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을 밟고 (4) >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현관을 나선 진혁은 거실 앞 덱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밤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발을 날릴 듯 회색빛을 품었고, 겨울을 알리는 차가운 공기는 구름을 닮은 물기를 가득 머금었다.
코를 실룩인 진혁은 아빠처럼 동네 바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질어질하게 변한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
‘인생이 완전히 딴판으로 흘러가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황당해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도 계시고 동생도 둘이나 생기게 되었으니, 이건 분명 축복이었다.
잔잔했던 가슴에 새삼 감동이 파동쳤다.
한편으론 나이 차 많은 동생들에 염려도 되었다.
‘와씨, 동생들 뒷바라지하려면 진짜 땅문서라도 빼돌려야 하는 거 아닐까?’
지하실 금고에 있는 것 같던데. 비번이 뭘까, 추리하는 진혁의 미간이 오므라들었다. 물론, 실제로 훔칠 마음은 없었다.
따라 나온 손광연이 진혁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벤치에 앉아 웅크린 아들의 심정을 어설피 짐작하며.
“아들, 회사 이름을 동생 이름으로 정해서 서운해?”
“그런 거 아니에요.”
충격을 받은 듯한 진혁의 모습이 걱정되었을까, 한유영과 손유진도 담요를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가족이 모두 모이니 장군이도 무거운 배를 끌고 덱으로 올라왔다.
우쭈쭈-, 진혁은 장군이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아빠와 시선을 마주했다.
“회사 이름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그게 좋을까?”
이유를 물어야 정상이거늘, 손광연은 진지한 아들의 표정에 따져 묻지 못했다.
“유성은 휙 하고 지나가거나 땅에 떨어지면 세상이 망할 수 있잖아요.”
“오, 그럴싸한데?”
“어머나? 정말요.”
한유영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동의를 표했다.
진혁으로서는 둘러댄 말인데 부부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반짝하고 말거나 망하기 좋은 이름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손광연은 아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회사 이름 좋은 게 뭐가 있을지 다시 고민해보자. 바꾸면 그만이니까.”
한유영은 한술 더 떴다.
“그럼 바꾸는 김에 아기 이름도 다른 걸로 할까 봐요. 유진이는 동생 이름이 뭐였으면 좋겠어?”
“데지 맛있지요?”
아, 유진아.
눈이 풀린 걸 보니 아무래도 잠이 덜 깨어 헛소리를 하는 꼴이다.
유진이 의견은 제외하는 게 좋겠다. 손돼지는 좀 아니잖아.
아닌 밤에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당장 급할 건 없겠으나 말이 나온 김에 결정을 하자는 손광연의 말에 의견이 모였기 때문이다.
“유명? 유정? 유도? 유혁? 진수? 진호? 진진?”
“유진? 아, 이미 있지.”
한유영이 옆머리를 긁었다.
뭐가 좋을까, 우리 가족과 어울릴 이름이 뭐가 있을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진혁은 잠시 찾아온 빈틈을 놓치지 않고 느릿느릿 말을 꽂았다.
“정원.”
아빠도, 엄마도 숨을 멈췄다.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가 남다른 까닭이다.
“돌림자 쓰는 것도 아닌데 ‘유’나 ‘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정원이라는 이름이 어떨까 싶어요. ‘언덕 정’에 ‘동산 원’으로요.”
외로운 이름이었다.
홀로 우뚝 서서 비바람을 맞는, 그 이름처럼 세파와 싸우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사람이 남긴 유일한 두 글자.
“우리가 있으니까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반대로 생각하면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큰 사람이라는 뜻도 되고······.”
그리 말하며 아빠를 보았으나 아빠는 고개를 돌리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볼과 코를 씰룩이는 걸로 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를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그래. 이름 좋다. 발음하기도 부드럽고.”
아들을 보며 온화하게 웃은 한유영이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광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시선은 여전히 비스듬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진혁은 지그시 눈감은 아빠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누가 아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제 회사 이름을 정할 차례인데······.
이 가족은 하나같이 창의성이 제로의 영역을 서성였다.
‘내가 너무 책만 봐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유전이구나.
아빠도, 엄마도 머리만 긁적일 뿐 그럴싸한 이름을 내놓지 못했다.
