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17화 (117/338)

< 가족이라는 특명特名 (4) >

***

손진혁이라는 영혼에게 세상의 흔적은 차창에 흐르는 빗물처럼,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그림자가 말한 봉인의 영향인 것인지, 아니면 세월에 흐릿해진 탓인지, 진혁의 기억은 일신에 새겨진 것들뿐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라면 오래도록 떠들썩했던 사건들 정도랄까. 신문 배달을 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이 세상 읽기였다. 덕분에 몇 살 때 어떤 일이 있었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올해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웠던 예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건을 막을 조력자들이 주위에 있는 바, 불행을 막을 힘이 있는데도 방관한다면 그 죄책감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아빠와 홍기준 아저씨 덕분에 먹고 사는 건 차고 넘쳐.’

늘 다짐하는 것이었지만, 진혁은 이기적으로 살고 싶었으나 비겁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 다짐을 행동에 옮길 때였다. 그럴 능력이 생겼으니.

미래 정보.

비록 선명하지는 않다 해도 떠오르는 건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나만의 방식으로.’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은 진혁은 민용락이 전해준 군산 여객선 업체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오빠 무릎에서 잠든 유진이를 한 손으로 다독이며.

문득 진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찾았다.’

회사 이름을 보며 확실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업체명을 검지로 두드리는 진혁의 눈이 빛났다.

「웨스턴훼리」

***

문석일을 비롯한 정예 SSS, 홍시, 민용락까지. 같은 영역에서 호흡하는 가족이 늘었다. 진혁의 집은 눈먼 미사일이라도 날아오지 않는 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진혁의 심경은 김인랑의 모친이 병환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들은 것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 외부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 말이다. 가족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묶이니 저들의 일상도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정 많은 손광연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손광연은 간병비에 보태라며 김인랑에게 금일봉을 건넸는데, 진혁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였다. 아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고픈 의도로 보였다.

문석일은 오늘도 진혁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보통은 마당을 서성이거나 함께 산책을 하며 의논했는데, 요즘 들어 방에서 밀담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문석일은 열심히 메모를 하며 머리를 굴릴 뿐,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진혁이 철저한 보안을 요구했기 때문에 제 입마저 막는 것이었다. 몸에 밴 습관이 그러했으니.

- “미쳤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처음에는 문석일도 진혁의 망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이 애송이가 뭔가 주문을 했던 일은 늘 그만한 결과가 따랐다.

일요일마다 강헌창을 데리고 마을회관 마당에서 검도 연습을 하라고 했을 때였나? 죽도로 강헌창의 몸 구석구석을 218대가량 구타하니 폭주족 고등학생들이 그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미친 아저씨들이 사는 동네라고 생각했으려나.’

3월에 웃통 벗고 그 짓을 하느라 창피하기는 했으나 김춘식 선생이 고맙다며 소 판 돈으로 회식을 시켜줄 때는 보람마저 느꼈다. 이렇듯 애송이가 부탁하는 일에는 늘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좀 많이 이상하다.

‘협박을 하라는 뜻인가?’

턱에 힘을 주고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ㄱ. 선박 운항 허가 관련자 은밀히 접촉

ㄴ. 사주 면담. 심야/은밀히

ㄷ. 주말 여객선 운항 방해 수단 강구 – 선사 손실 최소화」

‘ㄱ’이 플랜 A였다.

그다음은 염두에 두지 말라고 애송이는 강조했다.

“믿을게요. 비밀로 해주세요.”

“맡겨 둬.”

문석일은 진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왜 문을 닫을 때면 구부정한 자세로 뒷걸음질치는 걸까.

‘예의 바른 삼촌이야.’

문석일이 나간 후 진혁은 이마를 짚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실력자가 옆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후우우-. 이제는 아주 작아진 갈등을 한숨과 함께 날려버렸다.

역사의 개입이니 뭐니 하는 말은 이제 개소리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역사가 아닌 생명을 구하고자 함이었으니.

‘도움은 어디서 떨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거야.’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언론에서는 으레 원인 분석이랍시고 앞다투어 보도했으나, 아무리 신문을 탐독했던 진혁이라 한들 세부 내용이 기억날 리 만무했다.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기사 쪼가리를 신뢰하지 못했기에 진지하게 살피지도 않았었고.

‘그래도 이럴 땐 미리 참고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혹시 몰라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리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사건을 막을 방법을 묻기 위해 간절히 불렀으나 그림자가 나타나기는커녕 형광등도 깜빡이지 않았다. 홍기준에게 작별을 고하더니, 정말 떠난 모양이다.

‘직접 나서야지 뭐.’

