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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10화 (110/338)

< 계절을 밟고 (3) >

진혁은 한시도 박대순을 잊은 적이 없다.

박대순은 처자식을 데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야반도주했다. 동네 어른들은 사이비종교에 빠져 그런 선택을 한 거라 수군댔으나 절친이었던 조일헌의 반응은 달랐다.

- “절대 이상헌 디루 빠질 눔이 아니라니께!”

사람들은 조일헌을 허풍쟁이로 치부하지만, 진혁은 평소에도 조일헌을 신뢰하는 편이다. 다소 과장된 언행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안에 알토란 같은 진실이 웅크리고 있음을 자주 경험한 까닭이다.

아빠에게 듣기로, 부부에게 해루질을 제안했던 사람도 박대순이라고 했다. 데리러 올 테니 물길에서 기다리라는 말도 남겼다고. 어둡고 심란한 그믐의 갯벌이니 의지할 사람 없는 부모님은 그의 말을 철석같이 따랐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잊으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한번 움튼 의심은 쉬이 가라앉는 법이 없었다. 뭔가에 몰두하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차갑게 식었으니.

슥슥- 칼을 놀리며 문석일이 진혁의 눈을 응시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놈이 아닌데 뭔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니 호기심이 동했다.

“누굴 찾고 싶은 거니?”

“박대순이라는 아저씨요.”

문석일은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눈빛이었다.

굳게 다문 입과 강직한 턱이 진혁의 눈에 들어왔다.

“이 동네 살다가 5년쯤 전에 갑자기 사라졌어요.”

“단서가 될만한 건?”

“남매를 뒀어요. 열네 살, 열두 살.”

“찾기 쉽겠네. 애들 학교는 보내야 할 테니.”

학교에 보내려면 전입신고는 필수다.

일반인들이야 누굴 찾으려면 무슨 수를 써야 하는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못 잡는 경우가 많겠지만 문석일에게 사람 찾는 게 어디 일 축에나 들던가.

“급한 일이니?”

“아뇨.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처리는?”

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처리라니, 이 양반이 누굴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이러나?

찾으려는 이유조차 묻지 않는 건 고맙지만 너무 넘겨짚는 것 같지 않은가.

싸늘한 시선을 받은 문석일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만 확인해 주세요. 잘살고 있는지, 애들 고생은 않는지······.”

“그래.”

두 남자의 시선이 다시 감으로 향했다.

사각사각-. 헥헥-.

잠시 감 깎는 소리와 김인랑이 내는 숨소리만 들렸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얘기하실 거예요?”

들릴 듯 말 듯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불만스러운 말투였다.

문석일의 뒤에 홍기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찔러봤다.

이들에게도 경제적 지원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홍기준에게 보내기는 했으나, 홍기준과 이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홍기준이 아무리 진혁을 아낀다 한들 아무 조건 없이 이들을 거두지는 않았으리라. 근로계약서가 아닌 당사자 간 직접계약으로 묶어 활용방안을 찾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

뜻밖이라는 듯 문석일이 눈썹을 들썩였다.

“보고는 해야지.”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감시까지는 아니어도 특이사항은 보고하는 조건으로 진혁에게 이들을 붙이는 그림이 그려졌다.

뭐, 좋을 대로 하라지. 보호하라는 의미였을 테고 진혁은 나름대로 이들을 활용하면 그뿐이다.

어차피 홍기준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사는 건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진혁 인생에 최고의 조력자는 홍기준이다.

조용한 두 사람 사이를 김인랑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헥! 헥! 진혁아! 나한테는 뭐 시킬 거 없을까?”

“없지요? 유진이 말이 좋지요? 이야! 이야-!”

“히, 히히힝-. 어흑-.”

한 시간 남짓 기어 다닌 김인랑으로서는 아무래도 유진이 말 노릇이 쉽지 않았던 모양인데, 유진이는 말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럴 땐 진혁이 구해줘야 한다. 유진이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유진아, 삼촌 힘드시겠다. 이제 내려와.”

“녜-, 에헤헤-.”

실컷 놀았는지 유진이는 고분고분 따랐다. 미련 없이 김인랑의 등에서 내려온 유진이는 따끈해진 아랫목에 누워 개구리처럼 팔다리로 방바닥을 휘저었다.

“에헤헤-, 따총도 일루 오지요?”

“그러자. 어후-, 죽겠다. 몸이 녹네, 녹아.”

누렇게 탄 장판 위에 누운 김인랑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맛을 아는 진혁이 빙긋 웃었다.

