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25화 (125/338)

< 힐러 (6) >

***

정원이는 분유를 거부했다.

온갖 메이커의 제품을 종류별로 구매해 먹여보았으나 몇 번 빨고는 혀로 밀어냈다. 아기 턱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보며 진혁이 갸웃거렸다.

‘엄마 젖이 그렇게 맛있나?’

맛을 기억하지 못하는 진혁으로서는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분유 텁텁하다요.”

엄마 젖 고갈의 원흉 손유진이 잠시 맛본 분유를 품평했다.

아기에게 일반 흰 우유를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오지 않는 엄마 젖을 빠는 젖먹이를 안쓰럽게 보는 것뿐이었다. 어여쁜 아기가 젖을 탐하는 모습만큼 신비롭고 애정이 솟는 장면도 드물었으나, 그 아기가 지쳐 빼애액 울 때는 온 식구들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 “가물치 푹 고아서 멕여 봐.”

김순복의 조언이었다.

강헌창의 처도 모유가 나오지 않아 가물치를 고아 먹었는데 효과가 좋았다고 했다. 아, 그때 조일헌의 말대로 작은 가물치 몇 마리 챙겨둘 걸. 그러나 뒤늦은 후회였다.

진혁은 강헌창과 더불어 아직 매립이 시작되지 않은 옛 수로 벽을 더듬었다. 물 빠진 수로에 고기가 있을 리 만무했으나, 가물치라는 녀석들은 구멍을 파고 들어가 사는 습성이 있었으니. 진혁은 아직 마르지 않은 곳에 가물치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진혁아. 좀 찾았니?”

강헌창이 물었으나 진혁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가물치가 산을 넘는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녀석들은 사람이 없는 밤에 하류로 이동했겠거니.

“바닥에 있는 게 가물치가 기어간 흔적인가 보다.”

강헌창이 수로 바닥을 가리켰다.

정말 그럴싸했다. 짱뚱어가 갯벌 위를 지나간 흔적처럼 몸체와 가슴지느러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이만 가요.”

두 남자의 수렵활동은 수확 없이 끝났다.

넘실대는 하류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 보였고, 어디에서 튀어나올 가물치를 노리고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넓다.’

구봉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저수지를 뒤져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저수지는 호수보다 넓고 바닥이 고르지도 못했다. 또한 벽면이 석축으로 조성되어 손을 쑤셔 넣기도 불가능하다.

물이 많이 빠진 늦봄이나 초여름이라면 어떻게 해볼 텐데. 장마가 지난 후여서 만수위의 저수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게다가 가물치를 낚을 만한 도구도 집에 없고, 방법도 몰랐다.

“삼촌, 그냥 가요.”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했다.

바쁠 땐 강아지 앞발이라도 빌리라고 했다.

진혁은 장군이에게도 통사정을 해보았다.

“장군아, 가물치 좀 잡아다 주면 안 돼?”

워어얼······.

장군이는 딴청을 부리며 먼 산만 보았다.

아마 알아들었으면서도 물에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닐까. 장군이의 행태를 감안했을 때 충분히 합리적 의심이었으나, 실제로 그리 생각하면 장군이에게 서운해질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집에 들어서니 보리차로 물배를 채우는 아기가 보였다. 아기가 거부한 젖병이 여섯 개나 놓여 있었다.

‘이게 맛이 없나?’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진혁은 젖병을 털어 몇 방울 맛을 보았다.

찹찹-.

‘괜찮은데?’

싱거웠으나 고소하고 향긋했다.

쭈압쭈압-.

애가 탈 정도로 조금씩 나오다가 힘을 주니 제법 먹을 만큼 나왔다.

유진이 말대로 텁텁했다. 그래도 맛있는데?

쭈압쭈압-.

“까하하-.”

오빠가 젖병을 빠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유진이도 젖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쪼옵쪼옵-.

“우움-. 맛있다요.”

유진이는 아예 아기처럼 벌러덩 누워버렸다.

아, 누워서 먹으면 목도 아프지 않고 쉽겠구나!

불고체면한 진혁도 동생 옆에 누웠다.

까르륵-.

얼레? 엄마 품에 안겨있던 정원이가 형과 누나의 쇼를 보며 짧은 팔로 힘차게 활갯짓했다.

눈치 빠른 엄마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읏챠-, 우리 애기도 여기 누나 옆에 누워 볼까?”

뭔가 긍정적인 신호임을 직감한 한유영은 아기를 눕히고 재빨리 젖병을 물렸다.

쭙쭙쭙-.

“옴마나-!”

에헤-.

젖병을 빨던 정원이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아기 엄마들이 껌뻑 죽는다는 그 맘마미소였다.

예리한 진혁도 중요한 순간임을 깨달았다.

“그거 분유 뭐예요? 뭐 탄 거예요?”

“아아-, 거기 왼쪽에서 두 번째.”

엄마의 기억력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일일이 맛을 비교할 뻔하지 않았나. 어른 입맛에는 비슷해서 찾기도 힘든데.

하나 괜한 걱정이었다.

