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을 밟고 (2) >
***
양강욱이 말을 꺼내기 전에 손광연이 먼저 짚어냈다.
SSS가 품고 있을 일말의 의구심 말이다.
문석일을 통해 지침을 전달받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중학생이 경호팀을 통제하는 상황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요인의 아들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어린 학생 아닌가. 어른의 자존심을 모를 리 없는 손광연은 갈등이 생기기 전에 드러내기를 원했다.
물론, 양강욱은 진혁에 대한 불만이 없다. 첫눈에 제 진가를 알아보고, 평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준 사람이니까.
그래도 중학생은 너무 어리지 않나······.
“나보다 나아요.”
“예?”
“우리 아들이 나보다 낫다고. 아마 내가 없었어도 홍기준이 우리 아들에게 양 팀장을 붙였을 텐데 너무 개의치 않았으면 좋겠군요.”
“예. 알겠습니다.”
양강욱은 더 묻지 않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손광연은 앞좌석에 앉은 양강욱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정이 많은 사람처럼 보여도 홍기준은 손광연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냉정하다. 대학 시절 손광연은 홍기준에게 ‘옆에서 누가 죽어도 공부만 할 놈’이라며 욕을 했다. 실제로 맹장이 꼬여 죽을 뻔했는데 홍기준 그 새끼는 공부만 하느라 기절한 후에야 앰블런스를 부른 업적이 있었다.
‘드런 새끼.’
큭-. 그날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 한편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홍기준은 심각한 줄 몰랐다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며 내내 미안해했다.
아무튼, 이득이 되지 않을 일을 위해 저리 발 벗고 나설 친구가 아니다. 손광연은 홍기준의 최종 목적에 아들 진혁이 있음을 꿰뚫고 있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투자하려는 거다.
유세라도 그렇다. 나사가 몇 개 풀어진 여자 같지만 태생이 재벌가 출신이다. 셈과 정치로 뇌리를 밝히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그런 것일 테니 생존을 위해 마땅히 체화시킨 처세가 뭇 여인과는 다를 터.
외광내강. 겉모습은 미쳤지만 속은 강철 같은 여자가 남편에게 휘둘려 부창부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 잘 지키고 잘 키워서 써 봐라.’
물 한 방울 없는 수로에 놓인 다리를 손광연을 태운 차가 서행으로 건넜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저 멀리 커다란 감나무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
감은 주로 찬바람이 불 때 땄다.
진혁도 이유는 모른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저 다른 집 어른들이 하는 걸 보고 흉내나 내는 거다.
바쁜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과실이 얼기 전에 따다 보니 대충 시기가 그렇게 된 거 아닐까. 이파리도 없이 열매만 매달려 주황과 갈색의 조화를 이루는 감나무를 털며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뭐, 어떻게든 먹으면 되지.’
한때 로봇처럼 매뉴얼대로 살던 놈인데, 새로이 몸이 익힌 시계에 의존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날로그 감성이로구나.
툭-, 뚝-.
한참을 하하호호 웃던 오누이가 말을 잃었다.
진혁은 진혁대로, 유진이는 유진이대로 지친 탓이었다.
“하이고옹-, 힘드러워요.”
마침내 유진이가 감나무 밑에 풀썩 주저앉았다.
유진이는 귀달이 모자에 달린 방울 하나를 끌어다 코를 스윽 문질렀다.
털실로 짠 방울에 맑은 콧물이 묻어 햇살을 받아 빛났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기의 눈이 가운데로 몰렸다.
“우리 애기, 많이 힘들어?”
“녜-. 에헤헤-.”
유진이는 웃고 있었지만 눈이 풀려 있었다.
아직 마무리하려면 멀었는데.
“유진이도 들어가서 쿠키 먹어.”
동생을 살피니 뺨은 빨갛게 익었고 코에서는 맑은 콧물이 흘렀다.
“으응-, 으응-.”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유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빠와 있는 게 더 좋다는 뜻이겠지.
“하이고오-.”
조막만 한 손으로 어깨도 토닥토닥 두드렸다.
생긴 건 요정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시골 노인네다.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어른들을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들이니 저절로 나오는 행동일 거다.
“아아-, 어쩐다?”
진혁은 뻐근한 목에 손을 얹고 감나무를 보았다.
원줄기가 뻗어 올라가다가 새총처럼 갈라진 곳에 껍질이 모두 벗겨졌다. 어릴 때면 매일 낑낑대며 올라가 놀던 진혁의 성화를 못이긴 것이리라.
‘고맙다. 너도 내 인생에 그림 하나를 남겼구나.’
그때는 머리보다 높았는데, 이제는 가슴팍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진혁은 한때의 놀이터를 쓰다듬는 손길에 온기를 담았다.
그래도 감나무답게 장대가 닿지 않을 만큼 여전히 높고 크다.
