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뚱한 협상가 (2) >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해 운동을 하는 진혁이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1학년 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고 밧줄을 오르며, 시야에 포착되는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더랬다.
‘휠체어 타고 다니는 신입생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일찍 등교하는 학생이었는데 늘 어머니가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어디가 불편한지는 몰라도 한 달 넘게 휠체어를 이용하는 걸 볼 때 영구적으로 보행이 불가능한 처지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추측일 뿐이다.
‘내가 주위에 너무 무관심했네.’
1층 교실도 계단을 올라야 하니 매번 학생 어머니와 다른 학생들이 힘을 쓸 터였다. 1학년은 1층을 사용한다지만 앞으로 학년이 올라가면 2층,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학년이 올라가면 그 어머니가 학생을 업고, 휠체어는 들고 올라야 할 테지.
‘뭔가 도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계단 일부를 휠체어가 오르기 쉽도록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도 괜찮을 거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학교 측에서 선제적으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여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네.’
인간이란 이렇게 세속적이고 보상심리가 강한 동물이었던가.
괜스레 부끄러웠다.
경력을 트로피처럼 수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부모님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신다면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골 중학교 학생회장에 당선된다고 신문에 날 것도 아니고, 일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내가 변했다.’
이 또한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며 진혁은 스스로 한 단계 더 진화했음을 깨달았다.
진혁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을까, 괜히 미안해진 아빠가 말했다.
“진혁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 알지?”
진혁은 듣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심각한 결격사유를 점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애들은 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예민하고 감수성 충만한 또래 아이들이 진혁을 어려워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나, 잘못 건드릴 경우 여차하면 골로 간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을 터였다. 신입생 때 친 사고가 너무 컸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표를 받으려면······.’
하아-, 한숨이 나왔다.
역시 금권 선거가 답인가.
금품을 살포할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불리한 인기를 뒤집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연히 맞은 선거뽕이 드디어 손진혁의 안에서 약빨을 내기 시작했다.
“아빠.”
“응?”
진혁이 씨익 웃었다.
“저랑 협상하실래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쥐고 협박이나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의 심리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짜릿한 것이었구나.
***
“안녕하세요-.”
“유진이도 안녕?”
운전기사에게 배꼽 인사를 한 손유진이 씩씩하게 스쿨버스에 올랐다.
“유진이 잘 다녀와-.”
“네-. 에헤헤-.”
돌아서서 엄마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유진, 일루 오너-.”
유치원복을 입고 맨 뒤에 앉아 있던 안마을 김호진이 손유진에게 손짓했다. 마찬가지로 샛노랗고 동그란 유치원 모자를 쓴 손유진이 김호진의 옆에 앉았다.
“김호진 잘 잤다요?”
“이이-.”
손유진 이 친구는 말투가 독특하다.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말투인데 한 달 넘게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래서 김호진도 집에서는 손유진 말투를 흉내 내곤 하는데, 귀엽다며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시골 아이들을 위해 서울의 큰 회사에서 지원한 스쿨버스라고 했다.
이 노란 버스 말이다.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해 뭐라고 읽는지는 모르겠는데, 학교 정문에 있는 글자와 비슷한 걸 볼 때 ‘어동 어쩌고’가 아닐까.
아무튼.
마을 어른들에게 듣기로는 저 손유진의 아빠가 힘을 쓴 거라고 하던데, 손유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김호진이었다면 으스대고 매일 자랑했을 텐데.
몇 분을 더 달린 스쿨버스가 과수원에서 다른 친구를 태웠다.
유치원생만 타는 건 아니다. 어동초등학교로 등교를 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버스 정거장에 서 있다가 손을 들면 버스가 선다. 가끔 할머니들도 타시는데, 기사 아저씨가 할머니를 부축해 태우기도 한다.
중간 지점에서 이범호와 이동호 형제가 탔다.
손유진이 또 손을 흔들었다.
“이동호 안녕하세요.”
“유진이 옆자리 또 없네.”
이동호는 늘 손유진의 옆에 앉으려고 애쓰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늦게 타는 녀석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고학년 엉아들 옆자리뿐이다.
도시에서 온 녀석이라 그런가?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왔다는데, 짜식이 영 매가리도 없고 경우도 없다.
그건 그렇고 손유진은 특이한 녀석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아무리 낯이 익어도 김호진은 쑥스러워서 잘 안 되던데.
오빠, 언니, 친구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니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여자아이라서 그런 걸까, 콧물도 흘리지 않는다.
아, 지금 콧물이 중요한 게 아니고.
김호진이 물었다.
