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내지 못한 계절 (2) >
문석일의 손에는 흰 편지봉투가 들려 있었다.
형광등에 비친 실루엣으로 보아 카세트 테이프가 확실했다.
무엇일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정에 심은 사람이 뭔가 건졌구나.’
서울에 다녀온 후 문석일이 찾아왔을 때였을 거다. 의뢰자를 뒷조사해 포섭하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으니 추측이 가능한 사안은 나중에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내용일지 뻔히 짐작이 가능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다른 안건을 먼저 확인해야지.
진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홍기준 아저씨가 뭔가 시키던가요?”
어헛-.
문석일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저승사자 같은 거적데기가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이 애송이는 사람 머릿속에 들어앉기라도 한 것처럼 굴지 않나. 진혁 앞에서 허튼소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 지시하신 게 있는데 의견을 구할 사람이 너뿐이야.”
첫 만남에 경험했고 그 후로도 인정하던 것이었지만, 특별한 애송이가 아닌가. 사실 양강욱에게 물으려다 진혁을 찾은 것이었다. 아무리 영특하다 한들, 정도를 걷던 양강욱에게 물을 만한 사안은 아니었으니.
진혁은 문석일이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이 삼촌은 뭔가 정리해서 말하는 재주는 좋은데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바지 입은 채 똥쌀 수는 없는 노릇. 문석일만의 루틴을 존중하며 기다렸다.
미간을 찡그리고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리던 문석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스 애들을 대폭 늘리려는 모양이야. 지금이야 모두 젊지만 충원이 늦어지면 나중에 공백이 생길 수도 있고, 재력가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요청이 제법 있는 것 같더라고.”
진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지 못하던 시간 동안 홍기준의 행보가 어땠는지 보이는 듯했다. 정재계 인사들과 본격적으로 친분을 쌓기 시작했겠지.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그저 포섭을 하는 방향으로.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만날 수는 없을 터였다. 대정과 인연이 있는 자들은 최대한 걸렀을 것이고, 그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추적과 수집에 능한 정보요원들을 SSS로 위장 스카우트했을 거다.
‘홍기준 아저씨도 대정에 감정이 좋을 리 없지.’
그 약쟁이 놈을 사위로 들일 뻔했으니.
엿 먹이고 싶은 마음은 진혁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건 그렇고.
“제 동의를 구하시려는 건 아닐 테고, 어떤 의견이 필요하신 건가요?”
“은밀하게 진행할 방법. 민 대리를 거치지 않고 내게 직접 말씀하신 이유는 에스가 그만큼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다는 거겠지.”
“이미 외부에도 알려진 보안기업 아닌가요?”
“브이아이피 서비스는 기밀이지. 고객 풀 자체가 협소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저 무도관련자를 선발해 교육하는 상용보안서비스와는 다른 개념이니 이해할만했다.
문석일이 책상의 사탕을 하나 들어 보이며 눈썹을 움찔했다. 설탕이 잔뜩 달라붙은 왕사탕인데, 진혁이 가장 좋아하는 단것이었다.
진혁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손을 내밀었다. 그냥 드시면 되는데 뭘 자꾸 허락을 구하시나.
쯥쯥-.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문석일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한테 에스 애들을 맡겼다고 하던데? 그러니 어려운 건 네게 물으면 책임감을 갖고 의견을 줄 거라고 하시더라.”
“아-.”
분명 그 대가로 달러를 받고 있었지.
그 달러를 구경한 적은 없지만 지급내역서는 매달 등기 우편으로 받는 중이었다. 상당한 금액이었다.
“인원을 확보할 재원이 된다면 많을수록 좋겠죠. 사병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홍기준의 심경을 진혁이 왜 모를까.
전생에 파업하던 노조원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세인기계 사장을 진혁이 두 번이나 구했었다. 경호원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말이 경호원이었지, 그들은 노조의 쇠파이프와 악다구니에 진땀을 빼기 일쑤였다. 여러 사정으로 적극적인 무력행사에 제약이 따랐겠지만, 그들의 실력 자체가 좋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과격 노조원을 진혁이 제압하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진혁도 서울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석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을 오물거리며.
“훈련장소가 문제야. 백 명쯤 계획 중이시던데 여기로 불러들여 곰짐에서 훈련시킬 수는 없으니까.”