“유진이는 쉬고 있어.”
“으으응-.”
유진이는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투-, 손에 침을 뱉은 진혁이 다시 장대를 잡았다.
할 일을 남기면 손진혁이 아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부모님과 동생이 아니었다면 모조리 까치나 먹으라고 뒀을지도 모를 일이나, 안타깝게도 이 집 식구들은 먹는 걸 너무 좋아한다.
‘나는 간단히 쌀밥에 고깃국이면 되는데.’
진혁을 제외한 가족은 온갖 주전부리를 탐한다.
나만 주워온 자식인가. 그러고 보니 나만 평범해. 진혁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머리를 계속 굴렸다. 단순 노동을 하며 지치지 않기 위한 진혁 나름의 요령이었다.
그때 지원군이 당도했다.
“도와줄까?”
“좋죠.”
농약 모자를 쓴 SSS 삼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장대를, 어떤 이는 포대를 들었다.
원래는 일상에 개입하지 말라 일렀으나, 어차피 함께 사는 세상이니 때론 도움도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SSS와 나누어 먹을 겨울 간식이기도 했기에 진혁은 이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 저건 익은 것 같은데?”
누군가 말하기 무섭게 홍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낙엽이 많이 쌓인 곳이어서 다행히 으깨지지 않았다. 홍시 맛을 아는 정상태가 입맛을 다시며 잰걸음을 놀렸다.
“어어? 야 인마!”
헤헤헷-!
그러나 장군이가 한발 빨랐다.
몸이 무거워 요즘 집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녀석인데, 홍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와서는 재빨리 물고 도망쳤다. 누가 쫓아오지는 않는지 연신 돌아보며.
와하하-!
정상태가 허망하게 개 꽁무니를 보는 사이, 남자들의 호탕한 웃음이 찬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고, 우리 장군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진혁은 코끝이 시큰했다. 눈시울도 뜨거웠다.
가족이 주기 전에는 음식을 탐하지 않는 녀석인데, 밥이 부족하지도 않은 장군이가 새끼를 배니 입이 궁금한 모양이라 생각했다. 저 말도 못 하는 작은 녀석이 새끼 때문에 저런다고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뽀미 이 자식, 다음에 만나면 중성화를 확······.
***
흠칫-!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니 목에 걸린 분홍 리본이 살랑거렸다.
덜컹, 대문이 열리고 낯익은 사람이 들어서자 뽀미가 꼬리를 흔들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사모님 입덧하신다고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빠도 참······.”
아끼는 딸이 늦둥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유명선은 딸이 좋아하는 쿠키를 권제학 편에 한아름 들려 보냈다. 홍콩에 있는 세인무역 사장을 들들 볶았다는 설명도 권제학은 빼놓지 않았다.
“안정이 우선이라고 스포츠재단 업무는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떠냐는 말씀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전화로 한 얘기를 권 아저씨한테 또 하는 건 무슨 경우래?”
유세라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도 딸을 아끼는 마음에서 잔소리를 하는 거라 생각하니 싫지는 않았는지, 능숙하게 쿠키 상자의 포장을 벗기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 그래도 수정 아빠가 당분간 맡아주기로 했어요.”
“그렇다면 회장님께서도 안심하시겠군요.”
권제학이 사람 좋게 웃었다.
물어볼 것이 생각났다는 듯, 유세라가 쿠키를 오물거리며 눈을 키웠다.
“참! 시골 공사비 다 아빠 사비로 대셨다면서요?”
“예. 경호동부터 체육센터, 수로와 트랙 조성까지 회장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위가 좋으신가?”
유세라가 눈을 모로 세웠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큰아들이 스무 살이 됐을 때 차를 세 대나 사주신 아빠였으니 일면 이해는 하면서도 너무 큰 돈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같은 유세라의 표정을 보며 권제학이 모처럼 웃음을 보였다.
“회장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지난번 광연 씨 가족 왔을 때 선물을 하기로 했다고 하시더군요.”
으음-, 선물. 유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제학이 집 쪽을 기웃거렸다.
“수정이는 어디 갔나요? 온 김에 얼굴 보고 가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요. 수정이가 권 삼촌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요즘 바빠서요.”
“학원에 갔나 보죠? 아빠를 닮아서 공부에 욕심이 있나 봅니다?”
어릴 때부터 책만 펴면 침을 흘리며 자던 유세라의 모습을 기억하는 권제학으로서는 차마 엄마를 닮은 거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학원은 학원인데 공부 학원은 아니에요.”
유세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딸의 욕심이 욕심은 욕심인데 공부 욕심은 아닌 까닭이다.
홍수정은 운동에 미쳤다.
