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22화 (122/338)

< 힐러 (3) >

***

손유진은 아기 때면 아빠를 따라 서재에 가 책을 읽곤 했다. 아빠 무릎에 앉아 읽어주는 걸 들었다는 표현히 정확하지만, 아무튼.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했으나 내용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 내용이었다.

철학적 사고의 일환이겠으나 일부는 동의했고, 다른 누군가는 부정했으며, 혹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그러나 그런 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책은 대부분의 사람이 철학이나 우주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나 많은 이들이 다음에 동의한다고 했다.

‘모든 아기가 하나의 우주로서 탄생한다.’

시간이 흐르며 우주로서의 신비와 힘을 잃는다고.

키가 자라고 체중이 불며 두뇌가 영글고서야 인간의 사고를 시작하는데, 인간은 이를 성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표현은 인간으로서는 옳은 말일지 몰라도 우주의 관점에서는 틀린 표현이었다. 인간임을 자각하는 순간 우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셈이니, 이는 성장이 아닌 약화나 세속화라고 칭함이 타당할 터였다.

배고파서 우는 아기 때문에 잠에서 깬 여섯 살 여자아이 손유진이 산 증인이다.

‘별로 못 잤다요.’

손유진의 기억은 점점 흐려지는 중이었다. 아기였을 때의 기억 말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우주로서 이적을 행했던 기억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기 때 엄마의 병을 고치고, 뱀에 물렸을 때는 스스로 독을 밀어내고 상처를 치료했다. 멧돼지와 사투를 벌인 후 탈진한 오빠의 기력을 무의식중에 회복시킨 일도 있었지.

애틋한 마음으로 절실히 원하니 절로 이적을 행하게 되었지만, 어떤 계기로 그런 신통한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손유진도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던 날이었다. 엄마는 생명력을 잃어가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 엄마의 배 위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태아였던 손유진도 본능적으로 마주 댔다. 청량하면서도 따뜻한, 모순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약했던 손유진의 심장이 강하게 뛰고 발길질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잊어가는 중이라 한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정신보다 강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홍시의 상처와 아기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아기를 살릴 수 있을 만큼은 능력이 유지되어 다행스러웠다.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요.’

하고 싶다고 해도 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능력으로 행한 이적이 아니니까.

손유진도 저만의 재능이 아님을 알고 있다.

오빠의 힘을 빌려 아기를 치료했다. 제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이상한 주문도 그렇다. 닿을 수 없는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마귀할멈 주문 같은 것이었다. 알고 사용한 게 아니라 상황이 되니 저절로 나왔다는 뜻이다.

엄마와 아빠가 사용하는 말을 더 많이 배울수록 아기 때의 일을 잊는 속도가 빨라졌다. 매일 밤 오빠 방을 찾아가는 기행도 이제 하지 않는다. 밀물처럼 들이치는 지식에 밀려, 아기였을 때의 기억은 머릿속 작은 비밀의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똑똑한 아이라 그랬을까, 손유진은 그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점차 인간성을 획득하며.

손유진의 유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 자나 보다요.’

오빠의 므야므야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이상한 힘은 심장이 아닌 다른 신체 곳곳에도 흩어져 있었다. 특히, 아랫배와 머리에도 있었는데, 심장의 힘을 빼내면 온몸에서 심장으로 힘이 흘러들어왔다.

‘에헤헤-.’

오빠도 이럴 때 좀 쉬었으면 좋겠다.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고 학교에 다녀와서도 삼촌들과 회의하느라 바쁘잖아.

엄마에게 안겨 꼬물거리는 동생 정원이를 보았다.

헤에-, 너무 졸려 눈이 오빠처럼 반쯤 감겼지만 손유진의 입은 흐뭇하게 웃었다.

오빠가 당부한 대로 동생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꼬맹이에게 보람이라는 것을 안겨 주었다. 기침하는 엄마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고 칭찬받았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던 아빠가 식탁에 앉은 엄마를 돌아보았다.

“진혁이는 늦잠 자나요?”

“운동 간 거 아니에요?”

“장군이랑 홍시 마당에 있는데요?”

아들이 운동을 갔다면 따라나섰을 개친구들이 느티나무 그늘에 널브러져 있었다. 자전거도 늘 주차하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진혁은 집안에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추리였다.

“체육관에 갔나?”

“날씨 좋을 땐 밖에서 운동할 텐데 희한하네요.”

스르르 감기던 손유진의 눈꺼풀이 아빠와 엄마의 대화에 번뜩 떠졌다.

아닌데요. 우리 오빠 자고 있을 텐데요.

“우리 작은 아들 안색이 변한 거 같지 않아요?”

“하하. 그러게요. 뽀얗던 애기가 발긋해졌어요.”

동생의 변화를 발견한 부모님의 반응에 손유진은 행복했다.

소파에 앉아 위태하게 졸면서도 히죽히죽 웃었다.

이제 정원이가 자라서 흙을 퍼먹겠지.

