인사도 손광연을 향했다.
“아저씨 축하드려요!”
“그래 그래. 미경이도 많이 먹어라.”
거기에 빠질 수 없는 사람, 동네의 똠방각하 조일헌과 공공의 어르신 천길룡도 참석했다. 그들의 너스레가 빠지면 못 배워먹고 근본 없는 집이라는 소리가 동네에서 나올 지경이었으니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 아범은 사장인디 아들은 회장이여어-.”
“어허허-, 터가 좋아. 터가.”
절친처럼 붙어 다니던 박대순이 처자식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 이후로 조일헌은 손광연, 최장환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는 손광연이 워낙 바빠져서 대부분 시간을 최장환이나 천길룡과 붙어 다니지만.
그렇게 스무 명을 가뿐히 넘기는 인원이 마당과 정원에 모이니 왁자지껄했다.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거철마다 망둥어처럼 뛰는 거겠지.
“사모님, 축하드립니다.”
“호호호-, 고맙습니다.”
정원이를 안은 엄마가 SSS 요원들에게 축하를 받는 사이, 진혁은 엄마 몰래 유진이에게 콜라를 챙겨줬다.
“에헤헤-, 감사합니다.”
역시 오빠가 최고다. 유진이 얼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오빠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일곱 살 유진이를 보는 진혁의 얼굴에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유진이는 언젠가부터 감사 인사를 할 때 손을 앞으로 모으고 굽신댄다. 어른이 그랬다면 간신배처럼 보일 동작이라 눈살을 찌푸렸을 텐데, 아이가 이러니 너무 귀여웠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헤헤헥-.
장군이와 부하들도 잔치 현장을 기웃거리며 잘 익은 고기를 대접받았다. 홍시를 비롯한 부하견들은 위계가 잡힌 녀석들답게 장군이가 먹기 전에는 고기를 씹지 않았다. 개라기보다는 늑대 무리에 가까운 기강이었다.
가족과 또 다른 가족, 이웃과 개들이 모여 함께 먹거리를 나누는 모습.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 집에서 흔히 구경할 수 있는 정경이었다.
진혁은 콜라를 마시는 유진이가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리고 고기를 씹었다.
‘맛은 좋네.’
그런데 아직도 궁금하다.
도대체 학생회장은 뭘 하는 자리지?
어쩌다 보니 하게 됐는데 왠지 끝까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졸업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당선자 발표 후 교감 선생에게 조심스레 물었었다.
- “앞으로 뭘 하면 되나요?”
- “허허허! 뭘 더 하려고?”
교감은 학생 신분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이미 진행시켰으니 성취에 목매지 말라는 덕담을 건넸다. 어차피 3년만 머무는 학생들, 졸업하면 금세 잊힌다며.
‘뭐······,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된 건가.’
평화롭다 못해 따분한 일상에 적응할 만도 한데.
늘 충혈된 눈으로 뭔가를 향해 달리던 전생이었다. 그런 경험이 피를 따라 흐르고 그 집중력을 달팽이집처럼 이고 사는 남자에게 무목적 행위란, 콜라를 마신 후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트림과도 같은 찝찝함을 동반했다.
그어어어억-.
‘어우야, 유진이 시원하겠다.’
***
손광연은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이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와하하-! 우리 아들이 글쎄-. 아, 그렇다니까 인마. 너는 부회장이지만 우리 아들은 회장이라고!”
조일헌의 우스개도 적절히 채용하는 응용력을 선보였다.
진짜 왜 저러실까. 창피해 죽겠네.
내일 유진이가 입을 흰색 타이즈를 개키던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오빠, 정원이처럼 도리도리한다요.”
“그게-, 정원아 안 돼!”
“우우우-.”
회장은 무슨 회장.
유진이와 대화하랴, 정원이가 누나 발가락 빨지 못하도록 떼어놓으랴. 육아에 집중하는 진혁의 머릿속은 저녁때마다 하얗게 변한다. 하긴, 유진이도 애기 때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었지.
형이 말리니 서운했을까, 정원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리려는 얼굴이었다. 세상 서러운 눈으로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정원이가 빼액 소리지르지 않도록 급히 달래야 했다.
