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라는 특명特名 >
***
동생 유진이의 애교를 보며 시간이 멈추길 바랄 때가 있었다.
한데 갈 길 바쁜 시간은 기다려주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는 일도 없었다.
“또 한 살 먹었네.”
꽝꽝 언 마당에서 노는 유진이도 훌쩍 큰 듯했다.
네발 달린 짐승은 사람보다 성장이 빠르다.
추운 밤에 태어나 발발 기어다니던 꼬물이 홍시는 어느덧 뒤뚱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닐 정도가 되었다. 빠르게 달리지는 못해도 사뿐사뿐 걸을 수는 있었다.
“까하하-! 홍시야-, 유진이 잡아 보지요?”
귀달이 모자를 쓴 유진이가 아장아장 걸으면 홍시가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유진이는 홍시가 뒤쳐질까,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맞췄다.
그 모습에 진혁은 봄날의 채흐응봉투 레이스를 떠올렸다.
‘나도 미경이 넘어질까 봐 보조 맞춰 달렸는데.’
아주 짜릿한 경험이었지.
모자의 방울이 달랑거리는 모습과 홍시의 귀가 팔랑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 아직 힘이 부족해 네 다리를 부들거리면서도, 뭐가 신나는지 떨어져라 흔드는 꼬리가 여간 방정맞은 게 아니다.
홍시가 바들바들 떨면 유진이가 냉큼 달려가 품에 꼬옥- 안았다.
어린아이들은 대개 강아지를 안을 때 목을 조르듯 하던데, 유진이는 혹여 으스러지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아이처럼 조심해서 들어 올렸다.
“우리 홍시 춥지요?”
호오- 입김을 불어주자 홍시는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렸다. 유진이의 턱을 핥는 짓도 잊지 않았다.
진혁에게 장군이가 그랬듯이, 유진이에게 홍시라는 친구가 생겼다.
따끈한 유자차로 한기를 쫓으며 평화로운 정경을 감상하던 진혁이 장군이를 쓰다듬었다.
“장군이 오래 살아라.”
왈-!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알아들은 모양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개는 사람만큼 수명이 길지 않다.
‘나중에 이 녀석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까.’
천수를 누리더라도 15년을 채우기 힘들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개의 차이, 장군이의 수명은 아마 10년도 남지 않았을 거다.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위험한 곳 가지 말고, 이상한 거 먹지 말고, 수상한 사람도 따라가지 말고.”
왈-!
한마디 할 때마다 장군이가 대답하듯 짖었다. 역시 명견이다.
“까하하-! 홍시도 이렇게 할 수 있지요?”
유진이가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마도 서울에서 뽀미와 구르며 놀던 추억 때문인 듯한데, 홍시는 아직 구르는 법을 몰랐다. 마구 쫓아가 유진이의 얼굴을 핥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흐뭇하게 웃던 진혁이 다시 시선을 장군이에게 돌렸다.
“홍시 크는 거 보면서 오래, 오래오래 살아.”
진혁은 생명을 보며 마냥 신기해할 어린아이가 아니다.
호르몬의 명령이나 사춘기 영향으로 새삼 감상에 젖을 리도 없었다.
그저 당부하고 싶었다.
“생명이 태어나는 건 운명이지만, 지키는 데는 큰 노력이 따르더라. 생명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하는 거야.”
헤헤헥-.
생의 반대편에서 기다릴 죽음을 넘겨다보는 건 이성과 감정을 모두 갖춘 존재의 전유물일 것이다. 더 잃을 것이 없던 전생에는 간직하지 않은 미련이었는데, 다시 만난 장군이가 새끼를 낳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빠져든 사색이었다.
으르르- 월! 워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장군이가 갑자기 맹렬히 짖었다.
쪼그려앉았던 진혁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 이 새끼는 오래 살라고 덕담해주는데 왜 지랄이여?
새끼까지 낳고 어른 됐는데 이제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뜻인가?
***
“아, 굴 먹고 싶다······.”
주방 창을 통해 눈부신 설원을 보며 한유영이 중얼거렸다.
“시장 가서 사다 줄게요.”
“아니에요. 길도 미끄러운데요.”
“어차피 미팅 때문에 나가야 하는데요.”
읍내에 다녀온 손광연이 굴을 사 왔으나 한유영은 한 점만 맛보고 젓가락질을 멈췄다.
“맛이 없어요? 싱싱한 굴인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샀는데······.”
“입맛이 변했나 봐요. 비려요.”
굴은 원래 비린 맛으로 먹는 거 아닌가?
