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20화 (120/338)

< 힐러 >

***

문석일이 구해준 보안 전화기는 독특했다.

아니, 유니크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였다.

우선은, 발신만 가능하다는 점이 특이했다.

20세기 말 반짝 등장했던 시티폰이라는 녀석과 비슷한 셈인데, 시티폰처럼 공중전화 박스 근처를 서성이며 통화할 필요는 없었다.

음질이 선명하지 못하고 지직- 끓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이제까지 통화 상대는 문석일과 김인랑뿐이었으니 관계없지만, 아무튼 통화 품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 진혁과 문석일이 함께 수로변 우레탄 트랙을 걸었다. 올해 농사에 물이 필요했기에 기존 수로를 이용하느라 신규 수로에는 물을 채우지 않았는데, 덕분에 수로 바닥에 풀이 시퍼렇게 퍼져 황량함이 덜했다.

진혁이 전화기를 보며 말했다.

“신기해요. 이런 기술이 있다는 게.”

“음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별의별 짓을 다해야 하지. 나도 원리는 몰라.”

문석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국 시애틀 모처에서 보안 위성전화기로 개조한 노키아 1011이라는 휴대전화를 구한 다음, 국내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청계천 전파상에서 한 번 더 개조했다.

“청계천에서 그런 일도 해요?”

“돈만 주면 총 부품도 만들어 준다. 구해서 조립만 하면 돼.”

허어-, 진혁이 영감님처럼 구성진 감탄사를 냈다.

그 외에도 전화기가 특별한 이유는 더 있었다.

“정말 추적이 안 돼요?”

“못한다는 게 정확하지.”

문석일은 북한을 거쳐 발신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주파수가 어쩌고 아날로그가 어쩌고 하는 말을 하던데, 이용법은 해박해도 전문지식은 없었으니 진혁의 모든 물음에 답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한번 질문이 시작되면 끝없이 쏟아낸다. 대답하느라 진땀을 뺀 문석일로서는 더욱 과묵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전기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진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를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최근 민용락과의 대화 주제가 떠올랐다.

지난해 서경이동통신이 발표한 휴대전화 가입인구는 전국 8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700그램이 넘는 벽돌 전화기를 사용하기 위해 기기 값과 개통요금을 합해 500만 원이 넘는 거금을 지출해야 했는데, 서울 외곽지역 전세금과 맞먹는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물가가 어떤지를 떠나, 서경이 이동통신사업자를 포기하고 세인텔레콤이 태동하도록 기여한 지표이기도 했다. 세인 그룹의 자산을 많이 떼어준 덕도 있을 테지만 서경이 사업성을 속단한 덕도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대정과 서경이 후속 단말기 개발에 난항을 겪었고, 그 배경에 홍기준의 공작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은 오직 진혁만이 짐작할 수 있었다. 홍기준이 세인전자 사장이 된 후 1년 동안 세인은 타사의 핵심 엔지니어들을 거액으로 스카우트 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삐삐 시대도 금세 지나갈지도 몰라.’

민용락에게 듣기로, 세인전자와 세인텔레콤은 이미 디지털 기반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CDMA 어쩌고 하던데 전문가가 아닌 민용락은 그저 통신기술인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넘어갔다.

단말기 소형화 계획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다른 업체들을 아예 구닥다리로 만들 생각이신 거야.’

간단한 방법이었다.

타 업체 기종이 먼저 시장에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획기적인 상품을 대량으로 유통한다. 그리되면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기존 업체들은 재고를 어쩌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일 터.

‘흡수하는 거지.’

공격하지 않고 내상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달리기 시합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웠다. 어른이 뒤에서, 늦게 출발하지만 결국은 앞질러 버린다. 실력이 비슷한 수준의 기업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신제품을 내보이려 경쟁하는 것이 정상이겠으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경쟁자를 망하도록 만드는 좋은 수가 있는데 굳이 출혈경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진혁의 눈에는 이미 세계정복 작업에 착수한 홍기준의 움직임이 보였다. 진혁의 눈에만 보이는 행보였다.

“저는 민 대리님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요.”

곰짐 앞에서 문석일과 헤어져 잔디밭을 걸었다.

왼뺨에 꽂히는 따가운 여름 햇살을 군데군데 심어진 느티나무가 적당히 막아주었다.

민용락을 만나기 위해 두더집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동네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 중 한 명인데, 장진남을 도와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 외에는 평상에서 유진이에게 숫자나 글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삼촌은 왜 배가 나왔어요?”

