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08화 (108/338)

< 계절을 밟고 >

진혁은 과거, 보고 배울 사람이 없었다.

세간의 존경을 받거나 팬덤을 갖춘 사람들도 그저 이족보행을 하는 자유 연산자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진혁이 그만큼 폐쇄적 사고를 했다는 뜻이다.

보고 배울 것은 오로지 책과 활자뿐이었고, 롤 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은 위인전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참고할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얼마 전 아빠가 SSS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나 따라다닐 거면 농사꾼처럼 입고 삽 들어요.”

뭐, 추수도 마친 시점이라 할 일은 없겠지만 농부는 빈손으로 경작지를 둘러보는 일이 없다. 삽을 들고 다니며 무너진 논둑을 보수하고, 밭의 잡초도 삽으로 뿌리째 떠서 뒤집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뒤집은 잡초에는 삽으로 팡팡- 매질도 한다.

아무튼 SSS 요원들에게는 반가운 소리였다.

적어도 손광연이 외출할 때는 함께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호응을 확인한 진혁은 한술 더 떴다.

SSS가 시골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는 방법이었는데, 양강욱은 물론 다른 요원들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현지인으로 위장하는 것도 하나의 작전이라며.

그렇게.

초록색 모자를 쓰고 삽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마을에 늘어갔다. 노란색 실로 큼지막하게 오버로크 스티치 된 농약 이름이 천연덕스럽다. 싹수리, 이걸확, 구라목손······.

진혁은 틈날 때마다 요원들을 모니터링했다.

“아······, 자연스럽지 않잖아.”

농부라기보다는 어느 집이 비었는지 두리번거리는 소도둑처럼 보였다. 아, 저 삼촌은 바지가 너무 꽉 끼어서 변태 같다. 색상마저 살구색을 선택한 탓에 멀리서 보면 완벽한 하의실종 패션이다.

옥상에서 무릎에 유진이를 앉히고 책을 읽어주던 진혁이 한숨을 쉬었다.

즉시 일지에 개선사항을 적었다.

「연출 다양성 및 의복 건전성 제고」

뭐, 이렇게 쓰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그나마 관찰력과 학습능력이 좋은 요원들이 있어 날이 갈수록 차츰 나아졌다. 누군가는 장작을 패고, 누군가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했다. 누가 보면 머슴이라도 부리는 것 아니냐 할 수 있지만, 분명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내부에만 머무르는 요원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SSS는 나돌아다니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삼촌, 식혜 좀 드세요.”

“앗! 감사합니다!”

어슬렁거리다 보면 요인 사모에게 맛난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호빗벙커에서 먹는 음식과는 감히 그 맛을 비교할 수 없었다.

요원들과 평상시 대화를 하는 사람은 주로 한유영과 유진이였다. 늘 집에 있는 이는 모녀뿐이었으니까.

“따총이에요, 아지찌에요?”

“하하, 삼촌이야.”

“아-. 따총 어부바 잘해지요?”

“응?”

어린아이가 까치발로 서서 만세를 부르는데 무슨 뜻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유진이 레이더에 잡힌 요원은 이렇게 어부바 업무가 추가되었지만 오히려 그가 더 즐기는 듯 보였다.

업무와 무관하게 낚시를 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진혁조차도 ‘직장 생활할 때는 땡땡이도 치고 그러는 거’라며 정상근무로 인정했으니. 할 일 없는 촌구석에서 그런 재미라도 없다면 버티기 힘들 거라는 위로가 담긴 판단이었다.

암벽 등반에 사용할 거라며 새끼줄을 꼬는 요원도 있었는데, 진혁이 보기에도 실사용이 가능해 보였다. 굵기가 줄다리기 밧줄보다 굵었다.

‘어지간해선 안 끊어지겠어.’

일부러 그렇게 꼬라고 해도 못하겠다. 진혁은 혀를 내둘렀다.

가끔 벌에 쏘여 눈이 퉁퉁 붓는 요원도 있었는데 의무요원이 있어 안심이었다. 가을 벌은 발견하기도 힘들지만 일단 쏘이면 초상 치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라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산에서 맞닥뜨리는 벌은 대개 말벌이었다.

어떻든 간, SSS는 정적인 시골 풍경 속으로 하나둘 녹아들어 갔다.

사건 사고를 일지에 기록하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의무요원 두길 잘했지. 없었으면 벌 쏘였다고 조일헌 아저씨가 된장 발랐을 거야.”

진혁의 발치에 누워 꼬리를 흐느적거리던 장군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된장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듯한 모습은 착각이겠지.

장군이는 이제 누렁이 밥을 빼앗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룩하다.