징역 오빠를 닮으려면 키가 커야겠다며 발레와 체조, 수영, 태권도, 테니스 등등 코치를 구해 운동을 하는 중인데, 어둑해질 무렵 녹초가 되어서야 집에 온다.
‘뭐, 덕분에 쿠키는 내 차지지롱.’
쿠키가 전보다 몇 배는 더 맛있어진 느낌이었다.
살찌려고 이러나?
***
장정들이 힘을 합쳐 해가 떨어질 무렵까지 감나무를 턴 결과, 세 가마니가 넘는 감을 모았다.
‘최미경 이 자식, 쿠키만 먹고 가버렸어.’
최미경 청소년의 대바구니는 양강욱이 전해주겠다며 들고 나섰다.
어둑해진 밭둑에 비친 그의 실루엣은 정말 곰과 흡사했다.
아담한 흙집 안방에 칼을 든 사내 몇 명이 둘러앉았다.
에흠-, 슥삭-사각-.
헛기침 소리와 감 껍질 벗기는 소리만 들렸다.
일부는 껍질을 벗겨 곶감을 만들고, 일부는 대야에 담아 이불을 덮어 숙성시킬 셈이다. 숙성되는 동안 술 냄새 비슷한 쉰내가 나겠지만 영 못 맡을 냄새는 아니다. 어차피 이 흙집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속도가 붙을 거라 생각했건만, 진혁과 문석일을 제외한 사람들은 과실의 낭비가 지나쳤다.
“상태창 삼촌은 아궁이에 불 좀 때주시면 어떨까요?”
마침 방안이 쌀쌀했고, 콧물을 흘리는 유진이가 신경 쓰였다.
“어, 그럴까?”
“불 지피기 전에 솥에 물 받는 게 좋겠지?”
과도질이 서툴러 아궁이 담당으로 좌천된 정상태와 강헌창이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처마에 망둥어 걸어둔 거 말랐으니 구워 드시면서 하세요. 맛있을 거예요.”
그 말에 김인랑의 귀가 말처럼 쫑긋거렸다.
“그럼 나도 불이나 때러-.”
“안 되지요? 따총은 말 해야지요? 이야-!”
김인랑은 어쩔 수 없이 유진이를 태우고 안방을 계속 돌아야 했다.
네발로 기어 다니는 김인랑을 보며 문석일이 웃음을 삼켰다.
‘생각할수록 골때리네.’
특수부대원을 거쳐 해결사 노릇을 하다가 어쩌다 보니 이런 촌구석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소속은 그룹 계열사 보안기업이다.
새벽에 일어나 구봉산까지 뛰어갔다오는 손진혁의 꽁무니를 따라 구보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녀석이 강요한 건 아니다. 그거라도 해야 몸을 쓸 것 같아 모두 자청한 것일뿐.
진혁이 호빗벙커로 이름 붙인 숙소 겸 사무실에서 조리원이 지어준 음식으로 맛있는 끼니를 해결하고, 주 업무는 진혁과 SSS 팀의 가교역할이다. 거동수상자가 나타나지는 않는지 감시도 하고 마을 일손도 돕는다.
오늘은 하루 종일 김은정네 비닐하우스에서 쪽파를 다듬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마을 순찰을 돌다가 집주인과 눈이 마주치니 발이 저절로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더라.
‘말로만 듣던 시골 인심인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잠재우려 과도를 든 손등으로 코를 슥 훔쳤다.
그저께는 조일헌과 구봉산을 누비며 약초를 캤다.
생존 훈련을 받은 문석일에게도 낙엽 질펀한 깊은 숲에서 약초를 찾는 일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이파리와 줄기도 없는 계절인데 어찌 약초를 찾는단 말인가. 한데 조일헌은 달랐다.
겨울에 캐는 약초가 좋네, 어차피 먹는 건 뿌리니 줄기 따위 없어도 되네 하며 잘만 찾더라.
우리 체력 약한 동상 고생했다며 조일헌이 더덕도 몇 뿌리 줘서 조리원에게 주니 더덕 양념구이를 해줬다. 양강욱에게도 따로 한뿌리 줬는데, 아내가 좋아하겠다며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말도 못한다.
하여간,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고 있다.
‘이제는 방바닥에 앉아서 감을 깎고 있네.’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눈이 충혈되도록 뭔가에 집중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계절을 밟아본 게 얼마 만이던가. 입꼬리가 흐뭇하게 호선을 그렸다.
문석일을 슬쩍 곁눈질한 진혁이 입술을 달싹였다.
“가족분들은 안 오신대요?”
“얘기 중이야.”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진혁은 그저 이들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넨 제안이었다.
다른 SSS 팀원들처럼 가족이 읍내에라도 거주하면 좋지 않을까.
그래도 문석일은 가족과 자주 연락하고 살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분주히 놀리던 손을 멈춘 진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좀 찾아주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