느하아암-.
쪼그려앉아 장군이를 쓰다듬던 유진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우리 장군이 이쁘지요?”
그때 진혁은 상단전의 열기를 느꼈다.
참으로 오랜만의 반응이었다.
단어 하나가 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제너럴.”
장군이도 가족이다.
어찌 보면 진혁에게는 가장 특별한 친구이기도 했다.
거기다 제너럴이라는 단어에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유진이가 힌트를 주긴 했으나 장군이라는 이름과 평범하다는 뜻을 모두 가진 General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터였다.
“제너럴?”
“제너럴······.”
엄마와 아빠는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엄마는 어휘의 이질감 때문인 듯했고, 아빠는 표절을 의식하는 눈빛이었다.
“글로벌하게 가요.”
장군기업은 왠지 장기용품 만드는 회사 같잖아요. 진혁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애상에서 벗어난 손광연이 환하게 웃었다.
“하하핫! 우리 아들 없었으면 평생 시도하지 않았을 일인데 따라야지. 난 찬성.”
“호호호-, 저도요.”
그렇게, 표절 논란을 뒤로 하고 손광연이 설립할 회사는 제너럴로 결정되었다.
자동차와 항공기, 설계 등의 업종에는 진출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손광연의 말과 함께.
‘유성기업 아닌 게 어디냐.’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피해야 할 이름을 피한 기분이었다.
조카뻘 동생이 생긴다는 기쁜 소식과 더불어 회사 이름까지 결정되었다.
무엇보다, 동생에게 할아버지 이름을 이어받도록 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진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
겨울방학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스포츠센터가 완공되었다.
진혁은 유진이를 안고 마당을 지나, 정원을 걸어 스포츠센터로 이동했다.
수십 미터를 걸어 수로변 트랙에 이르니 체육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곰Gym〉
한글과 영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두 음절.
마치 곰이 승천하는 듯 현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천길룡이 솜씨를 발휘해 산돌신선체로 목판에 새겨 넣은 글자가 멋스러웠다.
진혁은 악천후가 아닌 이상 늘 하던 대로 농로를 달릴 생각이었다. 하여, 센터를 가장 많이 이용할 양강욱의 별명에 Gym을 결합한 네이밍을 제안했다.
보러 올 사람도 없는데 간판이 필요하겠느냐고 아빠가 물었지만 어디 이름 없는 사람이 있던가. 건물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붙이면 보다 소중하게 느껴지고 정이 가는 법이다. SSS 요원들도 정을 붙이고 깨끗하게 관리하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체육관 안에 들어서니 가까이 사는 이웃은 모두 모인 듯했다. 진학할 대학을 결정한 최태양도 부모님과 동생 최미경을 대동했고, 조일헌과 천길룡도 먼저 와서 내부를 구경 중이었다. 멀리 사는 육성찬이나 김은정도 언젠가 방문하겠지.
“으르신, 실내에선 금연이유. 저기 써있잖유-.”
“어허허-, 그렇지. 늙은이가 실례했소.”
지이익-.
조일헌의 타박에 엄지로 담뱃불을 눌러 끄며 천길룡이 다른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성능 펌프 열 대가 끌어올린 지하수를 울트라 필트레이션 멤브레인으로 일차 이물질을 거릅니다. 그다음, 거르지 못한 미네랄은 일렉트릭 아노드로 분해를 거치고요. 하이퍼-클라리네이션 시스템의 능동 소독작용을 거쳐 네오-써큘레이팅 펌프가 순환을 시키며 한번 더 정수를 합니다.”
책임 엔지니어라고 밝힌 담당자의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며 진혁과 SSS 팀원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대부분 동공이 풀린 채 마을 이곳저곳에 영혼을 출타시킨 얼굴이었다.
공돌이가 공돌이답게 설명을 하는데. 뭐, 대충 최첨단으로 좋다는 뜻 같았다.
엔지니어는 센터 한쪽 벽에 마련된 패널로 이동했다.
배전반처럼 생긴 패널 도어를 여니 분전반과 대형 기판이 보였다.
“보드에 내장된 타이머가 있어서 물 교체주기가 되면 수영장 천장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10분 후부터 배수가 시작됩니다.”
