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18화 (118/338)

< 가족이라는 특명特名 (5) >

***

새로이 막대를 깎을 시간은 없었다. 쏙은 썰물 때만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이제 곧 물이 빠지기 시작할 텐데 한가하게 몽둥이나 깎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영구네서 빌려 가자고-. 뿌러지먼 새로 하나 맨들어주먼 되는 거여-.”

“예.”

대바구니 두 개를 들고 조일헌의 스쿠터 뒷자리에 앉았다.

오애앵앵앵-.

진혁까지 장정 둘을 태운 스쿠터가 힘겹게 오르막을 올랐다. 소형 단기통 엔진이 태우는 휘발유 냄새를 맡으며 오르막길 끝자락에 오르니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변한 게 별로 없어.’

진혁의 고향은 수로와 잔디밭 공사를 제외하고는 어릴 적 뛰어놀던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끔 버스를 타고 고향을 찾았었다. 집과 부모님, 장군이, 그리고 최미경의 가족을 그리워하던 과거의 중학생 때 일이다.

그때는 개발로 야산이 파헤쳐졌는데, 진혁이 뛰어놀던 뒷산도 마찬가지였다. 펜션인지 리조트인지를 짓는다며 여름마다 사슴벌레를 잡던 참나무도, 가을에 밤을 줍던 밤나무도, 겨울에 삭정이를 꺾던 소나무도 힘없이 넘어갔다.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미경이와 전쟁놀이를 하던 멋들어진 바위가 마구 깨져 나갔었다.

‘미경이랑 바가지 쓰고 총싸움도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진혁이 좋아하는 뒷산도, 저수지와 개울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 늘 스스로 그러했던 것처럼.

‘아빠가 땅을 안 파시니 변하지 않는 거구나.’

손광연은 산과 바다, 들이 어우러진 두내리의 경관을 사랑한다며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생산성 없는 야산도 매입했으며 팔지 않는 거라고.

한 사람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육성찬네 집에 닿으니 작년 가을 고폭탄 사건이 떠올랐다. 육성찬네 집 대문은 말끔하게 수리가 되어 있었다.

오토바이를 손보느라 얼굴에 검댕을 묻힌 무면허 육성찬 청소년이 반겼다.

“아저씨 안녕하세유-.”

“야! 이늠 시꺄! 장개두 안 간 성한티 아저씨가 뭐여!”

짐짓 화난 표정으로 조일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일헌은 동네 족보를 개판으로 만드는 교란종이었다. 나이가 많아서 남자들 대부분이 조일헌에게 형이라고 하는데, 조일헌은 미혼임을 강조하며 그들의 아들과 딸에게도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라 강요했다.

“아-. 일헌이 형이 식전부터 어쩐일이시래유?”

“이이, 그려. 거 승찬일랑 광이 가서 주옥같이 생긴 작대기 좀 갖구 오너.”

“아, 뻥설기 잡을라구유? 잠깐만유-.”

육성찬의 뒷모습을 보며 진혁은 고민에 빠졌다.

아빠도 조일헌에게 형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조일헌은 육성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혁에게도 호형을 요구했다.

‘그럼 아빠는 내게 아빠인가, 작은 형인가.’

답이 정해진 문제였으나 동네 아이들 누구나 했을 법한 고민이었다.

족보 교란종 조일헌에게 호칭을 붙이지 않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단도직입적인 대화를 좋아하는 진혁에게는 쉬운 일이다.

“성찬이네 아저씨는 오늘 설기 잡으러 안 가신대요?”

진혁의 물음에 조일헌의 얼굴이 심술궂게 일그러졌다.

조일헌은 이내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영구가 어제 묶었댜-. 그눔두 인제 고자여.”

“아-.”

그럼 무리하면 안 되지, 암.

근데 그거 많이 아픈가?

언제 봐도 해맑은 육성찬이 설기 작대기를 곤봉처럼 휘두르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반장두 설기 잡으러 가는 겨?”

“응.”

“반장은 잘헐 겨. 다 잘허니께.”

해가 바뀌며 같은 반이 된 육성찬이 코를 슥 훔쳤다.

중학교도 이제 2학년인데,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친구들은 진혁을 반장이나 회장으로 부르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전생엔 안 그랬는데. 내가 너무 애늙은이처럼 굴어서 그런가?’

조슬찬만 해도 그렇다.

이름대신 대장이라고 부르는 걸 즐긴다. 아마도 친구들이 저를 대하기 어려워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진혁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

뽀옥-! 뽁!

조일헌은 빠져나가는 바닷물을 따라가며 구멍을 쑤셨다.