‘아이고 운동보다 아기 돌보는 게 더 힘드러워.’
고기는 밥이 아니라며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를 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아빠는 아들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고.
팔자에 없던 동생이 둘이나 생겨 좋긴 한데 두 배로 힘들어진 것도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확실히 남자아이는 손이 더 많이 간다.
유진이는 아기 때 혼자 두어도 얌전히 앉아 방긋방긋 웃었는데, 손정원 이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며 전쟁터로 만들었다. 어제는 아빠가 아끼는 군자란을 쑥 뽑아 뿌리를 뜯어 먹었다. 맛있디······.
‘아기를 키우는 건지, 고양이를 키우는 건지.’
조만간 어항의 물고기를 잡아먹을지도 모르겠다.
납자루 몇 마리가 비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마침 아빠도 홍기준과 아들 키우는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간 듯했다.
“야, 애기 한둘 키우냐? 냅두면 알아서 다 커요.”
알아서 크겠죠.
흙 퍼먹으면서.
한숨 쉬는 진혁의 시야에 아빠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엄마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러게 조일헌이 주댕이가 방정이라고 했지.
아무래도 오늘 밤에도 아빠 등짝에서 화약이 터질 것 같다.
***
3학년 1학기도 절반이 지나가니 진로상담을 하란다.
진혁은 학생상담실에서 진로상담교사와 마주 앉았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네.’
이전의 생과 비교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진혁은 항상 1반이었는데, 학급 친구들의 면면이 조금씩 달랐다. 2학년과 3학년 담임교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진로상담교사는 그대로였다.
진로와 관련해서는 담임교사와 1차 상담 후 진로상담 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일개 중학교에 진로상담교사를 따로 두다니, 전문성 제고 없이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것 같아 우스웠다. 과거에도 느꼈던 기분이다.
진로상담 교사가 진혁의 기록부를 살피며 입술을 모아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저 반응도 똑같네. 기억난다.’
평범한 학생들은 인문계와 실업계 진학을 놓고 상담을 한다. 농촌과 어촌에 사는 학생들이 많아 학업성적과 별개로 실업계를 택하는 학생도 많았다. 인문계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보편적 성공으로 간주하던 세상, 도시의 학생들이 알았다면 까무러칠 일이었으나 고향을 좋아하고 가업을 잇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런 고민이 전혀 없었다.
물려받을 땅, 과수원과 어선이 있는데 적성까지 맞는다면 고민이 길지 않는 게 정상이리라.
아무튼, 손진혁이라는 놈은 다른 측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성적이었다. 정신 차리려는 듯 교사가 도리질을 하고는 진혁을 보았다.
“진혁이는 과학고 갈 거지?”
여기까지도 과거와 똑같다.
옛날에 진혁은 뭐라고 답했던가.
현재 사는 집을 벗어나기 위해 기숙사 지원이 되면서도 고향에서는 멀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는 다른 답이 나왔다.
“그냥 태양고 가려고요.”
“왜!”
교사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러 진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와씨, 놀래라. 하마터면 출수할 뻔했다.
왜 자기가 화를 내는 거지?
교사는 진혁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담임교사에게도 이런 학생이라는 걸 전해 듣기는 했지만, 학생 입으로 직접 들으니 말 못 할 충격이었다.
“이 성적으로, 그 머리로 왜 과학고를 안 가?”
“집이 좋아요.”
뭔가 오해를 했는지 교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어? 하는 눈빛이었다.
“어, 너희 집 좋은 건 아는데-.”
“집에서 지내는 게 좋다고요.”
아, 그 소리였나. 교사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앉은 학생이 너무나 멍청한 대답을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집에 돈도 많아, 머리도 좋아, 과학고를 거쳐 명문대를 가면 출세길이 열리는데 이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진혁아, 사람은 말이야. 재능을 썩히면 안 되는 거야. 어떻게 살겠다,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지.”
피곤한 잔소리다.
그런 말은 동생 유진이도 할 수 있겠다.
저리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은 없다.
반대로 학생의 생각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저 어른인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길 뿐.
‘기대하지 않는다.’
진혁의 반개한 눈은 평정심을 의미한다. 그 눈의 덮개를 올리듯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싸우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