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31화 (131/338)

< 보내지 못한 계절 (6) >

***

“히이익-! 진혁이가 언제 이렇게 컸다니?”

박재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까무잡잡한 사람이 눈을 그렇게 뜨니 흰자위가 더욱 돋보였다.

변한 진혁의 모습에 경악을 표한 것도 잠시, 반갑다며 진혁의 등을 팡팡 두드린 박재승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동에 한국 신기록이 세 개나 있으니 워쩌겄냐. 육상 특화 핵교라두 되는 줄 알구 사람덜이······. 하이구우-, 직접 찾아오는 사람두 많어이-.”

본의 아니게 원흉으로 등극한 진혁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폐교를 검토 중인 학교에 한국 신기록 간판이 걸려 있었으니. 박재승은 술맛은 좋지만 손님이 없어 폐업 직전인 주막이나 마찬가지라는 표현을 썼다. 신기록이든, 학교 정보든 어차피 알고자 하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전화 문의가 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운동부도 없고 학생은 더 없는 학교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직접 방문한 사람들은 박재승의 외모를 보고는 전학을 결정하기도 했다.

“아주 골 때린다니께.”

박재승 선생은 학부모와 학생 앞인 것도 잊은 듯, 신세한탄을 이어갔다.

“야, 진혁아. 이 선생님 얼굴이 뭐라구 써 있다니? 아니 이 사람덜이 대뜸 날더러 누가 봐두 육상 코치처럼 생겼댜-. 미쳤지, 학교 꼬라지를 보구두 그런 소리가 나온다니?”

박재승은 운동장 구석을 여유롭게 거니는 소들을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언제 봐도 옆집 아저씨 같은 선생님이다.

진혁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만 삼켰다.

누가 봐도 육상코치처럼 생겼어요.

“아, 물르겄다. 일단 오는 학생은 받구 아는 대루 갈치긴 허야지.”

그리 말하면서 박재승은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간식을 구걸하는 장군이 눈빛과 흡사했다.

‘주변인으로서 타인을 돋보이게 한다.’

해가 바뀌어 중학교 3학년이 된 진혁이 스스로 정의 내린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며 삶의 목표로 추가한 문구였다.

게다가 정든 선생님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움 요청을 마다할 성격도 아니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증말여어-?”

박재승이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이들에게 맞는 운동 프로그램, 그게 뭐 어려울까.

이미 유세라가 해외에서 구한 프로그램이 있으니 번역해서 나눠주면 될 것이다. 운동에 재미를 느끼도록 유도하는 코칭 프로그램과 성장을 자극하는 운동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을 아끼는 박재승 선생이니까 잘 가르칠 테지.

진혁의 계획을 들은 박재승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 편한 얼굴이 되었다.

“태양국민핵교이두 애덜이 그렇게 몰렸댜.”

“아, 야구부 때문에요?”

진혁도 들은 바 있다.

태양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생긴다고.

박재승이 손을 내둘렀다.

“것뿐만이 아녀, 이 사람아. 거기두 금메달 땄잖여. 육상이서.”

아, 그랬지.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육상은 비인기 종목인데 그렇게 선수가 몰릴 일인가?

“육상하겠다는 선수들이 그렇게 많아요?”

“진짜배기덜은 한둘이지. 나머지는 기초 쌓구 딴 거 할 눔들일겨. 우리 핵교서는 벌써 체조랑 투포환이루 빠져나간 애두 있어. 충남체중 갔지.”

육상 교육에 기계체조도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려나. 육상이라고 하면 트랙 경기만 떠올리지만, 이렇게 타 종목을 위한 기초를 위해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 선수들도 있었다.

기초 중의 기초 운동. 육상을 했다면 기초 체력과 코디네이션은 갖춰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체조건과 센스가 뛰어난 선수들은 타 종목으로의 변경도 잦았고.

진혁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조슬찬과 염병택이 생각 나서 한숨이 나온다.

‘신체 밸런스가 너무 흐트러졌어.’

그 오다리와 팔자걸음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중학교 내내 자세 교정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진척이 없었다. 아직 관절이 여물지 않아 가능할 듯한데도, 녀석들은 자세 교정을 제안할 때마다 도망을 쳤더랬다.

아무리 친구라도 타인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으나, 녀석들이 운동으로 성적을 내기를 바라는 건 그들의 장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지지리도 싫어하는 녀석들이라 시험을 거쳐 태양고등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학급이 달랐음에도 방과후에 녀석들의 공부를 챙기려 애써 보았다. 그러나 조슬찬과 염병택은 눈으로는 글을 읽으면서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문해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시험문제의 의도 파악을 어려워했다. 진혁이 지켜본 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읽으라고 해도 책 자체를 싫어해.’