확실히 척척박사라는 별호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이론도 해박하고 실기에도 능했다. 그가 쑤셔 넣은 막대기를 확 잡아뺄 때마다 설기가 한 마리씩 구멍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진혁조차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와-! 신기해요.”

“사내 자석으루 태어났으믄 이 성처럼 잘 쑤시야 허능겨-.”

진혁으로서는 은근 자격지심이 드는 발언이었으나 서로 미혼인 처지에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진혁은 터져 나오는 불만을 억누른 채 작업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 집중했다.

‘꽉 틀어막은 다음에 역압을 주는 거구나.’

사물과 현상을 분석하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진혁이다. 단순한 작업 원리쯤 터득하는 건 껌이었다.

뻥-! 한차례 물줄기가 솟았다.

과연, 흙집에 살 때 마당에 있던 수동 펌프를 연상케 했다.

“구녁이 이렇게 생겼어. 구녁 뭇 찾어두 뒤여. 이놈들이 숨쉴 때 뻑뻑- 소리나니께, 소리 나는 디루 가먼 구녁이 보이니께잉?”

“예.”

“인쟈 해 봐. 이 성이랑 내기허는 겨.”

“내기요?”

아, 내기 싫어하는데.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라 진혁은 뒷말을 삼켰다.

조일헌이 실실거렸다.

“쯕게 잡는 늠이 지는 겨.”

당연히 그렇겠지. 많이 잡는 사람이 지는 내기가 있을까.

“근데 내기 보상은 뭘 걸어요?”

“형이라고 불르는 겨.”

조일헌의 눈이 빛났다.

둥글둥글한 성격 속에 예리함을 감추고 있었으니, 진혁이 형이라는 호칭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놈의 형 소리가 뭐라고 내기까지 건단 말인가.

한데 진혁으로서는 아쉬울 것 없는 제안이었다. 형이라 부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조일헌도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 생각했으니 그런 내기를 걸었을 테고.

“자! 요이- 땅!”

조일헌이 기세 좋게 외쳤다.

진혁은 조일헌에게 배운 대로 주옥같이 생긴 막대기를 구멍에 넣었다가 확 잡아뺐다. 밀어 넣을 때는 비비듯 돌리며 천천히, 뺄 때는 단박에!

뻑-! 좌악-!

뻑! 뻑! 뻑!

촥! 촥! 좌악-!

갯벌 여기저기서 쏙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녀석들은 펄 위에 뒤집혀 버둥거리다가 진혁의 손에 잡혀 대바구니로 들어갔다.

‘월레?’

처음 보는 광경에 조일헌의 아래턱이 덜컥 내려앉았다. 갯벌 속에서 누가 던져주기라도 하는 듯 설기라는 놈들이 날아오르잖여. 얼레? 저건 게 구멍인디?

뻥-! 게도 날아올랐다.

구멍을 가리지 않고 쑤셔대는 중학생을 보며 조일헌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시벌거 이거······. 쟤한티 성이라구 불르게 생겼는디?’

조일헌은 급히 구멍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잘만 보이던 구녕이 다 어디루 사라졌다냐, 허망한 중얼거림과 함께.

으흐흐흥-.

중학교 2학년의 호연지기가 이런 것일까, 진혁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형이라고 안 부르기만 해 봐라.’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마을회관에서 안내 방송해야지.

진혁은 대바구니에 절반쯤 찬 설기를 그물에 옮겨 담고 다시 가열하게 작대기를 쑤셨다.

뽁-! 뽁-! 뻑! 뻥-!

***

툴탈탈탈탈-.

아무리 바빠도 가족이 먹을 양식은 직접 농사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손광연이 관리기를 몰았다. 홍시를 안은 유진이가 아빠 무릎에 앉아 진동을 즐겼다. 중형 관리기의 성화에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갈색 흙이 곱게 부서졌다.

“뭐하러 나왔어요?”

고랑을 파고 두둑을 쌓아 밭이랑 만들기를 마친 손광연이 걱정스레 한유영을 보았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아내가 주섬주섬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저도 심을래요. 움직여줘야 건강하죠.”

“그래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요.”

한유영은 간혹 보이는 작은 돌을 골라내고, 반으로 갈라 재를 묻힌 씨감자를 하나씩 묻었다.

“나도 심어야지.”

유진이는 언젠가부터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의문형 말투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데, 서서히 자아가 확립되는 과정인 듯했다.

유진이는 엄마가 하는 것을 보고는 어설프게 따라 했는데, 손광연은 묵묵히 뒤를 따르며 딸이 엉터리로 묻은 것을 제대로 심었다.

장군이도, 홍시도 주둥이로 땅을 팠다. 사람들이 하는 걸 흉내 내는 모양새였는데 개가 왜 앞발을 두고 주둥이로 땅을 파는가 하는 점은 몇 년째 의문이었다.

