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34화 (134/338)

< 엉뚱한 협상가 (3) >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심호흡, 심호흡.’

씁후씁후-.

엄마와 아빠가 좋아하시니 출마를 결정했으나 시선을 받는 일은 여전히 달갑지 않다. 그나마 기절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기계적으로 숙달된 발표 실력과 경험 덕분이었다.

아무튼, 부모님을 위한 출마라 한들 그 의도만은 순수하길 바랐다. 그래서 고민했다. 학생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저 친구들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마이크를 당겼다.

[저는-.]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학생들이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먼지를 마시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요점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면 굳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메시지에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말이 길어지는 것.

진혁은 서사를 배제하고 당위성 확보를 위한 설득과정을 생략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후보들의 인기를 뛰어넘어 유권자의 관심을 끌어올 필요가 있었으니까.

[태양군에 기반을 둔 기업과 협약을 맺어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파격적인 발언이었으나 최대한 힘을 빼고 담백하게 알렸다.

처음부터 힘이 들어가거나 과장된 액션을 취할 경우 반감을 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큰둥하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예산이 뭐여?”

“충남 예산?”

이런 씨벌탱······.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

아재 개그는 초딩들 말장난과 일맥상통한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지금도 교복을 입지 않은 녀석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실실거리지 않나.

뜬금없이 들려온 헛소리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한숨을 참아낸 진혁은 다음 대본을 떠올렸다. 모든 상황을 자신이 숙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연설문을 준비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걸 예의주시하는 유권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상황을 내가 통제해야 한다.’

선거판 훼방꾼들의 방해공작에 넘어갈 순 없다!

당장 시행할 수 있는 공약부터 말하는 게 좋겠지.

우선 사소한 걸로 다른 친구를 부러워하지 않게 해줄게.

[우유 급식은 앞으로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공급될 겁니다.]

조슬찬을 떠올리며 구상한 공약이다.

엄마 한유영의 후원에도 불구, 조슬찬은 그 돈을 저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할머니의 약값과 병원비에 사용하고 있었다. 진혁이 확인하기로 결코 적은 돈이 아닌데도 말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학생들은 멀뚱거리며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누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뇌물 아녀?”

“예산군에서 우유를 지원하는 건가?”

헛소리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준 진혁이 왼팔을 뻗어 운동장 옆 동산을 가리켰다.

[두 번째로, 운동장 옆 나대지가 보이십니까?]

“나대지가 뭐여? 그네가 보이는데?”

“그네가 유식한 말로 나대지인가?”

이제 진혁도 재미없는 말장난에 내성이 생겼다.

헛소리를 흘려듣고 준비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저곳에 곧 급식실이 생길 겁니다. 아마도 우리 3학년은 그 혜택을 크게 못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후배들, 그리고 고등학생들은 저 급식실에서 식권을 내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운영됩니다. 학교 측과 운영 기업이 협상을 하겠지만 식비는 아주 저렴하게 책정될 예정입니다.]

이쯤 되면 핵폭탄급 파괴력일 거라 생각했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들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 일찍 오면 아침도 먹을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게다가 영양사가 상주한다면 균형 잡힌 식단도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급식이 뭐여?”

“우유를 저기 가서 먹으라고?”

어이그, 이 촌놈들 진짜.

기껏 준비한 파격 공약의 쇼케이스인데, 관객의 호응이 형편없었다. 약장수 앞의 아이들보다 못한 반응이었다. 그나마 제법 도시 물 좀 먹고 외국 청소년 드라마를 본 친구들이 진혁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진혁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호응이 없어서일까, 어째 회사 다닐 때 발표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공약-]

학생회장 선거일은 공교롭게도 장애인의날이었다. 4월의 세 번째 수요일에 학생회장 선거를 치르는 전통에 의한 것이었다.

단상에 선 진혁이 운동장 한편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1학년 후배를 일견했다. 이내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스스로 바란 적 없는 사고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저건 또 뭔 소리여.”

“저 형은 전교 1등이라더니 말도 어렵게 하는구나.”

까까머리 1학년생들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도 불편함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시겠지만-.]

진혁이 이번에는 팔을 뒤로 뻗었다.

고등학교 건물에 가려져 중학교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학생들은 진혁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상태였다.

이미 중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건물에 장애인용 승강기 설치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건물 옆구리 벽을 허물고 안전 펜스로 학생들의 접근을 차단한 것이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누군가 기부했다더니 손진혁이 말한 지역 기업이었구나.

몇몇 학생들이 시큰한 코끝을 검지로 비볐다.

