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을 밟고 (5) >
와-! 짝짝짝짝-.
화려하면서도 박력 넘치는 무도 시범에 주민들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SSS 요원 한 명이 몸으로 매트를 때리면 박수가 퍼지고 다음 대련 상대가 올라갔다.
“다음!”
곰 팀장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기술로 SSS를 모두 매트에 꽂을 때까지 문석일은 팔짱을 낀 채 진혁의 곁을 지켰다.
진혁은 문석일을 곁눈질했다.
“삼촌하고 비교하면 어때요?”
진혁이 턱짓으로 양강욱을 가리키자 문석일이 건조하게 말했다.
“유도만으로는 양 팀장을 당할 사람이 없을 거야. 올림픽 내보내도 될 걸?”
그 정도인가. 하긴, 기술 없이 힘만으로도 완전해 보이는 무사니까.
은근히 문석일과 양강욱의 대련을 보고 싶어 물었던 건데, 문석일은 관심 없는 눈빛이었다.
“거기 젊은 친구! 힘깨나 쓰겠는데 한 수 겨뤄보겠는가?”
아직 삼국지 인물에 빙의된 양강욱이 최태양을 가리켰다.
최미경의 어깨에 팔을 두른 최태양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씨름선수라 유도는 모르는데요······.”
“그럼 씨름으로 하지!”
쿵-!
양강욱이 매트에 무릎을 꿇었다. 꿇었다기보다 찍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였다. 안 아픈가?
와아아-, 짝짝짝-.
좌중이 박수로 최태양의 등을 떠밀었다.
주민들은 최태양이 마을의 자존심을 세워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런 여흥을 즐기지 않는 진혁의 눈도 흥미로 반짝였다.
‘태양 형 정도면 붙어볼 만하지.’
잠시 쭈뼛거렸으나 최태양도 쟁쟁한 격투가들의 대련을 지켜보며 피가 끓던 중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씨름을 잘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인데 설마 질까 보냐. 최태양은 자켓을 벗어 최미경에게 건넨 후 양말을 벗고 매트에 올랐다.
두 거구가 내뿜는 소리 없는 투기에 주민들도, SSS도 침을 삼켰다.
“나는 기오 땅 전위다!”
“태, 태양군 최태양-이다.”
하란다고 또 한다.
벌게진 얼굴의 최태양이 목례했다.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두 장사가 벨트를 잡았다.
‘어윽-!’
양강욱이 벨트를 쥐어 당기자 최태양의 머리에서는 피가, 몸에서는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벨트를 당겨 허리를 끊을 것 같은 괴력이 느껴진 탓이다.
‘이런 기분 언제 느껴봤더라?’
최태양의 눈이 과거에도 그런 경험을 안긴 주인공을 찾았다.
동네형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엄지를 들어 올린 진혁이 씨익 웃고 있었다.
얄미운 녀석. 최태양도 찡그리는 와중 진혁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날렸다.
“일어서시고오-.”
천길룡의 신호에 두 장사가 벨트를 잡고 일어섰다.
진혁은 어디선가 부득부득-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민감한 진혁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효과였다.
팽팽하게 대치한 장사들의 근섬유에 힘이 해일처럼 들어차는 소리.
“동- 심이요-!”
이상한 구령과 함께 천길룡이 두 장사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꾸우웅-!
최태양의 두 다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옆으로 90도 빙글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태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떠올릴 정도로 예술적이었다.
그렇게, 최태양은 곰에게 깔렸다.
어어, 할 틈도 없었다.
한라장사가 곰에게 완벽하게 패하는 순간이었다.
누운 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최태양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몇몇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최태양과 양강욱의 성격을 아는 진혁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음 승부에 최태양이 어떻게 복수할지 기대할 뿐.
그러면서도 짜릿한 흥분감에 도취된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별일이네.’
무사의 피가 흐르는 걸까, 진혁은 괜스레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괴력에 밀리고 타이밍을 놓쳐 첫판을 내주었으나 한라장사는 한라장사.
최태양은 남은 두 판에서 양강욱을 이겨 명예를 회복했다.
“젊은 친구 실력이 대단하구먼!”
“이 사람아, 첫 판 이긴 자네가 대단한 거지. 이 친구가 추석 장사씨름대회에서 한라장사 먹은 친구여-.”
천길룡의 설명에 양강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한라장사와 씨름을 하다니.
“영광이었다. 바쁘지 않으면 다음에 저기서 또 붙어 보지.”
양강욱이 멀리 모래판을 가리켰다. 진혁의 멀리뛰기와 유진이의 모래놀이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씨름장과 다를바 없는 면적에 고운모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 다음엔 샅바 가지고 올게요.”
2 대 1로 이기긴 했으나 벼락같이 내준 첫 판이 영 찝찝하던 차였다. 그리고 양강욱 정도면 좋은 훈련 상대가 되리라. 최태양은 다음을 기약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후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진혁이랑 해보세요.”