진혁과 손광연도 맛을 보았으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맛이었다. 겨울이라 맛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했고.
손으로 한 움큼 집어 입에 넣는 유진이를 보면 맛이 이상한 건 아닌 모양인데, 아무래도 뱃속의 아기 때문에 비위가 약해진 게 아닐까.
“엄마, 수문에서 나는 굴 드시고 싶어서 그러시죠?”
“으응.”
한유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에 장난감 선물을 받지 못해 상처받은 아이 같았다.
어쩐다, 집에는 굴을 딸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엄마가 원하는 굴은 물속에 잠긴 밧줄을 끌어 올리면 줄줄이 올라오는 큼지막한 굴이 아니었다.
배수갑문 근처에는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가 많이 있는데, 펄이 없어서 물이 깨끗했다. 어차피 썰물에 진입하니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을 신으면 위험할 것도 없다. 문제는 전문가가 아니면 채취가 어렵다는 거다. 커다란 바위에 듬성듬성 붙은 굴은 크기가 작아 까기가 힘들었다.
‘바위를 통째로 옮길 수도 없는 거 아닌감.’
그리고 이 집에는 조새라 불리는 굴까개 도구도 없었다.
엄마가 위험하거나 궂은 일하는 걸 꺼린 아빠의 성화 때문이었다.
도구가 눈에 보이면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라나? 낚싯대를 보면 물가로 가고 싶어지는 진혁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제가 미경이네 가볼게요.”
굴 까기 전문가라면 동네에 많지.
전화해서 확인하면 그만이지만 시골로 돌아온 영향이었을까, 진혁은 어른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면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장군이는 집에 있어.”
홍시에게 젖을 물린 채 따라오려는 장군이를 만류하고 집을 나섰다.
제 새끼가 있음에도 진혁을 챙기는 마음이 엿보여 뭉클했다.
당탕탕-!
“미경아-!”
한참을 두드린 후에야 최미경 청소년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수건을 똥처럼 머리에 올린 것이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최미경 청소년은 제 눈높이에 머물렀던 눈동자를 한참 올려 진혁의 얼굴을 찾고는 배시시 웃었다.
“어머니 계시니?”
“엄마? 물 많이 쓰는 날이라고 아빠랑 바다 가셨지.”
물이 쓴다는 말은 썰물 때를 뜻한다.
최미경 청소년은 이렇게 저도 모르게 사투리를 섞어 쓰곤 했다.
물이 많이 빠지는 겨울이면 시골 아낙들은 바다에 나가 굴을 따거나 미역을 채취했고, 남자들은 김을 걷어 살림에 보탰다. 물론, 형편이 많이 나은 집은 겨울 별미를 구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었지만.
“오실 때 됐을걸?”
“굴을 좀 살 수 있을까?”
“안 그래도 너희 엄마 단굴 드시고 싶대서 가신 거야.”
아, 그러셨구나. 진혁은 괜스레 숙연해졌다.
엄마 때문에 김순복이 추운 날 바다로 나섰다는 소리가 아닌가.
동네 사람들은 배수갑문 근처에서 나는 엄지 한마디만 한 굴을 단굴이라고 불렀다. 시장에서 사는 굴보다 비린 맛이 덜하고 단맛이 강하게 난다는 뜻이었다.
최미경은 어젯밤 부모님이 나눈 대화를 진혁에게 들려주었다.
- “진혁이 오매가 단굴이 무쟈게 땡기는 모양여어-. 아주 죽을상을 허구 있더라니께? 그 어린 것이 새끼까지 가졌는디, 타지 와서는 오매가 해주는 음식이 얼마나 그리울 껴?”
- “허먼 니열 물 많이 쓰니께 까다 주든가. 그게 아무나 까는 거간?”
- “나 말구 챙길 여편네가 있간? 돈 많으먼 뭐혀어-. 돈 주구두 뭇 사먹는 게 있는디-.”
아마도 엄마를 살피려 집에 들렀다가 하소연을 들은 모양이었다.
최미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혁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사람들이다.
“내가 집에 가서 돈을-.”
“아냐, 아냐!”
최미경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곧 오실 거야. 나 방학 숙제나 좀 도와줘.”
이 귀여운 양아치가 또 시작이다.
진혁은 최선을 다해 구차한 변명을 꺼냈다.
“학교가 다른데-.”
진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미경 청소년의 한쪽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헛소리에 반응하는 썩소였다.
하긴, 학년이 같은데 학교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람.
“크흠. 무슨 숙제인지 일단 보자.”
핑계 대는 일이 익숙지 않은 진혁의 패배였다.
