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내지 못한 계절 (5) >
***
해가 지고, 이글루에 방문객이 늘었다.
퇴근한 양강욱도, 문석일을 비롯한 다른 SSS도 진혁이 만든 이글루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걸 혼자서 만들었다고?”
“유진이도 같이 만들었어요.”
혼자서 한나절도 걸리지 않고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규모였으니까.
“자-, 여기 보세요. 김치-.”
민용락은 카메라로 이글루와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시골에 내려온 후 생긴 그의 취미였다.
진혁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과거에도 워크샵을 가면 젊은 사람들끼리 놀라며 팀원들을 찍던 민용락 부장이었으니. 그때마다 진혁은 민용락 부장이 심심할까 싶어 근처를 서성였다. 팀장이라고 불편해할까 봐 말을 걸거나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감방에 배식 넣는 거 같내오.”
장진남은 감자에 곁들여 먹으라며 김치와 동치미도 넣어주고 갔다.
“아지찌도 이거 잡솨라요.”
방문객이 올 때마다 유진이가 감자를 하나씩 건넸기에, 진혁은 계속 숯을 만들고 감자를 구워야 했다. 그 열기에 눈 벽돌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더 단단해졌다.
“하하하! 집들이하는 거야?”
모닥불 주위에 빙 둘러앉은 세 명의 인간과 네 마리의 개를 보며 손광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루의 피로를 잊게 만드는 정경이었다. 그래, 아이들이라도 저런 추억을 쌓고 계절을 느끼라는 뜻에서 일을 벌인 거지.
“아빠도 이거 잡솨라요.”
“고마워, 딸.”
손광연은 껍질이 시커멓게 탄 감자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 자기랑 나눠먹어야지. 껍질은 딱딱하게 탔을지언정 속은 포슬포슬하고 따뜻할 거다. 아빠의 마음처럼.
“진혁아. 이 얼음집 얼마나 갈까?”
감자를 먹느라 입가에 검댕을 묻힌 최미경이 이글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최미경 청소년은 엉덩이 추행범이 손유진이라는 걸 알고는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굳이 사과할 필요 없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 영문 모르는 진혁은 그저 고개만 주억였더랬다.
“올겨울은 계속 추울 거래. 며칠은 더 가겠지.”
진혁은 벽체보다 얇은 천장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부디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버티려나.
꽝꽝 언 저수지도 녹을 땐 하루가 다르지 않던가. 이글루는 눈으로 만들었으니 더 빨리 녹겠지.
“봄까지 안 녹았으면 좋겠다.”
“봄까지?”
최미경의 말에 진혁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친구 최미경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낭만과는 거리가 멀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응. 매일 여기서 유진이랑 개랑 놀게. 고구마랑 밤도 구워 먹고.”
“우와-! 그럼 신났다요!”
유진이도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다.
둘 다 먹거리에 반응을 보인 것 같지만 아무튼.
‘내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이글루인데 무너지지 않고 오래 버틴다면 당연히 건축자가 더 기쁠 일이다.
“오빠가 그케 할 수 있지요?”
“글쎄······?”
난처한 질문에 뺨을 긁자 진혁의 얼굴에도 검댕이 묻었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동생의 눈빛이었으나 진혁이 해줄 수 없는 일도 분명 존재했다. 엘사도 아닌데 어찌 이 겨울을 오래 유지할까.
뚱한 표정을 짓던 진혁이 갑자기 의뭉스럽게 웃었다.
“간절히 바라면 꿈이 이루어진대.”
“간절요?”
유진이는 아직 어린아이다. 오빠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희망을 주고,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던 진혁 나름의 노력이었다.
“응. 우리 유진이랑, 오빠랑 분유 때문에 잠깐 서운했던 적이 있었잖아?”
유진이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서운했었으니까.
“그래서 유진이가 이틀 동안 오빠랑 말도 안 하고 지냈을 때, 어떻게 해서 다시 사이가 좋아졌었지?”
최미경 청소년은 중간에 껴서 눈알만 굴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다 큰 녀석들이 분유가 어쨌다고 이러는 걸까?
“오빠가 유진이 안아줬다요.”