“백 명이라······.”
진혁은 턱을 받쳐 쥐고 방안을 서성였다.
비록 합법적 사업체라고는 하나 노출을 꺼리는 사병과 같은 조직이다. VIP 고객들에게는 필요한 인원만 제공하면 그뿐, 규모를 노출할 필요는 없을 터. 철저히 비밀스럽게 다루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펜이 칼을 이긴다지만 펜을 죽이는 것도 칼이지.’
최악의 사태에 대정의 장학생들을 겨누기 위한 칼은 아닐까. 물론, 그 지경으로 치달을 정도면 체제가 붕괴되고 나라가 망할 정도의 사태가 벌어진 후겠지만 말이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전략이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어디가 좋을까.
땅속에 대공동을 조성하는 방법도 있다.
곰짐을 지은 공법이라면 100명은 문제도 아니다. 하나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서는 숙식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돔형 체육관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때 진혁의 뇌리에 과거의 정보 하나가 스쳤다.
“국립공원에 특수부대원들 훈련장 있는 거 아시죠?”
“알지. 너는 어떻게 아니?”
문석일이 놀란 표정도 없이 눈을 꿈뻑였다.
국가 기밀을 신문 일면의 헤드라인처럼 알고 있는 이 애송이에게 뭘 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안흥의 미사일 발사기지가 공공연한 기밀이라면, 국립공원 내 특수부대 훈련장은 극비에 가까웠다. 산중에서 관리 공무원과 관광객의 눈에 띄지 않는 매복 훈련을 포함해 야간 침투 훈련 등, 의외로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훈련을 하는 부대가 꽤나 많았다.
그런 훈련장은 정형화되지 않은 임시 훈련장소인 반면, 숙식 시설을 갖춘 훈련장도 있었다. 그중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며 방치된 시설이 꽤 되었다.
진혁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안국립공원에 무인도가 제법 있을 거예요.”
“어, 그렇지.”
섬 많고 무인도 많은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삼면이 바다에 부속 도서가 3천여 개, 그중 90% 이상이 무인도다.
진혁이 헤헹- 중2 웃음을 날리며 턱짓을 했다.
더 설명이 필요하냐는 뜻이었다.
“가까운 곳에 적합지가 있었구나.”
진혁의 의도를 알아차린 문석일이 수첩을 펼쳤다.
뭔가 적으려던 그는 손을 멈추고 잠시 미간을 모았다. 머릿속에 뭔가 떠오르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나머지 자세한 업무지시를 필요로 하던 팀원들이 짓던 표정, 진혁이 모를 리 없다.
“옛 동료분들한테 정보를 얻으실 수 있잖아요. 폐쇄된 훈련장 위치요. 관광안내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무인도와 교차 검증하시면 될 거예요. 기관과 협의하는 일은 홍기준 아저씨께 맡기시구요.”
문석일의 펜이 슥슥- 춤을 췄다.
역시 직접 생각하는 것보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편하다.
이제 두 번째 안건을 밝힐 차례였다.
문석일은 편지 봉투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꺼냈다.
“신 실장이 보내왔다.”
진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는 바였으니.
미니 컴포넌트에 테이프를 삽입한 문석일이 재생 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똑- 도독-.
가벼운 노크소리, 유진이다.
문석일이 급히 손을 멈췄고, 진혁은 문을 천천히 열었다. 동생이 왔는데 직접 열어주는 것이 진혁이 생각하는 오빠로서의 예의인 까닭이다.
“울애기, 왜?”
“에히히-.”
유진이는 날이 갈수록 엄마를 닮아간다.
총총이 박힌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웃는 모습만 봐도 그렇잖아.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는데, 문석일이 있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분유 달라는 소리구나.’
진혁은 책상 서랍에서 분유를 꺼냈다. 문석일이 보거나 말거나.
“아- 해 봐.”
“아아아-.”
유진이 머리가 컸다면 뒤로 자빠졌을 거다. 그 정도로 유진이는 분유에 진심이었다. 동생이 사레들지 않도록 조심히 분유를 한 스푼 떠 넣었다. 그다음 진혁도 한 스푼 털어 넣었다.