“너는 왜케 열심히 인사허는 겨?”
“회장 하려면 인사를 잘해야 한다요.”
뭐라는 거야.
반장이나 이장, 어촌계장은 들어봤어도 회장은 낯선 단어였다.
청년회장할 때 그 회장인가?
김호진이 소매로 코를 스윽 문질렀다.
‘인사.’
손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학생회장 출마를 고민하던 오빠가 아빠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면서였다.
- “제가 인사를 잘하는 성격도 아니고요. 친구들도 어려운지 먼저 아는 척을 안 해요.”
- “선배들을 두들겨 팼으니 그럴만하겠구나.”
- “두들겨 팬 거 아니구요······.”
오빠가 때려눕히기는 했지만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고 했다.
역시 배울 게 많은 오빠다.
손유진도 사람을 두들겨 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위험하면 때려눕혀야 한다요. 두들겨 패는 건 나쁜 짓이다요.’
똑똑한 손유진은 어렴풋이 차이를 알 것 같았다.
효율적으로 적을 제압하되, 폭력 자체를 즐기지 않는.
장진남에게 곰짐에서 운동을 배울 때 들었던 말과 일맥상통했다.
- “폭력은 나쁜 거애오. 겉으로는 몸이 상하지만 실제로 다치는 건 마음이거든오? 마음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 법이애오. 이 아저씨도 어릴 때 불량배들한테 맞은 게 아직도 기억나오.”
마음의 상처라는 말. 똑똑한 손유진은 이 또한 어렴풋이 의미를 알 듯했다.
분유통을 훔쳐간 오빠에게 느꼈던 배신감을 떠올리면 쉬웠다.
들로, 산으로 장군이와 홍시를 데리고 뛰어다니면서도 손유진은 이처럼 많은 스승에게 교육을 받으며 인성과 지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사. 회장.’
오빠가 회장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친구들이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데, 몇 명이나 찍어줄지는 모르겠다고.
오빠가 회장을 하면 손유진도 해야 한다.
그래야 오빠를 닮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빠는 인사가 부족해서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쯧-.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요.
그래서 손유진은 회장이 될 날을 고대하며 인사를 하는 거다.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선생님께 배꼽 인사.’
거의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손유진이 꾸벅 허리를 접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유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유진이는 어쩜 이렇게 인사를 예쁘게 잘할까?”
좋아, 긍정적이다.
손유진은 팔을 쭉 뻗어 귀에 붙였다. 손가락까지 쫙 폈는데, 할 말이 있을 때는 이렇게 손을 드는 거라고 유치원에서 배웠다.
“유진이 왜? 선생님한테 할 말 있니?”
마침내.
별렀던 말을 꺼냈다.
“회장 출마한다요.”
“응?”
유치원은 그런 거 안 뽑는데?
***
중학교 학생회장 선출이란, 그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를 체험을 유도하기 마련된 장이었다. 학생들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하여, 학생회장 선거를 한다 해서 특별히 들뜰 이유는 없었다.
선거 당일 오후 수업을 하나 정도 빼고 공약 발표와 투표를 하면 그뿐. 출마자 중에 특별히 인기 있는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나마 인기 있는 후보라면 채규호 정도랄까.
착하고 구김살이 없는 데다, 농구를 곧잘 해서 친구들 사이에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런 채규호가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채규호에게만 강력해 보였지만.
“반장! 출마 안 한다며! 남아일언중천금 몰라?”
“그렇게 됐다······.”
진혁을 찾아온 채규호가 울상을 지었지만, 진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채규호를 외면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자꾸 남의 반 반장에게 반장이라고 부르는 거여?
선거판에서 남아일언중천금이 어딨냐, 이 순진한 녀석아. 제 놈도 전교 1등 운운하며 출마를 부추겨 놓고선, 이제 보니 간을 보려던 거였구나.
“그런데 공약 뭐 걸 거야?”
“비밀 선거 모르냐?”
“그게 뭔 소리야? 투표가 비밀이지 공약은 유권자에게 실행을 약속하기 위해서 선거운동 기간에 널리-.”
오케이, 거기까지. 진혁은 가만히 손을 들어 채규호의 말을 잘랐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녀석이 금을 너무 남발하네. 라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면서였다.
‘짜식, 너무 똑똑해.’
할 말을 잃게 만들잖아.
가만 보면 1학년 때 짝꿍이 된 후로 너무 열심히 가르친 것 같다.
‘검은 머리 짐승 거두는 거 아니라더니.’
머리 검은 짐승이었나?