‘엄마 아빠는 자는 아이에게 맘마를 안 준다요.’

어떻게든 앉아서 버티는 이유였다.

앉은 채 잠을 참으니 숨 쉬는 게 쉽지 않았다. 한껏 가슴을 부풀렸다. 오빠에게서 빼앗은 힘이 아직 남았을까, 심장이 열심히 뛰며 팔다리에도 힘을 나눠주었다. 덩달아 배도 볼록 나왔는데, 맘마를 많이 먹었을 때와는 다르게 쉬 마려울 때 단단해지는 배에 힘이 들어갔다.

꼬르륵-.

‘나도 줘요. 소고기미역국.’

몸조리가 필요하다요.

***

진혁은 침대에 누워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처음에는 심장이 쪼그라든 듯 숨쉬기가 여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손발도 움직이고 가슴과 아랫배도 제 의지대로 부풀릴 수 있게 되었다.

‘코를 거쳐, 뇌로. 뇌에서 가슴으로, 가슴을 거쳐 단전으로. 뱉을 때는 역순으로.’

스으으읍- 후우우-.

평소에는 알아서 되던 호흡인데, 지금은 새로 만든 몸을 얻은 듯 각 부위를 의식하며 숨을 쉬어야 했다. 처음 사용하는 기계를 세팅하는 기분이랄까.

이미지 트레이닝에 숙련된 의식은 생명력 없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점차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손발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괜찮네.’

눈을 감은 채 팔을 주물러 살핀 진혁이 안도했다.

몸의 물기가 모두 빠져나가 마른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는데, 신체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상한 밤이었다.

유진이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잠들었을 뿐인데 컨테이너에 깔린 것처럼 답답했다. 군 시절 5미터 다이빙 풀에 들어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력이 가슴을 짓눌렀다.

‘오랜만에 꿈을 꿨어.’

이제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일부러 눈꺼풀을 닫았다. 꿈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눈을 뜨면 휘발되지 않던가. 꿈을 기억해 내기 위해 감은 눈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냉수를 들이켰을 때처럼 배에서부터 뺨까지 짜르르 올라오는 전류를 느끼며 꿈을 되짚었다.

- 【일어나려 애쓰지 말라. 이 또한 그대를 위한 일이니.】

- ‘뭐가?’

- 【행복한가? 평범한 인간의 삶은 살아볼 만하던가?】

- ‘뭔 소리야.’

- 【가득 찬 포도주 잔처럼 악이 넘실대는 세상이더군.】

- ‘아니야아-. 착한 사람들도 많아.’

- 【하찮고도 하찮거늘, 짧고도 짧거늘.】

- ‘저기요-.’

세종대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주파수가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당최 저 새끼와 소통을 할 수가 없도다.

‘시티폰 같은 놈이었어.’

아니지, 시티폰은 일단 걸리면 쌍방 통화가 가능한데 저놈은 라디오처럼 혼자 종알거리고 튀었다. 쌍방향을 넘어 다중접속 시대가 곧 열리는데, 저놈은 구닥다리 세상에 사는 모양이다.

몇 번인가 들어본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새벽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깨어나려 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위에 눌려 본 경험은 없으나 달리 비교할 만한 현상은 그뿐이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제지했다.

- 【움직이려 애쓰지 말라. 비운 만큼 차는 법이니. 휴식이 활력을 돌려줄 것이다.】

저 그림자는 대한민국 학교를 몰라서 저런 말을 했을 거다.

지각하면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대나무 뿌리로 손바닥을 때리는데 학생이 무슨 휴식이란 말인가. 맞아본 친구들 말로는 더럽게 아프다고 했다. 기분도 나쁘겠지.

그래서.

‘일어나야 해.’

어차피 찜찜한 꿈은 거기까지였다. 더 떠올리려 몽상을 더듬어도 먹지 같은 어둠만 잡힐 뿐이었다.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매일 반복하던 명상이 필요한 순간에 빛을 발한 덕분에 진혁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끈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고 시력도 선명했다.

꼬르륵-.

“엄-, 아빠아아아아아-.”

급히 대상을 바꿨다.

요즘 아침밥은 아빠가 준비하시는데 행위자를 정확히 호출해야 당사자가 서운해하지 않는 법이니까.

벌컥 방문을 여니 온 집안에 진동하는 된장찌개 냄새가 위장을 난자했다. 공기 중에는 지친 영혼을 유혹하는 소고기미역국 냄새도 섞여 있었다.

계단을 딛지 않고 한달음에 폴짝- 거실에 착지해 식탁으로 내달렸다.

식탁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유진이가 화들짝 놀랐다.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이었다.

유진이에게 주기 위해 미역국에 밥을 말던 손광연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늦잠 자는 거 아니었어?”

“밥 먹고 학교 가야죠. 아빠 저 좀 태워주세요. 늦은 거 같아요.”

“뭔 소리야, 오늘 일요일인데?”

와씨.