“앗! 아아-.”

가르치는 시간보다 유진이에게 지적받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사실에 기반한 비난이라 민용락은 늘 말문이 막혔다.

“숫자 ‘오’는 왜 에스랑 비슷해요?”

“아아-.”

답하지 못할 질문이 너무 많아 땀이 흐르고 절로 살이 빠졌다.

민용락이 저러는 것이 자신을 만나기 위한 것임을 진혁이 모를 리 없었다. 이성에 대한 눈치는 개구리 오줌만큼도 없지만, 비즈니스상 목적을 가진 사람의 눈치는 빤한 법이니까.

“대리님, 수첩 바꾸셔야겠네요.”

활자가 빽빽이 들어찬 민용락의 수첩을 보며 진혁이 투레질을 했다.

메모 습관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뭔가를 늘 머리에 넣고 다니는 진혁으로서는 익숙지 않은 습관이었다. 과거의 사건 사고도 조금씩 기억날 때마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해 선명성을 확보할 뿐, 따로 메모를 해두지는 않았다. 그런 메모를 다른 누군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조심해야 했다.

“지에스엠은 굳이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기계도 그래요.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르면 빠른 대로 기기 개발을 거기에 맞추는 게 시장 선도 전략 아닐까요?”

국내에 도입하지 않은 GSM이라는 이동통신 시스템 규격 도입을 세인텔레콤이 고민 중이라는 메모에 대한 답이었다. 메모 옆 괄호에는 국회의원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볼 때 정치권에서 요청이 온 모양이었다.

용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민용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너는 이 말뜻을 다 알고 있는 거니?”

“아뇨.”

진혁의 입에서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실제로 모른다. 그런 시시콜콜한 용어까지 모두 알고 살면 컴퓨터지 그게 사람인가.

뜻도 모르는데 어떻게 의견을 낸다는 거지? 민용락의 눈썹 높낮이가 틀어졌다.

“미지수로 놓고 보는 거죠.”

“미지수?”

“모르는 말은 일단 방정식처럼 엑스, 와이로 제쳐두고 다른 말을 먼저 보는 거예요.”

민용락의 얼굴이 점점 꺼벙하게 변했다.

진혁의 설명이 이어지자 민용락이 당겨 앉았다. 손에 든 볼펜을 고쳐 쥐고서.

“전문적인 것까지 자세히 알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어서 좋겠지만 의사 결정할 때는 방해가 될 수도 있잖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파고들다가 논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고요. 결국 답은 예스, 노 둘 중 하나고 수익이 발생할까, 아니면 손실일까를 고민하는 게 사업가의 영역이잖아요. 기술이 어쩌고 하는 건 엔지니어의 영역이고, 편리성이 어쩌고 하는 건 포장해야 할 홍보담당자들 몫이죠.”

진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 민용락이 쓱쓱- 메모하며 고개를 갸웃댔다.

의외로 진혁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과학고를 졸업한 사촌 동생을 보는 듯 익숙했다.

진혁이 수첩을 가리켰다.

“여기 보면 퀄컴에서 개발한 디지털 이동통신방식 씨디엠에이? 세인텔레콤에서 이미 도입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유럽방식을 더 들여올 필요는 없잖아요. 지에스엠을 제안한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건 홍기준이 자신을 테스트하는 자료다. 진혁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시류를 따르지 못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짓을 곧잘 하는 정치인이 실적을 위해 기업에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여, 어쩌면 정치인과 척지지 않고 거절할 방법이 필요한 건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진혁이 알기로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적절히 협상하는 능력으로는 홍기준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실력만 보자면 지구 최고의 외교가가 따로 없었으니까.

“-일단 시작했으니 완벽을 꾀해야겠지만 지금은 외연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해 보이네요.”

테스트가 확실하다. 그룹사 재편이라는 이름으로 불완전하게 서술된 M & A 자료를 보며 진혁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홍기준은 알아들을 텐데 민용락에게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 홍기준이라면 앞으로 닥쳐올 금융위기를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공격적 인수합병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때가 되면 공룡들도 알아서 휘청이게 된다. 막말로 대정의 주력사도 한 개쯤 삼킬 수 있을 텐데 무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단꿈을 꾸고 있을 대정을 21세기에서 지우는 것도 괜찮겠네.’

세인중공업과 세인기계, 세인케미컬까지. 반도체 생산공장 신축부터 설비, 약품 개발 차트를 보면 홍기준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느하아아아-.

