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라는 특명特名 (3) >
미꾸라지를 잡을 때도 그랬다.
진혁이 삽을 들고 논을 밟으면 이웃들도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혁을 따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촌구석 인플루언서인가!’
왜 있잖은가.
뭐가 하고 있자면 나타나서 비슷한 짓을 하는 사람들.
‘아니면 말고.’
저 멀리에도 웅크려 나물을 캐는 사람들이 보이자, 진혁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SSS 두 명은 아빠를 따라 출타 중이고, 한 명은 두더집에서 엄마가 계실 집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진혁은 호빗벙커라 부르지만 요원들은 두더집이라고 부르더라. 뭐, 두더지 집이라는 뜻이겠지. 망을 보다가 엄마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진혁에게는 따로 문석일이 붙었기에 SSS는 다른 가족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한 명은 새 식구가 오기로 했다며 차를 몰고 나갔다. 홍기준 부회장이 보낸 관리직이라는데, 진혁이 요청한 사람이겠지. 세인 내부의 인사이동이니 진혁은 굳이 해당 인물의 정보를 구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누가 오든 적절히 이용할 자신은 있었으니.
나머지 네 명의 SSS는 당연히 근무 후 휴식을 위해 읍내에 있는 집에 갔다.
‘문스킬 삼촌이라도 도와주면 좋을 텐데.’
문석일은 마을 어른들과 배드민턴을 친다며 곰짐에 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강헌창은 육성찬네 아버지가 일 좀 도와달라고 불러서 출장을 갔고.
‘인벤 삼촌 어머님은 괜찮으신가.’
김인랑은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며 휴가를 냈다.
사람이 많으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거라 생각했거늘, 각자 하는 일이 있으니 억지로 데려다 부려먹을 수도 없다.
“아윽-.”
진혁은 일어서서 허리를 펴고 저린 다리도 털었다.
최미경 청소년의 호미질은 능숙했고, 냉이를 잡는 손은 사냥꾼의 그것처럼 정확했다.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흙째 들어 올린 후, 냉이를 집어 올려 흙을 탁탁 터는데 한두 번 해봐서는 나오기 힘든 솜씨였다.
감탄하며 헤 벌어진 진혁의 입이 손광연과 한유영을 절묘하게 닮았다.
“미경이 잘 캔다.”
“이맘때면 하는 일이잖아. 3월까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최미경 청소년의 차림새를 살폈다.
왜바지, 혹은 몸빼라 불리는 고무줄 통바지에 무채색 체크 남방,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선캡, 목까지 가리는 아무개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 기념 수건. 영락없는 시골 아낙의 복장이었다.
‘이런 차림이라 내가 알아보지 못했나 보다.’
매년 이맘때면 어머니 김순복과 더불어 나물을 캤을 친구.
진혁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요소였으니 눈여겨보지 않아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다.
“지금처럼 작을 때가 맛있어.”
소꿉친구의 호미질을 멍한 눈으로 감상하는데, 최미경 청소년이 종알거렸다.
아무래도 얘도 외탁한 모양이다.
“하루 점드락 하면 무릎이랑 어깨, 발목이 쑤셔. 그래서 시장에 내다 팔 거 아니면 먹을 만큼만 캐고 마는 거여-.”
말투까지 지 엄마 닮아가네.
그런데 진혁도 해가 저물도록 캐야하는 거겠지?
엄마만 드릴 게 아니라 조리사에게도 주려면 말이다.
“더 크면 돈 받기는 좋아도 향이 약해져. 양분을 크는 데다 써서.”
아, 그렇구나.
개똥도 약에 쓰고 양아치에게도 싸우는 법을 배운다더니, 최미경 청소년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나물 생태학 아닐까.
“더 두면 억세져서 맛이 없어.”
앙칼지지 않고 낭랑해서 듣기 좋은 음성이다.
친구의 종알거림을 음악 삼아 진혁도 호미질을 재개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해. 막상 캘 때는 눈에 띄는 대로 싹 다 캔 것 같은데, 나비 날아다닐 때 되면 하얗게 꽃 피어서 나 여깄지롱- 하잖아. 사람 놀리는 것마냥. 그땐 먹지도 못하는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야기였다. 냉이뿐만 아니라 삘기도 그러지 않던가. 애타게 찾을 땐 보이지 않던 놈들이 5월이 지나면 여기저기서 억세게 자란 하얀 속살을 자랑한다. 먹을 테면 먹어 봐라 하듯이.
진혁은 호미질을 멈추고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빨간 입술이 새부리처럼 쉴 새 없이 뻐끔거리는 저 모습을 언제 봤더라.
‘아, 서울에서 봤었구나.’
성인이 된 최미경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최미경 유부녀는 가끔 진혁을 만나면 한풀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헤어질 때는 혼자 떠들었다며 미안해했는데, 미안해하는 사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이번에도 그 은행원과 결혼하려나?’