젖병 하나를 비운 정원이가 부족한지 혀를 낼름거렸을 때였다. 유진이가 제가 빨던 것을 물리자, 아기가 거부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정원아, 누나가 먹던 것도 맛있어요?”

아무래도 유진이가 반말을 익히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외모뿐 아니라 말투까지 엄마를 쏙 빼닮았다.

아무튼 한유영은 크게 안도했다. 오늘부터는 다시 편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이 짧은 게 아니었구나······.”

“그냥 모유가 좋았나 봐요.”

진혁의 말에 한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젖을 내어주지 않는 가슴을 원망하며.

“수정이네 엄마는 젖이 잘 나온다던데.”

너무 멀리 있어서 유세라에게 젖동냥도 할 수가 없다.

족발을 먹었다는 말에 족발도 먹고, 돼지족발을 사다가 푹 우려 족탕도 해 먹었다. 그러나 효험은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안심이에요.”

“글쎄······.”

한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주 잠깐일지도 몰라. 은정이 동생 은미가 우리 정원이 같았거든.”

분유를 먹는 것은 배가 고파서 행한 일시적 섭식이라는 뜻이렷다.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분유를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혁은 척척박사 조일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른에게 부탁을 할 때는 직접 찾아가는 편이었으나, 조일헌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 전화로 확인하는 편이 빨랐다.

“저 진혁인데요-.”

- 아이구- 성-.

“아, 하지 마요 좀-.”

수화기 너머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일헌은 진혁과의 형동생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자신이 동생이었음에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가물치 어떻게 잡아요?”

- 봄 아니먼 힘들지. 지랭이 낚시루두 어쩌다 가끔 나오기는 허는디 지랭이는 붕어가 다 따가지.

“방법이 없나요?”

- 저수지 물빼구 투드러 잡든가, 그물 치든가 허야는디 가물치는 그물이두 잘 안 걸려-. 차라리 잉어루 허지 그려?

“잉어는 금방 잡아요?”

진혁은 새 수로에 풀어둔 수많은 잉어를 떠올렸다.

- 한 메칠 낚시 던져두먼 지가 알어서 걸리는 게 잉어니께.

며칠이라면 방학 중에 잡을 수는 있겠다.

- 그런디 약빨 받을라먼 팔십 쎈치는 넘는 눔으루 잡으야여. 암눔으루-.

암컷을 따로 잡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산후조리에 좋다는 뜻이었다.

진혁은 조일헌의 설명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우선 미끼를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탁구공만 한 감자를 삶아 잉어낚시용 바늘을 숨겨 릴낚시에 달아 던져두기.

삶은 옥수수를 바늘에 줄줄이 꿰기.

미꾸라지 통발에 사용하는 깻묵과 떡밥에 황토를 섞어 단단하게 뭉쳐 감자 채비처럼 바늘을 숨기기 등.

- 양놈덜은 옥시시 껴서 후라이낚시라는 걸루두 잡는디, 저수지서 될라나 물르겄다. 낚싯대두 웁구.

당연한 소릴 하고 계시네.

진혁도 플라이낚시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에서 본 것이 전부다.

진혁은 흙집으로 이동해 가마솥에 물을 받았다.

감자와 옥수수를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옥수수를 삶으려니 지난해 조슬찬과 보낸 방학이 떠올랐다. 조슬찬은 할머니를 도와야 한다며 올해에는 놀러 오지 못했다. 진혁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조슬찬은 가끔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시했다.

이제 미끼가 삶아질 동안 낚싯대를 준비하면 된다.

민물 릴낚싯대, 릴, 원투용 묶음추-, 깻묵 반죽도 해야 하는구나-. 중얼중얼-.

“진혁이 뭐하니?”

옛집 창고에서 중얼거리는 진혁을 민용락이 불렀다.

“잉어 잡으려고요.”

“잉어?”

“네. 엄마 몸보신에 필요해서요.”

진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창고를 뒤적였다. 작살은 누가 가져다 놨냐. 활은 또 뭐야? 끊임없이 쫑알거렸다.

“진혁아, 바쁜 건 알겠는데 잠깐 나와볼래?”

“네.”

그제야 진혁이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가물치 두 마리가 단단한 마당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길이는 30센티미터 정도였으나 잘 먹었는지 굵직했다.

그 뒤에는 물에 흠뻑 젖은 홍시와 천마가 칭찬을 바라듯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 영악한 녀석들, 고생한 티를 내기 위해 물기를 일부러 털지 않은 듯했다. 젖은 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장군이가 얘들한테 시켰구나.’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생각났다.

장군이 녀석이 대장노릇하더니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경지에 오른 모양이다.

“장군이랑 광마는 어딨니?”

그때였다.

진혁의 물음에 답하듯 장군이 소리가 들렸다.

왈왈! 아르르르-!

끼이이잉-.

잔디밭 방향이었다.

장군이가 짖는 소리에 이어 주눅 든 광마가 깨갱대는 소리가 들렸다.

“쟤들은 또 왜 저래?”