아무튼, 학업성적을 기대할 수 없으니 체육 특기생으로라도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친구들은 해맑은 녀석들이라 장래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그나마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겸손한 친구들이었기에 진혁도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세상 모든 이의 수준을 제 눈높이로 낮춰둔 채 무식을 당당히 자랑하지 않던가.

그래도 친구라고, 정이 들었다고 진혁은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성장이었다.

반가웠던 박재승 선생과의 재회를 뒤로 하고 유치원 교실로 향했다.

“부모님들께서는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유치원 선생님도 바뀌었구나. 진혁이 다닐 때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젊은 여교사가 안내를 맡았다.

진혁은 창문 너머로 동생을 지켜보았다.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리거나 처음 만난 친구들을 어색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린아이의 보호자로서 당연히 품을만한 근심이었다.

‘나는 집에서 엄마랑 놀 거라고 울었던 거 같은데.’

일곱 살 진혁은 예비소집을 마치고는 철봉을 했었다. 젊은 엄마의 호기심 담긴 제안 때문이었을 거다. 철봉에 배를 대고 한 바퀴 도는 동작이었는데, 팔에 힘도 없고 요령도 없어서 모래판에 얼굴로 떨어졌더랬다. 철봉에 오르는 걸 도운 엄마가 팔을 뗀 탓이 컸지.

‘엄청 서럽게 울었지.’

그날을 생각하니 코가 욱신거렸다.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기억이 신기하게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처럼 직접 경험했던 일은 작은 힌트만 있어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유영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아들보다 훌쩍 작아진 엄마가 진혁의 손을 잡았다.

“헤에-, 우리 아들 데리고 왔던 거 생각난다.”

스물여섯 나이에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추운 1월에 학교를 찾은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땐 생활이 여러 가지로 지금보다 어려웠을 텐데. 철봉에서 떨어져 울던 기억은 뒤로 밀리고 엄마에게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모자가 손을 잡고 유치원 교실을 지켜보았다.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차례가 지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교실을 돌아다녔다. 유진이는 장난감도 만졌다가, 그림책도 펼쳐보았다가, 이동호라는 아이와 아는 체도 했다.

다른 아이들이 통로를 막은 곳에서는 꾸벅 배꼽 인사를 하고 양해를 구하는 모습이 의젓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나오는 걸 보면 저런 인사법은 아이들이 기본 탑재한 무기인 듯했다.

엄마와 오빠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

한여름에 허름한 집에서 태어난 아기가 어느덧 사회화의 첫발을 내디뎠으니. 함께 낳은 아기라 이거겠지. 그래서 모자의 감정이 다르지 않은 것이리라.

‘이래서야 시집이나 보낼 수 있을까.’

진혁의 가슴이 괜스레 쓸쓸해졌다.

누가 될지 모르지만, 유진이의 배필에게는 쉽게 넘을 수 없는 관문이 솟아 있었다. 복도 너머에서 유치원 교실을 스핑크스처럼 노려보는 관문.

***

다른 아이들의 부모와 눈인사를 나누고, 유진이에게 학교 앞 구멍가게 구경도 시켜준 후 차에 올랐다.

“스쿨버스가 있어야겠어요.”

“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진혁이 때보다 애들이 많은 것 같더라.”

시골의 병설유치원에 원생이 서른 명.

유진이와 같은 방향에서 오는 친구들이 열두 명이나 되었다.

“안마을에서 출발해서 과수원 지나는 코스로 운행하면 되겠어요.”

진혁의 설명에 한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찻길이 위험해서 아이들 통학길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학교에서 운행하는 차가 없는데 미니버스 한 대면 다른 부모들의 고민도 해결될 것 같았다.

“엄마가 집에 가서 아빠랑 얘기해보고 학교에도 연락해둘게.”

그렇게 전달해두면 학교 측에서 각 가정에 연락을 돌리겠지.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마음이 맞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엄마가 유능한 팀원처럼 보였다.

진혁을 태운 차가 시간처럼 시원하게 내달렸다.

***

SSS 요원 네 명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결원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원활한 교대 근무를 위해 충원했을 뿐이었다.

“삼촌은 일 보세요. 이건 제 일이에요.”

“아닙니다. 돕겠습니다.”

경호원이라고는 하나 봄이면 텃밭에서 잡초를 뽑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집에 혼자 남은 한유영이 아기를 업고 낑낑대는데,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경호원들이 아니어도 한유영의 곁에는 장진남과 민용락이 늘 함께했기에 한유영의 시간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사모님은 아기를 업으셔서 등이 볼록한데, 용락 씨는 배가 볼락하네오.”