양강욱은 지친 기색도 없이 허리에 손을 얹고 웃었다.
“아무리 야수라 해도 애들은 뼈가 완전하지 않아서 부러질 수도-.”
“진혁이는 안 부러져요.”
최태양의 확신이었다.
일반인조차도 손만 잡아봐도, 팔뚝만 만져봐도 상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가늠하는데. 하물며 밥 먹고 씨름만 했던 최태양이 손진혁을 모를까. 작년까지만 해도 틈날 때마다 진혁과 부둥켜안았던 기억은 평생 세포에 새겨질 흔적과도 같았다.
최태양이 진혁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보는 사람 많아서 싫은데.’
진혁은 최태양과 양강욱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의 바람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빠 힘 쎄지요? 메떼지도 때찌했지요? 곰 아지찌도 떼찌할 수 있지요?”
어린 유진이의 눈에도 양강욱은 곰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손유진만 알고 있는 진혁의 역사였다.
멧돼지와의 역대 전적 1승 무패에 빛나는 오빠 아닌가.
그것도 씨름이나 유도가 아닌 생사결이었다.
“그래! 우리 아들 실력 한번 보자!”
“우리 아들 약해서 다칠 텐데······.”
부모의 엇갈린 기대와 우려 속에서 천길룡이 양강욱의 귀에 속삭였다.
‘자네, 생명 보험은 들었는고?’
‘예?’
회사에서 들어주기는 했습니다만.
갑자기 무슨 소리람. 지친 기색도 없는 양강욱이 눈을 모로 떴다.
진혁이 매트에 오르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생사결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해서는 저 곰 같은 사내를 제압할 수 없는 까닭에 진혁이 투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험! 나는 오기땅 전위다! 그대는 누구인가!”
아이씨 쪽팔려 죽겠네.
그래도 저 곰탱이는 포기를 모른다.
진혁은 복무 시절에 사용하던 대사를 읊조렸다.
“장판파 조자룡······입니다.”
전생에도 항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붙인 별명이었다.
물론, 양강욱과 대련할 때만 사용했다.
응?
조용하던 좌중이 웅성거렸다.
과묵한 SSS도 마찬가지였다.
“장판파는 장비 아니었어?”
“나도 장판교 하면 장비밖에 몰라.”
양강욱이 없는 목을 움직여 고개를 갸웃댔다.
“조자룡? 장비 아니고?”
“장비는 못생겼잖아요······.”
아-.
누구나 납득할 만한 대답이었다.
장비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그랬으므로.
외모만큼 강한 설득력이 또 없지 않겠나.
어쨌거나 다행히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다.
“시작하시죠.”
“종목은 뭘로 할 텐가? 젊은 친구에게 맞춰주지.”
“그냥 유도로 해요.”
진혁은 명현우의 상의 도복을 벗겨 위에 걸쳤다.
싸닥싸닥-! 제 뺨을 때린 진혁이 턱을 좌우로 움직였다.
돌아온 후 유도는 처음이었으나 전생에 대련할 때마다 하던 버릇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올림픽 보니 유도 선수들은 그렇게 하더라고.
진혁의 눈을 노려보며, 소매를 노리며 양강욱은 영민한 머리를 굴렸다.
요인의 아들이니 다치게 해선 안 된다.
적당히 다리를 걸어서 살포시 매트 위에-.
쿠웅-!
-눕히려고 했는데 도리어 양강욱이 누웠다.
분명 팔을 진혁의 목과 등에 완벽히 감고 다리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되치기에 당한 것이다.
다른 요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나 자빠져서 눈을 깜빡이는 양강욱은 달리 생각했다.
‘역시 야수! 이건 되치기가 아니야.’
되치기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이다.
진혁이 구사한 기술은 겉보기로는 되치기였으나, 그저 힘으로 양강욱을 패대기쳤을 뿐이었다.
‘야수 오브 야수.’
진혁은 뚱한 표정으로 호흡을 골랐다.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멧돼지보다 약한 양강욱이다.
진혁은 그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힘 조절이 필요했다.
‘적당히 하는 게 더 어려워.’
일어서서 매무새를 가다듬는 양강욱에게 물었다.
“한 번 더 하실래요?”
“좋다.”
꾸웅-.
꾸웅-!
찰푸닥!
싸닥-!
양강욱은 네 번 더 매트 위에 널브러졌다.
소매를 잡으려 하면 어느새 진혁의 손이 사라져 있고 도리어 제 소매가 잡혔다. 그대로 업어치기가 들어왔다.
하단 태클을 시도했다가 벨트와 목깃을 잡혀 공중에서 뒤집혔다. 그다음은 등으로 꽂히는 거다. 본능적인 낙법이 아니었다면 창자가 터지는 고통을 맛보았을 터였다. 허공에서 횡으로 빙글 돌며 곰은 생각했다. 얼마나 힘이 세기에 나를 이리저리 돌린단 말인가. 어린아이 다루듯이.