곁에서 듣던 손유진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빠 또 재미없는 얘기한다요.’

오빠가 민용락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유진이는 홍시 털을 빗겼다. 겨울에 태어난 홍시는 훌쩍 자라 어미인 장군이는 물론, 최미경 언니네 누렁이보다 덩치가 커졌다. 더울 때면 장군이가 홍시 가슴 밑에 들어가 볕을 피하기도 했으니, 홍시가 어미로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도 빗질을 하는 동안 장군이는 홍시 가슴 털을 물고 장난을 치잖아.

“홍시 털 길어요. 장군이보다 더 길다요.”

외모도 서울에서 봤던 뽀미와 똑같이 생겼다.

조일헌 아지찌가 그랬다.

- “홍시는 장군이 어미랑 똑같이 생겼네이-.”

똥개에게서 리트리버가 나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어디서 남의 강아지 주워온 거 아니냐는 말도 했다. 그러다 장군이에게 종아리를 물리고 절뚝거렸지. 홍시는 순하지만 장군이는 맹견인데, 몸집이 작으니 동네 아저씨들이 무시하다가 자주 응징을 당하곤 했다.

‘장군이 무시하는 아지찌는 호- 해주지 말아야겠다요.’

한참의 빗질이 끝나자 털망나니 같던 홍시가 귀족적인 자태를 뽐냈다.

어디서 놀다가 다쳤는지 콧잔등의 생채기가 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손유진은 오빠와 민용락을 힐끗 본 후 홍시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손이 따뜻해지며 온기가 홍시에게 건너갔다.

‘에헤헤-.’

헤헤헥-.

말끔해진 상처를 보며 히죽 웃자 홍시가 유진이의 코를 핥았다.

낑낑-.

바짝 엎드린 장군이가 눈알만 위로 굴려 애처로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앞발을 내미는 것이, 거기가 아프다는 소리 같았다. 여태 멀쩡하던 녀석이 왜 이래?

‘두 번은 안 되는데요.’

난처하네요.

이럴 땐 방법이 있지.

입술을 비죽 내밀어 손바닥을 조준했다. 눈이 가운데로 몰림과 동시에 입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투-. 무상 할매의료.

***

가족이 늘어 일요일에도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유진이를 가장 중요하게 챙겼다. 정원이는 아직 갓난아기라서 엄마 품에서 살아야 하니까.

아기 옆에서 까불다 잠든 유진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고 옥상에 올랐다.

보는 사람은 없는지, 듣는 귀는 없는지 주위를 살피고 전화기를 꺼냈다.

7월 들어 늘 하는 일이 있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는 중에 전화기 건너에서 젊은 남자 음성이 들렸다.

진혁은 재빨리 입을 오리주둥이처럼 만들고 목구멍을 열었다. 아래턱도 살짝 내밀었다.

“거-, 목포오- 공항이네?”

정상태에게 배운 북한 말씨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적절히 섞인 잡음과 변조한 목소리가 진혁을 제대로 숨겨줄 터였다. 위치 추적은 당연히 불가능할 테고.

“내래 목포오- 공항에. 포옥탄을 설치해소.”

장난 아닌 장난전화를 하자니 가슴이 두근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목포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막아야 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여름방학을 전후로 해서 사고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내 무더운 날씨를 유지하다가 방학을 맞은 주말에 비가 내렸고, 신문에 난리가 났었다. 받은 충격이 컸기에 계절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니런 개대가리 같은 썅간나가 사람 말을 코로 듣내?”

진혁은 어느새 저를 쫓아와 얌전히 쪼그려 앉은 개 친구들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장군이나 홍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정상태에게 배운 욕설이 이것뿐이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경찰이든 군대든 진혁의 신호를 추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추적이 불가능한 인물임을 알고 경각심을 가진 당국에서 공항 폐쇄든 무슨 조치를 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이용객들에게는 미안해요.’

남북 경색? 신경 쓸 필요없다. 어차피 양측 모두 전쟁할 마음이 없고 테러 증거도 잡지 못할 테니. 증거가 나와도 섣불리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관계 아니던가.

그나저나 큰일이다.

‘와씨, 레퍼토리 떨어졌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때였다.

- 왱알앵알······.

옳지, 전화기 너머에서 요구사항을 물어왔다.

어라? 그런데 뭘 요구해야 하지?

대본 없이 하려니 테러범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아휴-,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이럴 땐 방법이 있지.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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