진혁은 여전히 제 곁을 지키는 친구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산달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배가 그다지 많이 처지지 않았다. 젖이 불은 걸 보면 분명 새끼를 밴 것 같은데 희한한 일이다. 김은정네 개는 배가 땅에 끌리도록 처지고 새끼도 여덟 마리나 낳던데.

“장군이는 새끼 몇 마리 낳을 거니?”

눈을 지그시 감고 진혁의 손길을 즐기던 장군이가 고개를 한번 까딱거렸다.

헤헤헥-?

갸웃대는 걸 보면 저도 잘 모른다는 소리겠거니.

진혁은 일지를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금 평화를 찾아가는 와중 불만스러운 게 있었으니.

‘주 5일 등교는 언제부터냐.’

주 5일제가 된다고 해도 어차피 진혁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겠으나, 토요일에도 학교에 가려니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다니던 회사도 격주 4일 근무였거늘. 기업문화 개선을 위해 홍기준 회장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제도였는데, 직원들 반응이 좋고 실적 향상이 눈에 보일 정도여서 완전 4일제로 정착되기 직전이었다.

“와-! 감 많이 달렸다, 그치?”

빨래를 걷으러 나온 엄마가 새삼스레 감탄을 뱉었다.

진혁도 엄마의 시선을 쫓았다.

감은 늘 많이 달린다. 밭에 주고 남은 비료를 뿌리고, 가끔 숯이나 재,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는 것이 전부인데도 알아서 주먹만 한 과실을 내는 기특한 나무였다.

“아랫목에서 익혔다가 눈 내리는 날 하나씩 까먹으면 맛있겠다, 그치?”

“예······.”

상황은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요구사항은 뾰족하지 않다.

그냥 따라고 얘기하면 좋으련만, 엄마는 늘 이렇게 에둘러 말씀하신다.

그래서 더 거부하기가 어렵다.

엄마가 드시고 싶다는데 어차피 거절할 생각도 없다.

진혁은 일지를 내려두고 미련 없이 일어섰다.

“유진아, 오빠랑 감 따러 갈까?”

“녜-! 에헤헤-.”

조그만 돌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던 유진이가 벌떡 일어섰다. 졸랑졸랑 오빠를 따르니 귀달이 모자에 달린 방울이 자동차 와이퍼처럼 춤췄다.

배가 불러 몸이 무거웠을까, 장군이는 꼬리만 흔들어 오누이를 배웅했다.

***

군청에서 볼일을 마친 손광연은 시장에 들러 순대를 한 보따리 포장했다. 오소리감투라고 불리는 돼지 위장과 돼지 간도 가득 담았는데, 한유영이 특히 좋아하는 부위였다. 아내가 요즘 입맛이 없는지 식사량이 줄어서 손광연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손광연을 수행하던 양강욱이 손짐작으로 무게를 헤아려보았다.

“많이 사셨습니다.”

“하하, 입이 많으니까요.”

가족만 입이고, 혈연만 가족인가. 손광연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난 양강욱은 소리 없이 웃었다. SSS와도 나누고 아마 장군이에게도 주시겠지.

차에 올라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은 손광연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오-, 지친다. 현우 씨, 출발합시다.”

“예, 사장님.”

차창 밖으로 잔상을 남기며 흘러가는 풍경이 많이도 바뀌었다.

읍내는 날이 갈수록 커져서, 기존의 외곽도로는 중앙로가 되었고 새 외곽도로가 뚫리고 있었다.

“곰 티-, 아니 양 팀장. 저게 아마 미사일이죠?”

손광연이 가리킨 곳에 국방색 방수포를 씌우고, 그 위에 그물로 덮은 대형 화물을 실은 트럭이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아마 안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안흥에 미사일 발사기지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기밀이었다.

보통은 인적과 차량 통행이 드문 새벽에 이동하는 편인데, 아직 환한 오후 늦게 이동하는 것이 기이할 뿐.

“무슨 일 나는 건 아니겠죠?”

“아마 시험용 발사체일 겁니다.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제시간에 닿지 못한 모양입니다.”

양강욱의 설명에 손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조심스레 추측성으로 말하지만 정보만은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었다.

바쁘고 피곤하니 신경이 과민해졌다. 든든한 우군이 생기고 성채를 쌓으니 다른 것에 눈이 가는 건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평생을 불안감을 품고 살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하며 긴 한숨을 쉬는 손광연의 눈에 양강욱의 이상 행동이 잡혔다.

고개를 슬쩍슬쩍 돌리는데, 손광연이 뭘 하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어려워 말고.”

“아-, 보셨습니까?”

못 보는 게 이상하지 이 사람아. 곰대가리처럼 큰 머리로 도리도리하는데.

우스워서 홀로 어깨를 들썩이는 손광연에게 양강욱이 나지막이 물었다.