“그랬지. 오빠가, 우리 유진이 웃는 모습이 간절히 보고 싶어서 먼저 말 걸고, 안아 주고 분유도 나눠준 거야.”
“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까.
코를 훌쩍인 유진이는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하다는 말이 이렇게 어려웠던가. 동생에게 잘 설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혁은 뒷머리를 긁었다.
그때였다.
따닥따닥-. 장작이 타는 소리 위에 괴상한 소리가 얹혔다.
그어어어억-.
감자를 세 개나 먹고 배부른 유진이가 내는 용트림이었다.
“어우야-. 아가씨가 그러면 못써.”
최미경이 웃으며 기겁했다.
그러자 유진이가 벌떡 일어섰다.
미안하다고 배꼽인사하려고 그러나?
“에헤헤-. 언니 까까 주까요?”
“응? 까까?”
주머니에 뭐가 있나? 최미경이 상체를 기울여 유진이의 주머니를 살필 때였다.
뽀와앙-.
엉덩이에 손을 가져갔던 유진이가 최미경의 코앞에 손을 들이밀었다.
이내 오동통한 손을 활짝 펴며 웃는 것이었다.
“자요. 방구 까까. 에헤헤헤헤헤-.”
아하하하하-.
잘한다 내동생! 진혁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잔뜩 찡그린 최미경도 질색한 얼굴로 끝내 웃어버렸다.
극도로 예민한 장군이만이 화생방 경보가 울리기 무섭게 이글루를 탈출했다.
밤이 깊었다.
유진이가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최미경 청소년을 바래다주고 돌아온 진혁은 이글루 안에 남은 잔불에 눈을 덮었다.
이제 사람도, 개도 잘 시간이다.
진혁은 장군이네 집도 살폈다. 춥지 말라고 볏단을 층층이 쌓아 입구만 제외하고 사방에서 포위했는데, 네 마리 개가 한데 엉켜 있으니 춥기는커녕 오히려 훈훈했다. 역시 보온에는 짚만 한 게 없다.
“장군이 잘 자라.”
매일 하는 인사임에도 특별했다.
장군이와, 유진이와 더불어 행복한 추억 한 페이지를 더 쌓았기 때문이겠지.
진혁이 장군이 머리통을 쓰다듬는 동안, 유진이는 오빠 눈치를 힐끗 살핀 후 이글루에 손을 얹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조그만 입술을 달싹이는 거다.
“크라츠 라브-.”
쩌저적-.
에헤헤-.
오빠 말이 사실이었다. 간절히 바라니 생각났다요.
눈을 크게 뜬 손유진이 헤벌쭉거렸다.
***
해가 바뀌었지만 이글루는 녹지 않았다.
아무리 추워도 해가 뜨면 눈과 얼음은 녹기 마련이거늘, 신기한 현상이었다.
날이 갈수록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눈이 녹아 누런 잔디가 드러나고 여기저기 때 이른 봄나물이 고개를 드는데도 이글루는 눈부신 자태를 뽐냈다.
장군이를 비롯한 개친구들은 이글루에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했는지 개집을 놔두고 매일 이글루에서 잤다. 춥지 말라고 매일 밤 모닥불을 넣어줬다. 장군이야말로 겨울의 낭만을 제대로 즐기는 듯했다.
늘 귀엽지만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두 갈래로 딴 유진이는 오늘따라 더 돋보였다. 엄마가 단장하는 동안 유진이가 2층에 올라 오빠를 찾았다.
“오빠도 가자요.”
“응. 그럴 거야.”
진혁도 외출 채비를 갖췄다. 외출복이라고 해봐야 청바지에 폴라 티, 항공 점퍼가 전부지만. 짧은 머리에 무스도 발라 나름대로 멋을 부렸다.
‘하아-, 양아치 같네.’
차라리 밀어버릴까. 거울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심, 조심-.”
“네-.”
유진이 손을 잡고 거실로 내려왔다.
엄마는 아직 어린 정원이를 챙겨야 할 테니, 이럴 때 오빠 노릇도 하는 거지.
아빠가 농사만 지을 때였다면 부모님이 같이 가셨을 텐데, 사업가로 변신한 아빠는 매일 공단에 나가 챙길 일이 많았다.