이제 탐구생활 같은 과제는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니까 이상한 숙제는 없겠지.
***
부산 모처.
정상태는 수상한 인물들을 발견했다.
인맥을 활용해 파악한 박대순의 소재를 찾아온 것인데, 먼저 온 놈들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인사를 나눠야 했다.
“끄으으-, 니 누고.”
정상태의 무릎에 목이 눌린 거구의 사내가 끅끅거렸다.
다짜고짜 나타난 정상태가 머리를 벽에 밀치고 다리를 후리는 바람에 너무나 쉽게 깔리고 말았다. 허무한 눈동자를 굴렸으나 다른 동료들은 이미 널브러져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정상태가 숨 쉬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안 묻는다. 여기서 뭐 하는 중이지?”
“서울서 웬 늠아가 와가 이기 사는 늠아 나타나마 작업하라꼬-. 더는 모린다.”
“모르면 인생 끝나나?”
진혁에게 배운 말을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뜻하지 않게 헛웃음이 나왔다.
“서울에서, 누가?”
껙-.
목을 너무 오래 누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덩치는 눈을 까뒤집으며 혼절했다.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배후에 누가 있을지는 뻔한 일, 확인차 물어봤을 뿐이니.
정상태는 덩치를 깔고 앉아 사내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그냥 지역 조폭들이구먼.”
차림새와 체구로 보아 그럴 거라는 생각은 했다. 이미 학습된 상황이기도 했고.
지난 소재지에 들렀을 때도 이런 자들과 마주쳤다.
정상태는 머릿속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박우정이 박대순에게 사주 후 입막음을 위해 사람을 붙였다. 위기를 느낀 박대순은 6개월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사한 주소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정상태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박대순의 판단은 시골 촌부의 그것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했다. 박우정이 사주한 일을 성공했든, 실패했든 박대순은 죽었을 것이다. 대정의 손속으로 판단했을 때, 가족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조폭들은 수단에 한계가 있으니 가족을 잡아 박대순을 협박할 생각이었던 듯했다. 의도치 않게 정상태가 박대순 가족을 보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고나 할까.
뭐, 보호할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쾅쾅-!
정상태는 허름한 단층집 대문을 두드렸다.
역시 안에서는 반응도 없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와 전력량계를 비교했을 때, 넉 달 넘도록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다.
‘임무 종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당분간 활동을 멈추는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 활동이 길어지는 만큼 추적 횟수가 많아지면 노출될 수밖에 없고, 어떻게든 대정의 귀에 들어갈 터. 그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문석일에게 임무를 받으며 들어둔 말도 있으니 이쯤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 “진혁이를 위해서도 찾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부회장님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눈빛만 봐도 통하는 친구였으니.
박대순은 현재와 무관한 패였다. 정상태는 과거를 묻어두자는 문석일의 의도로 해석 중이었다.
어차피 진혁이 피해를 본 것은 없다. 진혁도 해코지를 원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다시 찾아달라고 하면 그때 나서는 게 낫겠어.’
지금은 성가신 놈들 때문에라도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판단이 섰다.
피해 다녀야 하는 삶은 어차피 박대순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끙차- 소리를 낸 정상태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집에나 가자.”
출장비 받으며 가끔 이렇게 외유를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제는 부산에 온 기념으로 돼지국밥도 먹었다. 부추와 양념장 가득 넣은 돼지국밥 한 그릇에 소소한 행복을 절감했더랬다.
그러나 태양군 읍내에 부모님과 처자식까지 있는 정상태는 가족의 얼굴과 목소리가 간절했다. 늘 훈련과 임무에 치이던 군 복무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리움이다.
가족, 매일 보며 살게 되자 하루 이틀만 떨어져도 가슴을 허전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조폭들의 지갑에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끼워 덩치의 등 위로 던졌다.
“빨간약 사서 발라라. 못생긴 얼굴 흉질라.”
엎어진 채로 기절한 덩치의 몸이 움찔 떨었다.
패주고 약주고.
배려에 감동한 자의 추임새였다.
***
딸딸딸딸딸-!
경운기 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날이 있던가.
소꿉친구와 나란히 거실에 엎드려 수학 문제를 풀던 진혁이 벌떡 일어섰다.
경운기 소리가 그치지도 않았는데, 냉기 가득 머금은 몸으로 김순복이 집 안에 들어섰다. 아마 마당 입구에서 내려 먼저 걸어오셨겠지.
“히익-.”
소쿠리를 들여다본 최미경의 눈이 끝 간 데 없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