오빠 최태양과 남편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었다.
최태양은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데, 남편이 처가 식구와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시골 사는 부모님은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자식들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동생을 보고 싶어 하는 최태양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뭐, 지 팔자니까.’
친구의 혼사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진혁은 오지랖이 넓지 못하다.
다시 사는 인생이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언뜻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얘도 내 가족인데 잔소리 좀 하면 안 될라나?’
듣기 싫다고 성질내면 그때 끊어도 되는 거잖아.
호미 소리도 멈춘 데다 빤히 바라보는 진혁의 시선이 거슬렸을까, 최미경 청소년이 특유의 도발적인 눈빛과 턱짓을 보내왔다.
“뭐-.”
“넌 누구랑 결혼할 거냐?”
아이고 이런 븅신. 다짜고짜 누구와 결혼할 거냐니.
진혁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낭패감에 이를 악물었다. 창피한 나머지 눈도 질끈 감겼다.
최미경이 쿠욱- 걸쭉한 코웃음을 날렸다.
“왜? 너랑 하자고 할께미? 아서라-. 수정이 고년 무서워서 침이나 바르겠냐?”
최미경은 손진혁 고자설을 거론하려다 말았다.
엄마에게 듣기로 누군가 나쁜 마음으로 퍼뜨린 잘못된 소문이라고 했다.
어떤 못된 년이 그런 소문을 냈냐며 최미경도 방방 뛰었더랬다. 일부러 낸 건 아니고 어쩌다가 그런 말이 나온 거 아니겠냐며 소문의 진원을 두둔하기도 했다.
“미경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이상형 같은 걸 물어봐야 하는 거 아녀?”
“어, 맞아. 이상형.”
역시, 최미경은 양아치였으나 똑똑한 청소년이었다.
헛나간 말을 바로잡는 능력도 있지 않은가.
최미경은 호미질을 멈추고 허어- 소리를 냈다. 그 허허로운 모습이 천길룡 할아버지를 닮았다.
“글쎄다? 샌님은 싫더라.”
고개를 저은 최미경은 다시 냉이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샌님 싫다는 녀석이 그 기생오라비 같은 은행원과 결혼을 했다니.
역시 사람은 말만으로 평가할 수 없고, 한번 뱉은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짜식-, 네가 별일이다? 그런 걸 다 묻고.”
“샌님이랑은 결혼하지 말라고.”
“아, 그럴 거라고오-.”
최미경은 씨익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잔소리할 게 없어져서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잔소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연애도 안 해본 놈이 코치를? 언어도단이다.
“너는 좀 쉬어. 이 자세로 오래 있으면 키 안 큰댜-.”
“어,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누가 누구 키를 걱정해주는지는 몰라도 최미경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마침 홍시와 더불어 널브러져 잠든 유진이를 집 안으로 들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
유진이는 시골 아이답게 졸리면 아무 데서나 잠드는데, 밭둑을 베고 홍시를 끌어안은 채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
***
민용락은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리니 농약 모자를 쓴 훤칠한 형님이 나타나, 버스 옆구리 짐칸에서 캐리어도 꺼내주고, 조심해서 타라며 고급 세단 문도 열어줬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특별대우였다.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며 등을 팡팡 쳤는데, 민용락은 창자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형님은 복장이 왜 이래? 혹시 트렁크에 삽 싣고 다니나?’
근무할 곳이 시골이라는 말은 들었다.
그래도 이건 좀 뭔가······.
‘나는 왜 냉이를 캐고 있는가.’
서투른 호미질을 하며 민용락은 휘리릭 지나간 시간을 복기했다.
두더집이라는 숙소는 근사했다.
현관을 제외한 모든 벽이 흙에 덮여 단열이 뛰어나다고. 내부는 원목과 황토로 마감되어 은은한 나무 냄새와 흙냄새에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조리원은 장진남이라는 남자였는데, 함께 생활할 사람이 생겨서 좋다며 반가워했다. 조리사가 아니라 헐크 호건 같은 체격이었다.
‘저것도 냉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냉이가 아니라고?’
여러 의문을 동시에 품은 민용락의 동공은 어설피 풀려 있었다.
이 저택의 사장은 출타 중이어서 사모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사모는 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배를 내밀고 있었다.
민용락은 누나가 아기를 가졌을 때 그런 자세를 취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아기를 편하게 해주기 위한 자세겠지. 그편이 허리도 덜 아플 테고.
‘나도 장갑 좀 주지. 손에 흙 많이 묻네.’
사모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식혜를 줬다.
달고, 맛났다.
그러다 앞으로 함께 일할 학생을 따라 밭으로 끌려 나왔다.
‘아니야. 여긴 밭이 아니라 밭둑이야.’
냉이는 정해진 곳 없이 여기저기서 돋는다고 한다.