물론, 조력자를 통해 나서야 한다. 직접 뭔가를 할 수 없는 처지니까.

민용락을 통해 여객선 업체 리스트를 받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이 더뎠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준수하며 사건을 막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교훈만 얻었다.

정부라는 이름으로 누굴 죽이는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쉬웠지만 살리는 것은 바위를 뒤집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택한 장기알이 공작원 출신 문석일이었다.

배를 파괴해선 안 된다.

영세업체와 종업원의 밥줄이 끊기고 바다가 오염될 터였다.

항해 불가능한 수준의 고장을 유발하는 것 또한 최후의 수단인데, 사고 시기를 알지 못하니 그 방법도 실현 불가능하다. 시기상 가을이었다는 정도만 어렴풋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가져오는 한계였다.

사주를 만나 폐업을 유도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사안이었다. 말이 유도지, 사실은 협박이 될 것이다. 한데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고를 막기 위해 목구멍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체제와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고를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운항 횟수를 늘려서 과적을 하지 않도록 막아야겠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운항 횟수와 무관하게 과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하는 게 우선이었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행정부 담당자뿐이다.

다소 불법적인 짓을 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나, 진혁의 판단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문스킬 삼촌이 알아서 하시겠지.’

어디 부러뜨리거나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알아듣도록 적당히, 잘, 깔끔하게, 신사적으로 말하고 오지 않을까.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누군가의 행동을 유도하는 건 진혁보다 훨씬 잘할 사람들이니.

‘절대 알려져서도 안 돼.’

영웅 놀이를 하려는 것 또한 아니었다. 행적이 밝혀진다면 영웅이 아닌 흑막 뒤의 악인으로 비칠 게 뻔했다.

다만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현재 살아있을 그들을. 어떤 사람들인지, 강자인지, 약자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진혁의 눈에는 그저 다수의 생명이었다.

아무튼 은밀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몸을 숨기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데도 도가 튼 사람들이 해야 한다.

그런 일이라면 문석일과 SSS가 딱이지.

‘진짜 기연 아니었을까.’

문석일과 만난 일 말이다. 그들과 한 지붕 아래 머물게 된 일이야말로 진혁의 등에 자유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나는 학교도 가야 하고.’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한다.

헤헹-.

거울을 보는 진혁의 한쪽 입꼬리가 야비하게 올라갔다.

그제야 제법 싹수없는 청소년처럼 보였다.

***

입덧은 이제 가신 것 같은데, 한유영의 식탐은 끝이 없었다.

단굴, 냉이, 달래, 껍질 벗긴 봄도라지 속살 무침, 배수갑문에서 딴 것 중 색상이 너무 짙지 않아 연두색 빛이 도는 미역 줄기, 겨울잠 자는 개구리 뒷다리, 눈 내리는 날 작업한 감태로 만든 김, 쑥개떡, 씀바귀와 고들빼기 나물······.

먹는 양은 많지 않은데 메뉴가 다양했다. 진혁의 노트에 정리한 리스트만도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야말로 명불허전의 돼지력이었다.

진혁은 개학 후에도 틈날 때마다 연한 쑥을 뜯었다.

장진남과 민용락이 거들어서 할 만했다.

‘아주까리 쌈도 드시고 싶댔는데.’

강된장이야 조리사 장진남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지만, 피마자 이파리는 여름에나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아무튼 이 집에 한가한 사람은 없었다.

손광연은 사업을 챙겨야 하고, 유진이는 홍시에게 말을 가르쳐야 한다.

“나비!”

끼엥-.

그림책을 보여주며 열심이었지만 홍시는 알아듣지 못할 개소리만 낼 뿐이었다.

“참새!”

헤윽-.

그림책이 아니다 싶으면 천자문을 들이댔다.

“달 월!”

월!

“오오오-. 따총! 우리 홍시, 말 잘하지요?”

“그럭저럭 하는 것 같네오······.”

짝짝짝-.

한유영이 담근 고추장을 얻으러 왔던 장진남은 마지 못해 박수를 쳤다.

꼬맹이 비위를 맞추느라 박수칠 때마다 떨리는 이두근이 안쓰러웠다.

아무튼, 천재인 줄 알았던 유진이도 점점 맛탱이가 가는 것 같았다.

‘터가 안 좋은가.’

물장화를 챙겨 신은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천길룡 할아버지가 터가 아주 좋아졌다고 극찬을 하셨다는데, 얻어먹은 게 많으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오빠, 어디 가요오-?”

“조일헌 아저씨랑 바다에 다녀올게. 유진이는 힘드니까 홍시랑 놀아.”