[지상에서 각층 복도로 연결되는 승강기 설치 후원을 따냈습니다.]

와아아-. 짝짝-.

크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함성과 박수가 울렸다.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일을 먼저 진행시켰다는 거 아닌가. 선생님들도 함께 박수를 치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다. 저런 중학교 3학년이 또 어디 있을까. 장난으로 일관했던 학생들의 표정에 비로소 진지한 빛이 돌았다.

그와 함께 진혁의 숨통도 트였다.

‘이제 좀 살겠다.’

후우-, 다소 약하지만 원하던 반응이 이제야 나왔다.

먹을 것에는 반응하지 않더니 승강기에는 호응해주다니.

역시 착한 녀석들이었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사안들을 공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학교의 주인인 우리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을 뿐입니다. 저는 학생회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건 또 뭔 소리여?”

“관심 없는디 왜 나와?”

“선거가 장냥이여?”

진혁은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꼰대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언제 학생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이런 말 해보겠냐.

[누구나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친구들, 후배님들께서 아무쪼록 약한 친구를 돕고, 차별하지 않으며, 학교나 교사로부터 어떤 친구도 불리한 처우에 놓이지 않도록 앞장서는 훌륭한 학생이 된다면-.]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적절히 섞었다.

드디어 모두 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보였다.

[나아가 가슴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 과정에 제가 회장이 되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남은 학창시절을 바쳐, 제가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 정도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대가 저를 여기로 불렀습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아냈다. 내 이름을 외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명대사도 언뜻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다른 녀석들은 한마디씩 하는 아무말 대잔치에 발을 올리지 않는 것으로 진혁은 차별화를 꾀했다.

‘나 혼자만 정상이다.’

진혁은 과묵하다.

진혁을 무서워하는 친구도 많다. 고등학교 선배들도 무서워하는데 동급생이나 후배들은 오죽할까.

교사들과 척질 만한 민감한 말도 있었다. 교사든 학생이든 진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이는 없다는 걸 익히 알기에, 그런 사랑을 원치 않기에 진혁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우유 급식, 급식실 건설, 승강기 설치는 기정사실이었다. 찍지 않아도 이루어질 일이라는 뜻이었다.

‘떨어진다면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빠는 진혁의 요구에 여기저기 전화를 넣고 사람을 만나셨다.

교육청, 군청, 학교, 그리고 홍기준까지.

그저 조용하게 살고자 했으나 부모님이 회장 아들을 원하신다.

[기호 5번입니다.]

마이크에서 물러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공약 발표 전 인사를 했을 때보다 조용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반응이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휘이이이익-!

함성과 박수, 휘파람 소리까지. 우레와 같다는 말과는 동떨어졌으나 분명 고무적인 호응이었다.

반응을 살피는 진혁의 미간이 오므라들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선거는 분위기다.

흐름을 타려면 바람잡이 전략도 필요하다. 진혁은 바람잡이들을 심어두었다. 치사하지만 선거는 전쟁이라고 했다. 전쟁에 치사한 게 어딨냐.

억울하면 이기든가.

진혁은 중학생들 사이에서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이승훈에게 눈짓을 보냈다.

“손진혁! 손진혁!”

이승훈과 신우성 바람잡이가 주먹을 뻗으며 진혁의 이름을 선창했다.

손진혁! 손진혁!

그러자 운동장의 모든 학생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호오-.

바람잡이의 도움 덕분이지만 예상보다 뜨거운 호응에 진혁의 눈꺼풀이 활짝 열렸다.

‘이건 무슨 선거판 같네.’

선거판 맞는데.

본격 선거판으로 변한 운동장을 보며 채규호가 헤실헤실 웃었다.

“반장을 어떻게 이겨.”

건물을 짓고 우유 급식 지원에, 승강기 설치까지.

역시 퍼주는 선거가 최고다.

채규호는 이렇게 한 가지를 더 배웠다. 다른 친구들은 모르지만, 손진혁은 늘 채규호에게 뭔가 깨달음을 주는 반장이었다.

진혁은 운동장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휠체어에 앉은 후배를 슬쩍 보았다.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환하게 웃으며 옆에 선 교사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녀석이 감동 받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저 친구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고 시작한 일인데 어쩌다 보니 학생회장에까지 출마한 거랄까. 뭐, 선거뽕도 맞긴 했지만 결정하게 된 계기는 저 친구였다.

‘너 혼자가 아니다.’

조슬찬에게 들었던 질문이 있다.

다른 녀석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저를 도와주느냐고.

그때 진혁은 뭐라고 둘러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진혁은 그저 작의 호의가 누군가를 외롭지 않게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는 당당히 홀로서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때 비로소 호의를 경험했으니.