추운 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찰싹 붙어 땀이 나도록 지지면 얼마나 개운하던가.

슬라임처럼 꾸물대는 김인랑에게 말했다.

“읍내에 뉴서울다방이라고 있어요.”

“어! 거기 나도 알아. 아가씨들이 아주-.”

기계처럼 감을 깎던 진혁의 손이 멈칫했다.

가늘어진 진혁의 눈을 살핀 문석일이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진혁이 살기를 풍기지는 않았어도 뭔가 언짢은 기색이었으니.

“-커피 잘 타더라고······.”

작게 한숨을 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혈기왕성한 총각이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많이 외로웠을 테지. 서울 변두리에 혼자 사시는 노모를 두고 온 마음도 편치만은 않을 터였다. 그렇게라도 이해해 줘야지.

“시간 날 때마다 그 사람들 동태 좀 살펴주세요.”

“아가씨들?”

반색한 김인랑이 누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빠악-!

“껙!”

문석일이 던진 감이 김인랑의 미간에 정통으로 꽂혔다.

이 눈치 없는 새끼, 그 모양이니 멀쩡하게 생겼어도 연애도 못하고 어린아이 말이나 태우고 자빠졌지. 자신도 감이나 깎고 자빠졌으면서 문석일이 눈빛으로 욕을 날렸다.

소리 없이 웃는 진혁의 어깨가 들썩였다.

문석일이 대신 화를 내주었으니 너그러운 진혁이 참는 거다.

“나한테 얘기해. 쟤는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다. 일할 때도 짐꾼이나 하던 놈이야. 힘은 좋거든.”

문석일은 기절했는지 혀를 빼물고 널브러진 김인랑을 과도 손잡이로 가리켰다.

진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따총? 코- 자요?”

유진이가 흔들었으나 김인랑은 깨어나지 않았다.

잠든 사람에게는 이불을 덮어줘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어. 착한 유진이는 엄마에게 배운 대로 김인랑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머리끝까지.

감을 숙성시키기 위해 준비한 두툼하고 무거운 이불이었다.

“자장, 자장-.”

착한 유진이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가사도 옹알거렸다.

손유진의 다독임은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형, 나 눈 다쳤나 봐. 앞이 안 보이고 어두워.”

“어둡냐? 계속 그렇게 눈치 없이 살면 네 앞날도 그럴 거다.”

얼굴까지 덮은 이불이나 걷고 얘기하든가.

그래도 문석일은 김인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돌방에 일단 누우면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 싫지 않던가.

“그래도 미안하다. 기절할 줄은 몰랐다.”

문석일이 계면쩍게 구레나룻을 긁었다.

“인변아, 아프냐?”

“당연히 아프지! 이씨-.”

김인랑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아랫목에 장시간 누워 땀을 뺀 탓에 얼굴이 번들거렸다.

코 위쪽에 코가 하나 더 자란 듯, 미간이 융기한 김인랑은 퍽 아름다운 꼴을 하고 있었다.

“진짜라니까! 부회장님 지시로 염탐하러 갔다가 커피만 마시고 왔어! 헌창이도 같이!”

“말을 하지 그랬니······.”

문석일이 에흠- 헛기침을 삼켰다.

“기밀 몰라, 기밀?”

“미안하다, 인변아.”

“미친! 땡감에 내공이라도 실은 줄 알았네. 어우- 돌덩이가 날아와서 별이 번쩍하는데-.”

문석일이 개명 전 이름까지 부르며 친근하게 굴었으나 김인랑의 분노는 좀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인랑은 진혁이 부탁하려던 일을 이미 착수한 상황이었다. 한유영을 위한 일이라며 홍기준으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아둔 터였기에.

“형, 근데 이거 되게 맛있다.”

홍기준이 무슨 일을 시켰을까 궁리하던 문석일이 얼굴을 들었다.

방금 전까지 화내던 녀석이 구운 망둥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 얘는 먹을 것만 주면 금방 풀리지. 성격 한번 단순해서 다루기 쉬운 녀석이다.

“내일 진혁이 학교 가면 망둥어나 잡으러 가자.”

“으흐흥-.”

못생겨진 김인랑이 망둥어를 물고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석일과 동료들도 서서히 시골에 녹아들고 있었다.

***

“내가 헛살지 않았나 봐요.”

평판이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않았으리라.

군수와 국회의원이 발 벗고 나선 덕에 농공단지 착공이 앞당겨졌다며 손광연이 아내 앞에서 으스댔다.

‘그럼. 평판이 전부지.’