다리를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여지없이 발라당 자빠졌다.
양강욱은 돔 체육관의 천장을 가장 많이 구경한 사람이 되었다.
멀리서 키득거리는 문석일과 정상태가 보였다. 선글라스에 가렸으나 눈매가 둥그레지고 치아가 환하게 드러난 걸 볼 때 꽤나 즐거운 듯했다.
강헌창과 김인랑은 서로의 어깨를 때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양강욱으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내가 당한 게 그리도 좋은가?
‘문 선배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군.’
양강욱은 빙빙 도는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홍기준이 보내서 왔다며 서울에서 문석일이 처음 내려온 날이었다.
- “이 동네에 무신이 살아.”
무협지 깨나 읽은 아저씨의 허풍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무신이 누굴 뜻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문석일이 왜 불평불만 없이 진혁에게 업무를 받는지도, SSS가 왜 그의 통제 하에 있는 지도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혁이 건넨 손을 잡고 곰 같은 몸을 일으켰다.
“끄응-, 고맙다.”
양강욱은 멀어져가는 진혁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재밌는 야수다.’
날 봐줘?
다섯 번을 겨뤘지만 그때마다 진혁이 들인 힘이 달랐다.
겨우 이길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조절한 듯, 매번의 승부가 이상적이었다.
당분간은 저 녀석과 대련하지 말아야지.
SSS 요원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당연한 결과라는 눈빛이구먼.’
역시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인적 드문 산골이나 농경지를 거쳐 행군할 때마다 들던 감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시감이었다.
이상한 세계다.
양강욱이 4차원 정신세계를 펼칠 동안 한유영은 동그래진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우리 아들 유도는 언제 배웠어?”
“학교에서 승훈이한테요······.”
학생이라는 신분은 얼마나 편리한가.
학교와 책, 친구 핑계를 대면 대부분 그냥 넘어간다.
뭐, 유도를 배운 이승훈과 씨름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거짓말도 아니다.
***
진혁이 머리에 흰 눈을 가득 이고 마당을 쓸었다.
밭이었다가 잔디밭이 된 넓은 땅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늘 밟고 사는 흙마당은 눈을 쓸어줘야 한다. 아무리 땅이 단단해도 눈이 녹으면 진창이 되기 십상이니까.
머리를 털고 들어온 진혁이 엄마를 찾았다.
겨울방학도 한창인데 뭔가 이상했다.
“수정이네는 이번 겨울방학 때 안 내려와요?”
“수정이도 동생 생긴대.”
“······.”
이전 삶에서 홍수정은 외동딸이었는데?
세상에, 하와이는 그런 곳이었나.
전생에 해외연수로 몇 번을 갔어도 낮에는 관광하고 밤에는 조용히 쉬고 온 게 전부였는데.
‘내가 그땐 정말 헛살았었구나.’
다시 그 시대로 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지만.
매년 방학 때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던 녀석이 오지 않는다니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주 일시적인 공허였다.
- 오빠! 우리 엄마는 내가 평범한 아이들이랑 어울리는 법을 배우라고 학원을 보내는 거래. 아무래도 동네가 이래서 부잣집 애들이 많으니까. 근데 그럼 뭐해? 학원도 같은 동네에 있는데. 우리 엄만 사람은 괜찮은데 어딘가 좀 모자란 거 있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사촌들 다 있는 튜터가 없어.
“어, 그렇구나. 수정이는 튜터가 있으면 좋겠니?”
- 꼭 그런 건 아냐. 튜터가 인생을 가르쳐 주는 건 아니니까.
“어, 어. 그래. 수정이는 벌써 생각이 깊구나.”
- 오빠, 내가 내일도 전화할 테니까 받아. 알았지? 왜냐면 내일은 내가 재밌는 걸 할 예정이거든. 어디 보자, 내일 스케줄이······.
그나마 아직 휴대전화가 보급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홍수정의 전화를 외면하기엔 전생에 지켜본 그녀의 외로움이 너무 깊었다. 홀로 남겨진 고단함에 더해 남루한 피로를 얹고 살던 진혁조차 홍수정을 보며 애잔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이번 생엔 잘 해주기로 했으니까.’
저러다 말겠지.
지난 생에 그랬듯 3년만 지나면 유학을 보내지 않을까.
재벌집 딸이니까.
***
펑펑 눈이 쏟아지는 어느 날, 한밤중에 난리가 났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장군이가 드디어 진통을 시작한 것이다.
여섯 살이 다 되어 맞는 늦은 초산이었다.
2층 제 방에서 내리는 눈을 구경하던 진혁이 낑낑- 앓는 소리에 나가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터였다.
진혁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현관에 기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장군이 새끽-!”
괜스레 울컥한 나머지 목이 컥 막혔다.
간절함과 염려를 담아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낳으려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