코와 수염에 흙을 묻힌 장군이를 손광연이 불렀다.

“장군아. 너는 왜 코로 땅을 파니?”

네가 그렇게 파니까 홍시도 따라 하잖아.

월-.

뭐라는 거야······.

지식인이자 서울 사나이인 손광연도 개 언어는 알아듣지 못한다. 재영이네 도사견은 목줄 풀렸을 때 마늘밭을 덮은 짚을 다 파헤쳐놨다고 하던데, 장군이는 심어둔 감자를 물고 튀지 않으니 그나마 농사 머리는 있는 개라고 해야 할까.

“코로 파면 흙이 안 도망친대요.”

유진이의 통역에 손광연과 한유영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설마 우리 딸은 개소리를 알아듣는 걸까?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배시시 웃는 딸을 보며 부부도 피식 웃고 말았다.

여섯 살, 드디어 딸도 유머 감각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진혁이도 저 나이엔 허황된 말을 많이 했지.’

구봉산 꼭대기에 가서 하늘 껍데기를 벗겼더니 시커먼 우주 공간이 나왔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던 것이 진혁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하늘 껍데기에는 그물 같은 줄도 그어져 있었다고.

책에서 본 지구본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헛소리였을 거다.

손광연이 검은색 코가 갈색이 되도록 같은 자세로 흙을 파는 장군이와 홍시를 보았다.

‘흙이 안 튀긴 하네.’

흙이 부드럽게 밀릴 뿐, 앞발로 팔 때처럼 정신 사납게 튀는 일이 없었다. 개 코와 주둥이에 흙 묻은 모습은 언제 봐도 웃음이 나온다.

쿡쿡거리며 웃고 있는데, 반팔 티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른 근육남 장진남이 나타났다.

“사장님, 저도 도울개오.”

“그래요. 같이 하면 좋죠.”

SSS에게는 일부러 도울 생각 말라고 했으나, 함께 먹을 양식이니 좀 거드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 생각하며 장진남을 따라온 민용락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근데 진혁이가 안 보이내오?”

“아침도 안 먹고 바다에 갔다네요.”

“바다오?”

장진남의 물음에 듣고 있던 한유영이 흙 묻은 손으로 뺨을 긁었다.

“제가 설기 먹고 싶다고 해서 갔나 봐요. 미안해라.”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 학생인데 엄마를 위해 익숙지 않은 갯일을 하러 갔으니 미안할 수밖에. 한유영은 설기장과 찜, 무침에 튀김까지 떠올리며 군침을 삼켰다. 미안함과 별개로 작용하는 본능적인 돼지력의 영향이었다.

***

감자밭을 워낙 크게 조성한 탓에 감자심기는 점심 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바다에서 돌아온 진혁과 조일헌도 거들었기에 그나마 오전 중에 마칠 수 있었다.

“아아-. 밀가루 찹찹 묻혀서 튀기기만 하면 되는 거애오?”

“네. 조리장님은 솜씨가 좋으셔서 더 맛있을 거예요.”

장진남은 한유영으로부터 설기요리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메모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데, 끄덕일 때마다 눈이 반짝이는 것이 암기 초능력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민용락은 장진남의 근육 속에 레시피가 들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제는 동네 아주머니가 주셨다며 능쟁이라는 게를 고춧가루 등으로 무친 반찬을 먹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만큼 맛이 좋았다.

“와-, 정말 많이 잡았다.”

손광연이 대바구니와 그물을 들여다보며 신기한 눈을 떴다. 매년 이맘때면 농사일 준비로 바다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설기를 잡아 본 적도 없고, 살아있는 설기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진혁 아배 안 바쁠 때 또 가자고. 요새 알배서 맛이 젤 좋을 때여-.”

“그래요, 형님. 재밌겠어요.”

갯벌에서는 손톱만한 조개를 주워도 즐겁지 않던가.

손광연의 얼굴에 모처럼 아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둘이 합쳐 천 마리는 잡은 모냥여-. 아이고 죽겄다.”

특유의 허풍을 얹은 조일헌이 어깨를 두드렸다. 조일헌은 진혁과의 내기에 패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듯 뽕막대를 놀렸다. 덕분에 삭신이 쑤시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진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모두에게 수확물을 들어 보였다.

“미경이네도 나눠 주고요. 삼촌들도 요리해 주면 좋겠어요.”

“그래. 고생했어. 씻고 점심 먹자.”

점심은 설기찜과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로 정해졌다.

조일헌이 집에 들러 씻고 막걸리를 받아 오겠다며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그러다 진혁과 눈을 마주치고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유. 스엉-님.”

그려.

진혁이 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뒷짐지고 눈을 꿈뻑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늙은이의 자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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