아빠의 공치사에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그간 정리해 둔 사업계획서를 검토했다.

농산물 가공, 친환경 비료 제조, 사료 공장, 식품 제조, 연구소. 생산라인에 자동화 설비를 구축한다 해도 제조 인력이 많이 필요한 업종이었다. 거기에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관리할 직원과 품질관리를 위한 전문인력도 뽑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품질 향상도 필수다. 그렇다면 연구직도 채용해야 한다.

‘거기에 납품까지.’

유통은 유통망을 갖춘 세인유통에서 맡기로 계약을 한다 해도 전국 다섯 군데 거점까지는 화물차가 오가야 하는 구조였다.

단번에 여느 중소기업을 뛰어넘는 덩치가 되어 버렸다.

아빠와 대화를 하며 말을 보탰으니 규모를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으나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벌이는 건 아니겠죠?”

자신도 공범인 주제에 진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빠가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아들로서 걱정되는 마음도 어쩔 수 없으니.

“하려면 제대로, 널리 알려지게 해야지.”

아빠는 유명세를 즐기시는 분인가?

그런 사람이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손광연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근엄했다.

“아무도 우리 가족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미국의 유명한 부자가 했던 말 아니었나.

분명 들어본 말이다.

어설픈 부자에게는 강도가 들지만 유명한 부자는 뭐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홀로 지내는 게 익숙했고 세상일에 관심 없던 진혁에게는 곱씹을 가치도 없던 말이었다. 그런데 아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하시는 김에 김치랑 도시락 제조도 하시면 어때요? 엄마 레시피대로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김치? 그건 집에서 담그는 거잖아.”

손광연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88올림픽 이후 김치제조업이 활기를 띄는 중이긴 했다. 그러나 김치는 집에서 엄마 손맛으로 찹찹 만드는 거 아니었나?

“나중에 여력이 되면요. 인근 지역 군부대나 학교 대상으로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학교? 도시락 싸서 다니잖아.”

“뭐-, 언젠가 학교에서 해주는 밥 먹는 날도 오겠죠. 미국 드라마 보면 그러잖아요.”

진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학교급식은 기숙사가 있는 학교의 일이었고 전국적으로 시행되려면 20년은 걸릴 것이다.

“손이 많이 가고 채용 커트라인이 낮은 업종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업종이 다양해지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도 많을 테고요.”

손광연의 눈이 빛났다.

오, 역시 우리 아들. 다각화를 모색하면서도 이웃을 생각하는구나.

초롱초롱한 아빠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진혁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회사 이름은 정하셨어요? 사업자 있어야 공단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편의를 많이 봐줘서 사업계획서와 보증으로 신청이 가능해. 입주 전에 등록하면 돼. 회사 이름은 유성기업으로 할까 하는데-.”

반쯤 감겼던 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들어본 이름인데?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의식 저편에서 피해야 할 이름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유성은 안 돼요!”

진혁의 외침에 손광연과 한유영이 화들짝 놀랐다.

엄마에게 안겨 졸던 유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그러니?”

“다른 이름 생각해두신 건 없어요? 왜 그 이름이에요?”

험!

갑자기 헛기침을 하는 손광연을 대신해 한유영이 대답했다.

“동생 이름이랑 똑같이 지으려고.”

“예? 동생?”

“응!”

한유영이 반짝이는 눈으로 아들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나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 홍수정과 닮아 있었다.

“태몽을 꿨는데 맑은 밤하늘에 커다랗고 눈부신 별이 엄청 빠른 속도로 엄마 치마폭으로 슈우욱-.”

한유영은 한 손으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이처럼 순진한 아내를 보며 손광연이 바보처럼 헤벌레 웃었다.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동생이라뇨. 태몽이라뇨.

회사 이름을 유진이 이름으로 해도 아무 불만 없는 진혁이다. 그런데 그 동생이 아직 없는 동생이라는 데에서 진혁은 큰 혼란을 맞이했다.

진혁은 말도 못하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가 결정타를 날렸다.

“엄마 느낌에 아들인 거 같아.”

진혁이 멍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부모님은 서로 손을 맞잡으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누가 보면 속도위반이라도 한 커플로 보겠네.

진혁의 영혼이 옥상 어디쯤을 헤맬 때, 졸다가 깬 유진이가 아직 부르지도 않은 엄마 배를 문질렀다.

“애기, 애기. 내 동생.”

하와이 허니문 베이비.

열네 살이나 차이 나는 남동생이 여름에 나올 예정이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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