“녜-.”

어차피 홍시를 좋아하는 유진이는 따라 나올 마음도 없어 보였다.

‘내가 살다 살다 설기를 다 잡아 보네.’

설기는 본디 쏙이라고 불리는, 갯가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크기는 보다 작은 갯벌 생물이다.

봄바람이 문제였다.

장군이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봄바람을 들이쉰 엄마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헤에-, 설기 알뱄겠다.”

그리 혼잣말하고 침을 흘렸다.

부모님이 만류해도 끝내 턱 앞에 먹거리를 갖다 바치는 효로자식 손진혁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3, 4월이면 본격적인 새해 농사를 앞둔 바닷가 농부들은 갯벌을 찾는다.

바지락도 캐고, 간장에 절이거나 무쳐서 먹기 위해 능쟁이라는 게도 잡는데, 이는 삽질이 서툰 여인들의 몫이었다. 남자들은 이르게 낙지를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설기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이였던 진혁은 잡아본 경험이 없다.

‘징그러워.’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처럼 생겼다.

그러나 식감과 맛은 마음에 들었다.

‘갯가재와 닮아서 비슷한 맛일 줄 알았는데.’

갯가재가 꽃게라면, 쏙은 돌게와 비슷하달까.

그만큼 풍미에서 유사성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식감이나 먹는 방법도 다르다.

진혁은 갯가재를 먹을 때면 손가락을 빨아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살점이 별로 없어 단단한 껍질을 벗기며 맛이 밴 손가락을 빨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설기는 껍질째 먹을 수 있어 소만큼 먹는 진혁의 취향에도 제격이었다.

‘튀김 맛있는데.’

결혼식 피로연을 하는 집에 가면 설기 튀김이 올라오곤 했는데, 진혁은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이제 피로연을 집에서 하지 않고 읍내 예식장이나 식당에서 하게 되어 사라져가는 맛이었다.

완전히 시골 사람인 엄마도 설기를 좋아했다. 문제는 집에 잡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오애앵앵-.

마당을 서성이고 있자니 척척박사 조일헌이 스쿠터를 몰고 나타났다.

진혁의 지원 요청을 받고 당도한 원군이었다.

“얼레? 지넥이 연장 웁써? 삽은 뭐 헐라구 챙긴 겨?”

“예?”

연장이라니. 몽키스패너라도 들어야 하는 걸까?

어리둥절한 진혁의 눈에 조일헌이 대바구니에서 꺼낸 막대기를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진혁이 주춤 물러섰다.

‘오우야······.’

조일헌이 내민 것은 차라리 대형 딜도였다.

아빠가 봤다면 분명 사타구니에 대보며 비교했을 법한 모양새 아닌가.

‘굵기는 비슷한 것 같기도······.’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진혁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타원형의 뭉툭한 끝부분은 남자의 상징 거북이 오빠를 닮았고, 길이는 장정 팔 길이보다 조금 짧았다. T자형으로 손잡이를 댄 반대쪽은 썰매 촉 손잡이처럼 생겼다.

“딴디 사는 사람덜은 뭔 깃털인지 개털인지루 낚시를 헌다는디, 글케 해서 멫 마리나 잡겄어? 우덜 동네서는 이걸루 확 뻥 뚫는 겨-. 그럼 설기란 눔이 확 끌려 올라오는 겨. 펌프마냥-.”

예,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러니 막대기 좀 치워주세요. 민망하게 생겨서 똑바로 보기가 힘드네요. 진혁은 큼큼- 헛기침만 삼켰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소변볼 때나 샤워할 때 본 녀석과 닮아서만은 아니었다.

아빠를 따라 바다에 갔을 때 갯벌 곳곳에 꽂혀 있는 막대기를 뽑았다가 모양 때문에 기겁을 했었다. 웬 변태가 갯벌에 딜도를 꽂았냐며.

이제 생각해 보니 부러진 도구를 그렇게 버리고 간 모양이다.

“요새는 철물점이서 쐬루 만든 것두 파는디, 파는 건 모양이 이렇게 흡족허지가 않어-. 햐-, 진혁아. 이것 좀 봐라. 이 성이 직접 깎은 건디 월매나 주옥같이 잘생겼냐?”

조일헌이 뭉툭한 막대 끝부분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표정도, 행동도 부적절함을 넘어 불법적으로 보였다.

‘그, 그만! 그만하도록 해!’

{@PIC:560637}

뽕설기 잡이 작대기입니다.

그림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ppt로 간단히 그렸습니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낫 등의 날붙이로 깎아 그림처럼 모양을 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선정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담백하고 건조하게 그렸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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