이제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녹이는 거다. 움-, 고소해. 이런 맛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100원짜리 자판기 우유보다 맛있다.
입가에 허연 분말을 묻히고 오물거리는 오누이를 문석일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유를 숨겨두고 먹는 것도 그렇고, 애들이 어디 모자라 보이잖아. 이 집 아이들은 분명 비범한데 예고도 없이 나사 빠진 짓을 한다.
문석일과 눈이 마주친 진혁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 입 드실래요?”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뭐, 불법은 아니지만 당당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특이한 녀석이다.
할 말을 잃은 문석일은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아직 입에 사탕도 있고.
“이제 가서 놀아. 오빠는 삼촌이랑 얘기 좀 하고 내려갈게.”
“네-, 에헤헤-.”
진혁이 동생의 입술에 묻은 가루를 털어주며 말했다.
그 눈에서 분유보다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유진이가 나가고 진혁이 분유를 모두 녹여 먹을 때까지 테이프는 재생되지 않았다.
***
며칠 전 서울.
촤악-!
고급스럽게 꾸민 널찍한 사무실에 조간신문이 날았다.
급히 무릎을 꿇은 신상열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충혈된 눈으로 쏘아보는 박우정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대신했다.
신상열은 소리라도 날세라 눈동자를 굴려 신문을 살폈다.
영농기업, 세인그룹, 홍기준 그리고 손광연.
박우정이 분개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가 금세 조합됐다.
‘망했구나.’
저절로 고개가 푹 떨궈졌다. 그리 좌절하고 있으려니 짜증 섞인 목소리가 신상열의 목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야 이 새끼야! 너는 백영림이가 어쩌다 죽었는지 몰라서 이렇게 처리하는 거냐?”
신상열의 전임자 백영림. 박우정이 항상 가까이 두고 아끼던 직원이었다. 회사는 물론 침실에서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흑막의 비서.
일 처리가 완벽했고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박우정의 비위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나아가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따로 수집해두기도 했다. 박윤영과 손광연을 살인 교사한 증거를 시간순으로 정리해 둔 자료에서 박우정이 폭발했다.
신상열은 그날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백영림처럼 되지 않으려면 탈출구를 확보해야 한다.
“어떻게든 다시-.”
“다시는 새꺄! 대한민국에서 홍기준이랑 붙어먹은 놈을 어떻게 건드려!”
환갑에 가까운 박우정이 우렁찬 목청을 자랑했다.
일시 발생한 이명이 신상열의 고막을 두드렸다.
“후- 씨. 돌겠네.”
박우정이 알기로 대선 자금을 저보다 많이 댄 인간이 없었다. 정치권에 줄을 대지 않기로 유명한 세인그룹이니 당연히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문민정부 들어 정권이 세인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죽하면 금융실명제를 세인이 뒤에서 부추겼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만큼 세인이 깨끗하다는 방증이겠지만.
유명선이 노망이 났지. 근본도 없는 놈을 후계자로 세우더니 마찬가지로 근본 없는 놈들끼리 붙어먹지 않는가. 이래저래 눈엣가시 같은 세인그룹이다.
박우정이 서둘러 혈압약을 꺼내 삼켰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철저히 조사를 해두겠습니다.”
콰앙-!
신상열의 머리 위로 묵직하고 두꺼운 유리 재질 재떨이가 날았다.
뒤편에 있던 화분에 충돌한 모양인데 신상열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떨었다.
“조사는 전략실에 맡길 테니까 너는 그놈 잡아와!”
“그놈이라시면-.”
“이 새끽-!”
박우정이 두 번째 재떨이를 들자 신상열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행히 날아오지는 않았지만 실금할 뻔했다.
백영림도 바로 이 자리에서 재떨이에 머리가 터져 죽어 나가지 않았던가.
“잡아오겠습니다!”
“아니, 됐어. 낯짝 보기 싫으니까 요절을 내버려. 어디 감히 내 돈을 날로 처먹어?”
아, 문석일을 말하는 거로구나.
신상열이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넥타이 품을 거칠게 넓히며 박우정이 이를 악물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병신 같은 새꺄!”
축객령이 차라리 반가웠다.
번뜩 고개를 든 신상열의 눈에 창밖 풍경이 물결쳤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핏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