오자마자 접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밭에 난 녀석들이 캐기 쉽다고 하는데, 민용락은 밭둑을 고집했다. 밭은 땅이 물러서 흙이 신발에 달라붙는 통에 발이 금세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착한 사람들인지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2월에 캐는 게 가장 맛있어요.”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새까만 것이 꽤나 귀여운 여학생이다.
종알종알 계속 떠드는데 어느새 세뇌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여대에 다니는 여동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음성이 듣기에 좋았다.
민용락은 여학생이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냉이를 캤다.
조리사 장진남도 소형 곡괭이 같은 도구를 들고 가세했는데, 조개 캘 때 쓰는 도구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날이 풀렸다고는 해도 아직 겨울이거늘 반팔 티셔츠 차림이라니, 괴물들만 사는 동네인가. 아, 장진남도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
‘나도 여기서 살다 보면 저런 괴물이 되는 건가.’
민용락은 어설프게 호미질을 하는 와중에도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폈다.
여학생은 너무 귀여웠고, 장진남은 근육이 징그러웠으며, 손진혁은 과묵했다.
‘저 녀석이 내가 함께 일할 사람이라고?’
분명 홍기준 부회장이 그렇게 지시했다.
이 집 사장이 아닌 아들과 의논하라고.
처음 봤을 때는 체격 때문에 경호원 중 한 명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만 농약 모자를 쓰지 않았어.’
내 예리한 관찰력을 속일 순 없지!
장진남조차 외부에서는 농약 모자를 쓰는데, 쓰지 않았다는 건 특별한 존재라는 소리겠지. 민용락도 오자마자 초록색 농약 모자를 썼는데 말이다.
홍기준 부회장은 팩스로 받을 자료를 취합해 저 녀석의 의견을 물으라고 했다. 대놓고 묻지 말고 적당히 둘러서 물으라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냐.
‘부회장님도 부회장 되더니 맛탱이가 가신 걸까.’
재벌들은 인외종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홍기준도 분명 이상한 놀이를 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저, 미경 학생?”
“네? 호호호-.”
민용락의 부름에 최미경이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냉이는 언제까지 캐야 하는 거지?”
“하루 점드락이요.”
점드락이라······.
Germ de Rock인가.
불어와 영어가 조합된 듯한 단어였다. 바위에 붙은 세균이라는 뜻이로구나. 바위에서 세균이 살 정도로 오래 작업해야 한다는 말이렷다.
그런데 요즘은 중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를 가르치나?
민용락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은 아프지만 딱히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용락 씨도 이제 우리 가족이니까 여기 생활에 적응하도록 해오. 서울 생활보다 재미있을 거애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의 장진남이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냉이를 캤다. 캔다기보다 트랙터처럼 수확하는 모습이었다.
장진남이 흙 묻은 장갑을 찹찹 털며 물었다.
“용락 씨는 몇 살이애오?”
“스물여섯입니다.”
“젊네오, 젊어오. 군대는 다녀왔어오?”
“면제입니다.”
어쨌든 해결은 했내오. 장진남이 고개를 주억였다.
민용락은 말이 없는 진혁을 힐끗거렸다.
저 입꼬리는 분명 기분 좋게 웃는 것 같은데 너무 말이 없지 않은가.
‘나를 처음 봤을 땐 놀란 눈치였는데.’
잘못 본 걸까?
민용락은 자신을 본 손진혁의 반쯤 감겼던 눈이 크게 떠지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금세 다시 감기기는 했지만 찰나의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야.’
벅벅-.
민용락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냉이와 원수진 사람처럼 호미를 놀리면서 입은 웃는 진혁의 모습이 기이하게 공포스러웠다.
그때 엉금엉금 기어 가까이 다가온 손진혁이 나직이 말했다.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민용락이 흙 묻은 손으로 코를 훔쳤다.
지금도 도와서 냉이를 캐고 있는데 뭘 더 도와달라는 소린가?
호미질이 아니라도 어차피 진혁을 도우라는 특명을 받고 오기는 했다.
“뭘 도와주면 될까?”
“군산에 있는 여객선 업체 전수 조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생뚱맞기는 하지만 그거 뭐 얼마나 걸린다고.
여기저기 전화해서 팩스 한 통 받으면 당장이라도 완료할 수 있는 업무였다.
“업체 리스트 좀 구해주세요. 찾을 곳이 있어서 그래요.”
진혁의 눈이 진지했기에 민용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업무인 냉이 캐기도 아직 진행 중인데 두 번째 업무를 받았다. 벌써 믿음을 얻은 거야!
그건 그렇고,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게 이런 의미였구나.
- “잠꼬대 같은 소리를 종종 할 거예요.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는 일도 있겠지만 끝내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더 많아요. 그래도 잘 참고 해봐요.”
신뢰 쌓기에 성공하면 여름에 대리 달아준다고 했다.
특진만 할 수 있다면 산삼인들 못 캘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