장진남은 예의 그 이상한 말투를 사용해 수시로 민용락을 놀렸다.

유진이에게도 자주 지적받던 것이었지만, 먹는 것을 좋아하는 민용락에게는 뱃살을 빼는 일이 진혁과 회의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문석일은 진혁이 알려준 대로 해양국립공원 내 무인도에 버려진 훈련시설을 찾아냈다. 그곳을 SSS 훈련장으로 홍기준에게 추천하자,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발전기와 수도시설을 점검하고 생활 비품을 구비하자 바로 사용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진혁과 홍기준이 주문하는 이런저런 일들을 신경 써야 했지만, 문석일은 사회로 나온 후 가장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괜찮으면 가족들도 데려와서 살아. 집 지을 땅은 많아.”

“감사합니다, 형님.”

손광연의 배려로 호형호제하며 지낸 것도 1년 남짓, 읍내에 있던 문석일도 드디어 시골에 내려오기로 했다. 그것보다 문석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하는 가족은 집을 지어 내려오기로 했고, 도시가 좋다는 사람은 강제하지 않았다.

누구나 제가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

문석일이 근처에 살게 된 일은 진혁에게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동생이 생겨도, 아빠가 사장님이 되셨어도, 진혁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삼촌들이 함께 달렸다.

“헥헥-, 쟤 너무 빠르다.”

함께 달리자고 제안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도 몸 관리를 해야 한다며 굳이 진혁이 운동할 때마다 나타나서는 사서 고생을 하는 삼촌들이었으니. 강철 다리를 자랑하는 문석일과 SSS에게도 진혁의 스태미너와 주력은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인랑아, 좀 쉬었다 가자.”

무릎을 짚은 김인랑이 대답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진혁이 어디 갔냐?”

힘든 나머지 땅만 보고 달리느라 진혁을 이미 놓쳐버린 후였다.

헤헤헥-.

힘들어하는 인간들 주위를 장군이와 홍시가 놀리듯 빙빙 돌았다.

장군이의 길쭉한 혓바닥이 ‘나약한 것들’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진혁은 누군가 함께 달리며 운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웠던 옛날처럼 신문 배달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냈다. 아침에 운동하고, 방과후 친구들과 잠시 어울리다 집으로 오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구봉산 정상에 올라 겨울방학 때도 오지 못한 홍수정의 가족을 떠올렸다. 반가운 사람들이라 그랬을까, 얼굴을 보지 못하니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예전엔 알지 못했던 감정이다.

‘수정이 보고 싶네.’

눈썰매 타는 거 좋아하는 녀석이 방학 때 아기하고만 놀아서 답답하지 않았을까.

과거의 꽐라도 생각났다.

눈 오는 날마다 조심스럽게 말했었지.

- “과장님, 명동 가실래요?”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진혁은 적당히 거절했었다.

그때 걘 왜 그랬을까.

명동에 꿀 발라놨나.

***

3학년 1학기 초가 되어 학생회장 선거 일정이 잡혔다.

당연히 진혁은 관심 없었다.

그러나 일부 친구들의 관심은 진혁에게 쏠려 있었다.

같은 반도 아닌 채규호가 찾아왔다.

“반장, 회장 선거 나갈 거야?”

이 자식은 1학년 이후로 줄곧 반장이라고 부른다. 학급도 다른데.

이름을 모르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여드름쟁이 채규호가 큰 눈을 끔뻑였다.

낭중지추라고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친구라서 학생회장에 출마하면 몰표받을 텐데 왜 싫다는 걸까.

“규호가 나가라. 내가 한 표 줄게.”

“난 싫어.”

자기도 싫은 걸 왜 나가라는 걸까.

역시 중딩들은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라고 생각할 때 채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반장이 회장이라도 해서 바빠져야 나도 전교 1등 한 번 해보지.”

그런 이유였나.

역시 이해 못할 종족들이다. 회장을 한다 해서 진혁이 전교 1등을 놓칠 리도 없었지만 전교 1등이 뭐 대수라고 목표로 삼는단 말인가.

사실, 진혁이 출마를 꺼리는 이유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연설도 해야 하고, 공약도 걸어야 하고, 공약 걸면 지켜야 할 거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 측과 교섭이라는 것도 해야 할 터.

초등학교 때야 할 일이 없었으니 그냥 시켜서 했지만 중학교부터는 다르다.

‘귀찮아.’

회사원으로 살 때도 미팅하고, 토론하고, 서로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수 싸움을 했던가. 그걸 학교에서도 하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조일헌이 말했듯.

항상 주댕이가 말썽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