진혁은 장군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군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자 광마는 수로 쪽으로 재빨리 사라졌고, 장군이 앞에서는 물고기가 한 마리 튀어 올랐다.

‘빠가사리······.’

손바닥만 한 동자개였다.

잘못 잡아왔다고 혼냈나 봐. 진혁은 장군이의 심사를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장군아, 두 마리면 될 것 같아.”

월-!

홍시와 천마가 잡은 가물치가 제법 컸으니 충분하지 않을까.

진혁은 동자개를 연못에 풀어주었다. 쟤도 생명이니까.

가물치가 생겼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깨끗이 씻어 맑은 물에 담가두었다.

물고기 몸속의 뻘이나 노폐물을 빼기 위함이다. 조개를 해감하는 이유와 같았다.

‘어디 보자, 그다음에······.’

요즘 왜 이리 생각이 안 나냐.

민용락처럼 메모를 생활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데 민용락이 마침 수첩을 펼쳤다.

“생강, 계피, 부추-.”

“아, 맞다. 감사합니다.”

가물치는 찬 성분이라서 체온을 올려주는 재료와 함께 고는 것이 좋다고 했다. 비린내를 제거할 깻잎도 챙겼다. 건강원에 보내 즙을 내기에는 애매한 양이니 푹 고아 국을 끓일 셈이다.

‘한약재도 챙겼고.’

진혁이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동안 민용락도 뒤를 졸졸 따랐다.

이 양반, 아무래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인데.

방학 내내 민용락이 이것저것 묻는 통에 진혁은 학교에 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니 웃으며 물었다.

“이번엔 뭔데 그러세요?”

“나······, 옥수수 먹어도 돼?”

진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진혁의 팀원이던 민용락 부장도 하루 종일 군것질을 하지 않았나. 그러다 걸핏하면 장염에 걸리고.

잉어 미끼로 쓰려던 옥수수 냄새에 홀린 모양인데, 가물치가 생겼으니 아쉬울 것 없었다. 마침 솥뚜껑이 들썩이며 허연 김을 내뿜고 있었다.

“드세요. 감자도 있어요.”

부뚜막에 걸터앉아 옥수수를 먹는 민용락을 버려두고 다시 창고를 뒤졌다. 장군이가 또 착한 짓을 했으니 상을 줘야지.

어라, 그런데 망둥어가 어디 갔지?

장군이 주려고 꼬불쳐둔 건데 감쪽같이 사라졌잖아?

‘이 아빠가 진짜······.’

누군지 뻔한 범인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개 간식을 훔쳐먹냐?

역시 비밀창고는 가족과도 공유하는 게 아니다.

***

주전부리가 당기는 계절이 되었다.

시장은 멀고, 동네에 슈퍼마켓도 없으니 손 씨네는 따로 간식을 비축했다. 손광연과 한유영은 자연에서 나는 군것질거리를 선호했고, 진혁은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았다.

‘훔쳐먹어야겠다요.’

가을이 되면 자연히 밤이 길어진다.

유진이는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버렸다.

오빠처럼 크려고 이러는 걸까, 꼬르륵거리는 배 때문에 잠을 길게 잘 수가 없었다. 손유진은 배를 쥐고 찬장을 뒤졌다.

달그락달그락-.

‘이상하다요. 여기 어디 있었는데 사라졌다요.’

무거운 식탁 의자를 발판 삼아 찬장을 뒤지고 냉장고 위쪽도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다. 엄마 젖이 퐁퐁 솟은 후로 분유를 여기 어딘가에 둔 것 같았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색을 포기한 손유진은 후우- 한숨을 쉬고 냉장고를 열었다.

주스를 마시고 싶지만 지금 마시면 속이 쓰릴 거다. 병이 무겁고 뚜껑을 열기도 쉽지 않다. 콜라는 뼈 삭는다며 엄마가 집에 두지 않는다.

우유는 오빠와 장군이가 다 마셔서 없다. 젖소들 같으니.

“히이잉-.”

손유진은 슬펐다.

배고프다며 엄마를 깨우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오랜만에 손가락이나 빨자는 생각으로 엄지를 입에 물었다.

그때 2층에서 내려온 오빠와 마주쳤다.

“유진이 안 자고 뭐해?”

“······.”

손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빠가 분유 다 훔쳐 먹었구나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분유통을 슬그머니 허리 뒤로 숨기는 진혁의 입술에는 허연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걸린 것, 진혁은 소매로 입술을 스윽 닦으며 태연하게 동생을 응시했다. 소중한 동생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먹이 경쟁자일 뿐이었다.

아, 맛있는 걸 어쩌라고.

분유를 한 스푼 퍼먹을 때마다 마음이 안정되고 치유되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혁은 회생 불가능한 분유 중독자가 되었다.

홍수정이 오지 않은 영향이 컸으리라.

진혁과 유진이가 사소한 일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이유 말이다. 큰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끔찍이 아끼면서도, 현실 남매로의 진화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다.

어둠 속에서 대치한 채 한참을 말없이 서로 노려보는 오누이의 침묵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귀뚜라미가 울었다.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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