······ 다행이다.

***

TV 뉴스는 목포 공항 폭탄 테러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안전불감증이 공기처럼 일상인 시절이니 잠깐 더듬거리다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목포 공항에서 김유덕입니다. 테러범의 요구사항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어디 보자, 테러범이라면······.

‘난가?’

사실 진혁은 시간을 정해두고 몇 차례 더 전화를 걸었었다.

수사본부가 꾸려져야 제대로 추적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전화를 걸어 입에 붙지 않는 북한 말씨를 흉내 냈다.

입에 붙지 않는 욕설도 적절히 섞었다.

- “남조손 개대가리들이 이 몸을 찾을 수 있갔어? 요오구사항? 기런 거 일 없다. 고조 오무림살에 힘 풀려 똥이나 갈기고 뒈지라우-.”

쩝. 좀 부끄럽구먼.

진혁은 제가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진짜라면 큰일이네요. 그런데 공항에 폭탄을 설치할 수가 있어요?”

“사람이 마음 먹으면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어요?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지방의 소형 공항이라 침투가 용이했다고 보는 모양이에요.”

부모님의 대화를 애써 외면하며 진혁은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했다.

세상 소중한 유진이가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기에 품에 안고 다독였다. 오랜만에 안기는 오빠 품이 포근했을까, 유진이는 진혁의 목을 끌어안고 고로롱- 코를 골았다.

“진혁이 방학이 이번 주지?”

“네.”

“그럼 내일 바로 시작해야겠네.”

“뭘요?”

“수로 옮긴대.”

기존 수로의 물을 양수기를 이용해 신규 수로로 끌어 옮기는 일을 뜻했다.

논에 물을 최대한 댔고, 더이상 대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이용하려니 여름방학과 맞아떨어졌다. 더 더워지기 전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기존 수로를 덮는 공사에 착수할 수 있다.

“방학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코를 골며 종종 꿈틀대는 유진이가 깰까, 진혁은 목마처럼 앞뒤로 움직이며 물었다.

“고기 잡을 텐데 학생들이 빠지면 섭하지.”

“와-.”

재밌겠다.

아마 아홉 살 때 딱 한 번 해봤던 것 같은데.

수로 준설공사를 하기 위해 물을 모두 뺐을 때 마을회관 방송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붕어와 가물치 등을 잡으러 몰려갔었지.

‘너무 오래 돼서 가물가물하긴 한데, 재밌었던 것 같다.’

아홉 살 여름방학 때면 전생의 기억이다. 또렷이 생각난다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었다.

“내일부터 물 빼는 거예요?”

“그래야겠지. 집집마다 양수기도 동원해야 하고, 호스도 다 끌어와야 할 거야.”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마을 행사요, 축제였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진흙 바닥에 뒹굴며 즐거워하는.

‘SSS도 좋아할 거야.’

공 하나만 있어도 즐거워하는 게 남자인데, 물 빠진 수로에서 펄떡이는 활어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평화로운 전원생활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몸이 근질거려하는 지 아는 진혁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장진남도 요리를 하다가 뛰쳐나와 허공에 주먹질과 발차기를 하고, 문석일과 양강욱은 곰짐에서 살다시피 한다. 휴무일인 요원도 일부러 와서 수영을 가르치고 홀로 매트에 낙법을 꽂곤 했다. 덕분에 거대한 곰짐은 썰렁한 날이 없었다.

“팔월 초에 하면 안 될까요?”

“응. 이 주 정도 연기는 가능할 거야. 그런데 그건 왜 그러니?”

7월 말에 뭔가 있는데,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겠어요.

그뿐 아니다.

가슴 언저리에 머물던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8월 초라는 말을 뱉자 씻은 듯 사라졌다. 정수리가 따끈하게 달아오르면서였다.

‘연기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오랜만에 발현된 육감이었다.

무의식의 명령이라 칭하면 될까, 낙지를 사러 육성찬네 가던 날과 비슷했다.

홀로 뚱한 얼굴을 만든 진혁을 손광연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대화 중에 딴생각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빈도가 높아져 걱정이다.

“아들?”

“그냥······요.”

진혁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의 전화기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테러범으로 지목되는 일이 있더라도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뿌듯혀-.’

케케묵은 상처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장난전화 등의 과정을 거치며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은 저를 위한 위로를 구하는 여정이었다.

물론, 사회 규범적 측면에서 본다면 당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엉뚱한 일탈이지만.

헤헹-. 일탈에 걸맞은 웃음을 만들어 보았다.

이제 야비한 미소도 제법 그럴싸하다.

최미경 청소년 똥꼬 막히라고 저주했을 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그 후 몇 번의 장난전화를 거치며 중2 감성을 깨우치는 중이다.

한번 더. 헤헹-.

손광연이 찡그린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진혁이 어디 아프니?”

중학교 2학년만 되면 남자아이들은 맛탱이가 간다더니, 드디어 내 자식에게도 올 게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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