“문 선배 쪽 사람들은 감시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가볍게 한숨을 쉰 손광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 팀장, 백신이라는 거 알죠?”

“독감······.”

“맞아요. 그 백신.”

양강욱도, 운전석의 명현우도 귀를 쫑긋 세웠다.

항상 밝고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저리 진지하게 말할 때는 새겨들을 것이 많았다. 존경심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대정에 비하면 그 사람들은 아주 작은 바이러스 같은 거지.”

“면역력을 키워준 사람들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손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곰처럼 생겼지만 역시 영민하지 않은가. 여우 같은 곰이다.

“결국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부작용도 없다고 볼 수 있어요. 공포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강해지겠다는 의지를 심어줬으니 고마운 사람들이지.”

“항체군요.”

곰 팀장은 절로 흡족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니 이야기할 맛도 나고 말을 길게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들이라는 놈은 아빠보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머리가 아픈데.

누가 보든 말든 손광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음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싸우겠죠.”

항체니까.

“알겠습니다. 일부러 경계하지는 않겠습니다.”

양강욱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내 영역에서 파벌 같은 거 만들지 말아요.”

“명심하겠습니다.”

SSS 또한 하나의 직장.

정치질로 서로 편가르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회색 읍내를 벗어나 갈색 대지에 들어섰을 때 손광연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양 팀장, 홍기준 부회장 처사 중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아, 그것이-.”

몸을 돌려 손광연을 마주한 양강욱이 눈을 내리깔았다.

***

진혁은 주 6일 등교의 억울한 마음을 담아 장대를 놀렸다.

그때마다 감이 한두 개씩 장대에 달려 땅으로 내려왔다.

“와-! 오빠, 감 잘 따지요?”

직접 감을 따는 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그전에는 키가 작아 장대를 들면 균형이 맞지 않아 아빠가 따는 감을 주워 담는 일을 했었다.

무슨 품종인지는 몰라도 홍시가 되는 감이 많지 않았다. 완연한 겨울이 오기 전에 따서 곶감을 만들거나 숙성을 시켜 먹는다. 나무에 달린 채 숙성되도록 남겨두었다가 살짝 언 홍시를 겨울에 따 먹기도 한다.

똑-.

철사를 U자로 묶어 감나무 가지를 비틀면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이 따라왔다.

“까하하-!”

오빠가 감을 딸 때마다 유진이는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제가 하겠다고 덤비던 녀석이 장대를 들지 못하고 낑낑거리더니 이내 포기했다. 유진이는 가끔 바닥에 구르는 녀석들을 고무대야에 담는 일을 맡았는데, 낙엽에 미끄러지고 넘어져 뒹굴면서도 열심이었다. 고사리손이라도 거드니 일이 한결 수월했다.

혀를 빼물고 헥헥대는 동생이 안쓰러운 한편으로 귀여워 진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진혁아아아-, 유진아-.”

“언니, 안녕하졔어-.”

쟤, 왜 안 오나 했다. 최미경 청소년의 등장에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얘는 망원경으로 우리만 감시하나? 먹거리 마련할 때면 귀신같이 등장한다. 전설의 레전드급 SSS 먹귀다. 그래도 애틋한 소꿉친구라서 진혁은 늘 최미경을 챙겼다.

“나는 조금만 줘. 잠깐 다녀와서 도와줄게.”

“그래······.”

대바구니를 다소곳이 내려놓은 최미경은 집으로 향했다. 진혁이네 집으로.

야, 인마. 너 어디 가니?

“아주머니 집에 계시지?”

“어-.”

오늘 쿠키 오는 날이라고 부르셨어. 최미경의 목소리가 금세 멀어졌다.

쟤는 먹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키가 안 크네. 진혁은 꽁달거리며 더 매섭게 장대를 놀렸다. 과거의 최미경 유부녀는 아마도 고등학교 때 성장했던 모양이다.

‘우리 유진이 혼자 줍느라 힘든데 좀 거들고 가지.’

흡! 흡!

뚜직, 뚝-.

감 껍질째 먹고 똥꼬나 막혀라.

으흐흐흐흥-.

똥꼬 막혀 누렇게 뜰 소꿉친구를 생각하는 진혁의 얼굴에 절로 야비한 웃음이 걸렸다. 웃으며 장대를 휘두르는 모습이 살벌했다.

양손에 감을 든 유진이가 오빠를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우리 오빠가 죄 없는 가지를 꺾으며 비열하게 웃잖아.

유진이는 코를 훌쩍여 흐르는 콧물을 불러들이고는 큰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신기하다기보다 겁먹은 듯한 눈망울이었다.

매일 뛰어다니더니 이 오빠가 드디어 미쳤나 봐요.

아무래도 엄마한테 말하는 게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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