‘뿌듯혀.’

회장이 되면 부모님이 좋아하실 테고, 승강기가 생기면 저 녀석이 좋아진다. 아빠와의 거래에서 진혁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다. 한데 착한 일을 했다는 보람이 보상으로 따랐다.

‘고등학교 때는 인조잔디 깔아준다고 해볼까?’

결과를 낙관하며 다음 선거를 구상하는 걸 보니 선거뽕이 강력하긴 강력한 모양이다.

뭔가 일을 벌이고 누군가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 이렇게 즐겁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이건 마치 부모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으허허-.

*

학생회장 투표는 교사들도 참여한다. 그들 또한 학교의 구성원이니 배제된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학생회장 후보들과 교감, 학생주임 등이 배석한 가운데 개표가 진행되었다.

간헐적인 헛기침 소리와 투표용지 부스럭대는 소리만 개표장인 방송실 안을 채웠다.

반장들이 개표를 하면 부반장들이 집계를 해야 하지만 진혁은 회장 후보라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학생의 본분을 되새기며.

‘오늘 농업 시간에 사과나무 접붙이는 거 배운댔는데. 아깝다.’

아무래도 사과나무 접붙이는 건 독학해야 할 것 같다.

투표함이 열리고 여기저기서 기호와 이름이 불렸다.

“손진혁.”

“3번.”

“채규호.”

손이 바삐 움직이는 만큼 개표 속도도 빨라졌다.

칠판에 바를 정正으로 득표수를 집계하던 8반 부반장이 교감에게 물었다.

“과반 넘었는데 계속해요?”

“해야지.”

다른 후보들을 위해서라도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유권자에게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기 위해 100% 개표는 필수였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뇌까리는 교감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학생회장 선거는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다. 학생회장을 넘어 정치인이나 할 법한 공약을 들고나온 녀석에게 몰표가 발생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몰표가 안 나와?’

후보와 같은 학급, 같은 학교 출신들은 그렇다 쳐도 우유급식 지원만으로 충분히 5번에게 표를 몰아줄 사유가 될 텐데.

과거 투표에서는 70, 80%를 상회하는 득표율을 보인 당선자도 있었다는 걸 감안할 때, 손진혁의 득표율은 형편없는 수준이라 할 만했다.

‘육상대회에 꾸준히 출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텐데.’

3학년 때만 출전한다며 1, 2학년 때는 활동이 거의 없었으니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교감은 나름대로 이유를 분석했다.

“개표 결과 발표할게요오-.”

개표단장인 3학년 3반 반장이 까까머리를 긁적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삐이이잉-.

[아, 아-.]

[그냥 발표해 인마-.]

[예, 예-.]

이병세의 핀잔과 함께 개표 결과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태양중학교 제 사십오대 학생회장 선거결과를 모든 학우 여러분께 영광된 마음으로 발표하기에 앞서 민주주의 가치 실현을 위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신-.]

[그냥 발표하라고 인마 왜 지가 정견발표여어-?]

[예, 예. 삼학년 일반 반장이 당선-.]

[기호랑 이름을 불러야지 인마!]

총원 1,112명의 선거인단 중 699표를 받은 손진혁이 45대 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채규호는 의외로 4등이었기에 진혁은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뭐, 채규호에게 갈 표가 진혁에게 몰린 느낌이었지만 유권자의 마음은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진혁아, 축하해.”

“힘써줘서 고마워.”

다른 후보들이 사심 없이 진혁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학교 복지 개선에도 고마움을 표했다.

경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진혁은 갸륵하게 웃을 뿐이었다.

‘착한 녀석들이잖아······.’

평소에도 좀 잘 지내둘 것을, 평판을 고민하지 않았던 출마자의 소회였다.

학교 또한 작은 사회, 이 조그만 세상에서 뭔가를 하려면 학업성적이나 학적부에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는 학교생활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았다.

‘다시 살아도 인간 세상은 어렵다.’

아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당선은 어림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

에헷취-!

휴게실에서 양강욱과 잠시 티타임을 즐기던 손광연이 코끝을 비볐다.

햇빛을 본 것도 아니고 꽃가루 알레르기도 없는데 갑자기 웬 재채기란 말인가.

그때 휴게실에 등장한 경영지원과장이 티타임을 방해했다.

“사장님, 읍내 중학교에서 감사패를 드리고 싶다는데요?”

찻잔을 내려놓은 손광연이 뚱한 얼굴로 귓불을 긁었다.

마주 앉은 양강욱의 시선을 피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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