아마 진혁이 없었다면 엄마는 정원이를 업고, 유진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갔으리라.
존재 자체로 도움이 된다는 건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일까.
진혁은 가족 내에서 제 몫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세단을 예열해둔 김인랑이 한유영을 위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반대편 문을 열어 유진이가 타는 걸 도운 진혁도 조수석에 올랐다.
“금방 올 거야. 장군이는 집에 있어.”
월-!
부하견들도 생겼으니 이제 장군이는 함부로 출타할 수 없다.
장군이가 없을 때 순둥이 홍시가 괄시라도 받으면 곤란하니까.
액셀을 밟으며 김인랑이 룸미러를 일견했다.
들뜬 얼굴로 창밖을 보는 일곱 살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 유치원 가는 거 좋아?”
오늘은 유진이의 유치원 예비소집일이다.
“네-. 에헤헤.”
“왜 좋아?”
“친구 많다고 했다요.”
진혁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곧 없어질 학교인데 유진이 친구가 몇이나 될까.
그래도 일곱 명은 넘으니 유치원이 유지가 되는 거겠지.
진혁이 졸업할 때도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제 아쉬움 때문에 동생에게 근심이라도 옮아갈까, 괜히 볼을 부풀려 바람을 조금씩 내보냈다.
예전 같았다면 걸어갔을 텐데, 2차선으로 확장된 도로는 인도나 갓길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차선과 가드레일 사이는 정비되지 않아 버려진 땅처럼 삭은 잡풀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를 택했다.
역시 도로를 걷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예비 원생들도 버스 등 차량을 이용하겠지.
‘원생이 없어서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네.’
학교에 다다를수록 진혁의 근심은 깊어갔다.
오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빠 곰은 뚱뚱해-, 아빠 개는 뚱뚱해-, 아빠 소는 뚱뚱해-.”
쟤는 도대체 누구에게 노래를 배운 거야? 동요라기보다는 차라리 온 세상의 아빠와 전쟁을 하겠다는 군가였다.
이 자리에 아빠가 계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마흔 나이에도 람보 같은 몸매를 유지하는 사람인데, 엄청나게 억울해했을 거야.
잘 닦인 도로 덕분에 5분도 걸리지 않아 학교에 도착했다.
아스팔트가 깔리다니,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였다.
그런데 변화는 도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어-?”
“어머?”
진혁과 한유영이 동시에 꺼벙한 표정을 지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페인트를 새로 칠한 건 그렇다 치고.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요?”
“초등학교 예비 소집도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래서라고 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옷차림도 낯설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사람, 승용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이동하는 사람이 좁은 학교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살핀 인원만 60 명이 넘어보였다.
학교 운동장에 이미 도착한 사람은 제외한 인원이었다.
“우리도 일단 가요.”
진혁은 유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번쩍 안고 싶었지만 유진이도 이제 홀로 서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교문에 안내역을 맡은 교사에게 인사를 했다.
진혁이 가장 좋아하던 최응묵 선생이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
최응묵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몰라보시나?
졸업 후 첫 방문이니 그럴 것도 같았다. 지금도 최응묵 선생의 눈높이가 한참 아래에 있지 않은가.
“아이고-, 진혁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래도 엄마는 알아보시네.
아차 싶었는지 최응묵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진혁을 올려보았다.
“아이고오-! 너였니? 와하하!”
노안이라는 말이 나올까 내심 긴장했으나 그런 말은 없었다.
군인인 줄 알았다는 말은 했지만. 우씨.
“사람이 엄청 많네요?”
“제너럴 패밀리 덕분이지 뭐.”
아, 그제야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농공단지에는 지역민을 위한 일자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리직과 연구직도 있으니 외부에서 인력이 유입되는 건 당연한 수순. 원활한 경영을 위해 홍기준이 유능한 직원들의 선발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제너럴 패밀리의 협력사와, 농공단지에 입주한 타 기업의 직원들도 흘러들어왔을 터.
경력자들이 유입되어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니 어동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이 예상 밖으로 많은 것이었다.
그밖에도 또 있었다.
“전학생도 많아.”
“네.”
그야 당연하겠지.
이미 입학한 자녀를 둔 부모들도 있을 테니.
그런데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육상 제대로 시키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거든.”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