아무튼, 호르몬이 지배하는 수컷들 사이에서 제법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친구였으나, 진혁은 수다를 즐기지 않는다.
‘피곤하니까.’
아무리 체력을 단련해도 정신적 피로는 쉬이 상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후보들은 한 표를 호소하며 전교를 순회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학급을 돌며 악수를 하는 거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진혁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당선을 자신해서가 아니었다.
‘부끄러워.’
역시 괜히 출마를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진혁이 잠잠하니 으쌰으쌰 하던 학급 친구들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
수업을 위해 입장하는 교사들이 가끔 관심을 보였다.
“여기도 출마하는 놈이 있나?”
“반장이요.”
“음, 그래. 자격이 있지.”
그뿐이었다.
모범생이었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손진혁이 얼마나 아싸인지 교사들도 아는 까닭이었다.
“선생님!”
“어, 왜.”
이승훈이 손을 들자 교사가 턱짓을 보냈다.
“국회의원 선거일이는 하루 쉬는디 왜 우덜 학교는 학상회장 뽑는디 안 쉰대유-?”
“나와.”
얄짤없는 교사였다.
승훈이 저 녀석은 괜한 소릴 해서 처맞는구나.
대나무 뿌리로 만든 지시봉으로 손바닥을 맞는 이승훈을 보며 진혁도 친구들과 더불어 키득거렸다. 무릇 찐우정이란 그런 거니까.
***
드디어 심판의 날이 밝았다.
진혁은 기호 5번이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진혁의 눈에는 멸망의 전조로 비쳤다. 단상에 머물기 싫다는 뜻이다.
‘왜 긴장이 되냐.’
긴장을 풀기 위해 다른 후보들의 연설을 귀담아 들었다. 아무렴, 좋은 공약이 있다면 누가 당선되든 유권자를 위해 이행하는 게 좋을 테니.
그러나 진혁은 다른 후보들의 연설을 들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냥, 어린 친구들이 정치인 흉내 내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고 레퍼토리 때문에.
[제가 학생회장이 된다면, 자판기 음료 판매금액을-.]
저 말은 고등학교 회장 후보도 하던데.
실제로 이행하지는 않는 것 같더라.
[지킬 수 있는 공약만 하겠습니다!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여 우리 태양중학교를 전국 최고의 명문으로-.]
면학 분위기 좋지.
아무래도 저 녀석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닐까.
[도서관의 책을 마음 놓고 대출할 수 있도록-.]
아니, 도서관 책 빌리는 건 의지의 문제지 규제한 적 없을 텐데. 3번 후보는 졸지에 학교를 빌런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학생의 학생회-!]
그 대사 왜 안 나오나 했다.
참을 수 없는 식상함에, 운동장에서 경청하던 모든 학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품을 하거나 발로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등장했다.
청중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세 명의 후보는 신명나는 아무말 대잔치를 벌였다.
기호 4번은 채규호였다.
당선이 유력한 검은머리당 대표.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독차지하는 고등학교 선배들의 횡포를 막겠습니다!]
그러면서 뒤에 있는 진혁을 흘끗 보았다.
어리둥절한 진혁을 외면한 채규호가 계속 힘주어 외쳤다. 변성기가 오지 않아 목소리가 여전히 낭랑했다. 일면 앙칼지기도 한 것이 재규어라는 별명과 어울렸다.
[불량학생 없는 학교를 원하십니까? 흡연과 본드, 가스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원하십니까? 저 채규호는 안전한 학교를 위해 뒤에 앉은 손진혁 후보와 손을 잡고-.]
어이, 어이.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뭔 개수작이냐. 이래서 검은 머리 당대표는-.
와아아아아-!
어라? 그런데 의외로 학생들 반응은 괜찮았다. 특히 1, 2학년들. 아무래도 학교에 다니며 선배들 눈치를 좀 보았던 모양이다.
채규호! 채규호!
채규호를 연호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제라도 기권할까?’
규호랑 후보 단일화라도 할 것을.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진혁의 차례가 되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지만 박수 소리는 다른 네 명의 후보보다 작았다. 그러나 냉대는 익숙했으며 적막은 친숙했다.
무표정하게 마이크 높이를 맞추고 운동장에 모인 친구들과 후배들을 둘러보았다.
자유복 차림의 3학년 동기생들과 교복 차림의 1, 2학년들. 진혁의 1년 후배들부터 교복이 적용되어 발생한 부조화였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단상에 오른 진혁을 보고 있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진혁의 눈에는 그렇게 읽혔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진혁은 볼을 부풀렸다.
‘와씨. 망했나 봐.’
엄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