음, 빨간불 들어오면 입수 금지라는 뜻이로구나.
진혁은 놀랍도록 발달한 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입수해도 관계는 없어요. 배수구가 바닥 벽면에 가로로 길게-, 저기 보이시죠? 원형 구멍이 아니어서 손이나 발이 끼지 않습니다. 예, 마개가 수영장 바닥이 아닌 배수관 중간에 삽입된 자동 제어식 격벽인데 이게 호주 애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채용한 뛰어난 안전성의-.”
그쯤 했으면 대충 넘어가면 좋으련만, 엔지니어의 자부심은 돔형 천장보다 높았다.
여기저기서 조용히 하품을 하고, 다리를 주무르는 모습이 보였다.
엔지니어는 여러 가지 기구와 무도용 매트가 놓인 곳에 이르러 트랙을 가리켰다.
“트랙의 둘레는 이백오십 미터입니다.”
두 개의 주로가 있는 합성트랙이 수영장과 센터를 빙 두르고 있었다.
커도 너무 컸다.
그 누구도 잔디밭과 과실수 밑에 이런 돔형 체육관이 숨어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리라.
어느덧 프리젠테이션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방공호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튼튼하게 지었습니다.”
짝짝짝짝짝-.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발표가 흡족했는지 헤벌쭉 웃었지만, 다른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공사 기간보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발표였다.
양강욱이 곰 앞발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니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아무리 영민하다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자장가나 마찬가지였다.
두 손을 나팔처럼 만든 손광연이 이웃들을 향해 외쳤다.
“바쁘지 않으실 땐 언제든 편하게 와서 이용하세요! 여기 동생들이 수영도 가르쳐 주고 배드민턴도 같이 쳐줄 겁니다!”
그의 인품을 익히 아는 이웃들은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농사일이 아무리 바쁘다 한들 하루 한두 시간 수영할 시간이 없을까.
최장환과 김순복은 이미 수영복을 구입한 상태였다.
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잠을 깨운 양강욱이 성대에 힘을 가했다.
“자-! 에스에스에스 전원은 도복으로 환복 후 내빈께 무도 시범을 보이도록 합니다!”
곰이 포효하는 소리가 돔 내부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에게는 군인으로서 몸에 밴 식순일 것이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보기 드문 행사였다. 모두 반짝이는 눈으로 매트 주위에 빙 둘러섰다.
흰색 유도복을 갖춰 입은 양강욱이 매트에 오르자, 맞은편에서 명현우가 등판했다.
그때, 양강욱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나는 기오 땅-.”
진혁은 양강욱의 말을 받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위다!’
“-전위다!”
큭-. 저 양반 여전하네. 여전한 게 아니라 젊을 때부터의 버릇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테지.
곰 팀장의 행동이 익숙한 SSS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고, 빙긋 웃는 사람은 양강욱의 버릇을 아는 진혁뿐이었다. 이웃들은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이었다.
양강욱은 과거에도 대련을 할 때면 저렇게 외치곤 했다.
다른 영웅들도 많은데 왜 전위냐고 다른 부하가 물은 적이 있다.
- “전위야말로 군인의 표상이다. 제 한 몸 보살피지 않고 목숨을 바쳐 지킬 것을 지킨 영웅 중의 영웅이지.”
심야에 장수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조조를 구하기 위해 숙소를 지키다 전사한 일을 두고 하는 설명이었다.
그의 해석을 들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남자 중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 나는 하동사람 관우다······.”
좌중을 둘러본 명현우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얼굴이 벌겋게 익어있었는데, 아무래도 동네 사람들 앞이라 창피할 수밖에.
꾸웅-!
대련이 시작되고 몇 번의 잡기 싸움이 벌어졌을까. 명현우가 허공을 크게 돌아 등으로 떨어졌다. 공격도 깔끔했으나 찰나 지간에 펼치는 명현우의 낙법도 완벽에 가까웠다.
명현우를 일으킨 양강욱이 외쳤다
“다음은 누가 이 전위를 상대하겠는가!”
귀청을 때리는 소리를 애써 외면한 진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떨궜다.
‘좀 부끄럽네.’
그 겨울, 아빠와 미꾸라지 잡을 때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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