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기發基 (4) >
*
- “넌 군대에서 썩기 아까운 놈이다. 군대에 맞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뭘 하든 성공할 거라는 뜻이다.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더 복무하겠다면 찾아와라.”
장기복무 신청서를 찢는 대대장의 눈에는 따스한 온기와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람이 적은 곳, 힘들어서 잠이 잘 오는 곳을 택해 온 특전사였다. 월급도 고스란히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아쉬웠다. 가장 안락하게 단잠을 잘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아쉬웠지만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어차피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다. 당분간 혼자 먹고살 만큼은 벌었으니.
척-!
지휘관에게 경례를 붙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손진혁이 슬쩍 웃은 날이었다.
‘감사합니다.’
학교에는 돌아가기 싫었다.
북적대는 강의실에 다시 앉을 자신이 없었다. 일부 동기들이 연락을 해왔지만, 손진혁은 자신을 잊지 않는 대학 동기들에 대한 고마움을 뒤로하고 사회로 나갔다.
양강욱.
어쩌면 그로 인해 과거에도 홍수정을 만나 개인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리라.
*
군에 있어야 할 양강욱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할 것도 없다. 돌아온 세월만큼이나 변해 버린 세상이었으니. 진혁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진혁이 기억하기로, 가장 군인다운 사내였다.
영리했으며, 따뜻했고 누구보다 강인했다.
양강욱이 요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 “전우를 자랑스러워해라. 본 대대장은 믿고 옆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전사를 동료로 둔 여러분이 부럽다.”
그 뜻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외롭다고 했었다.
진혁은 양강욱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휘어잡는다는 말을 그를 보며 실감했다.
‘여전하시네.’
젊은 시절이라 여전하다고 말하니 좀 이상했지만 신념이 뚜렷하고 일관적인 사람이다.
세인보안서비스에서 뛰어난 인재들의 리스트를 보여주며 스카웃했겠지. 그들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을 테고. 양강욱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영리하지만 단순한 감정의 소유자였으니까.
가족과 터를 지킬 군대가 모두 모인 기분,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만족감에 진혁의 긴장감이 스르르 풀어졌다.
진혁은 축구공을 집어 들었다.
“팀장님, 족구 하실래요?”
“앗. 아아-.”
양강욱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진혁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빼는 걸 보니 그 사람 확실하네.’
양강욱은 개발이었다.
진혁은 다른 경호원들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문석일만큼은 아니어도 일반인이 범접하지 못할 기세가 대단했다. 과거 진혁과 함께 복무하던 동료들도 이들에 비하면 일반 전투병으로 상기될 정도였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진혁은 유진이를 안고 수로 공사현장으로 이동했다.
“아가, 오빠가 미안해.”
무슨 소리냐는 듯 유진이가 오빠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시멘트 반죽 연지 곤지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각자 바쁘다는 핑계로 유진이를 너무 홀로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놀아주지만, 어린아이의 에너지를 감당하며 신나게 놀아주던 아빠와 오빠의 빈자리가 상대적으로 클 것이 뻔했다.
‘내가 직접 공사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했지.’
뛰어놀던 터전이 변한다는 아쉬움 때문에 현장에 지나치게 몰입했다.
진혁도 친구가 없어 아빠가 장군이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혼자 놀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동생은 외롭지 않기를 바란 것인데 결국 챙기지 못했으니 미안할 수밖에.
“거의 끝나가는 것 같네. 투수 방지공사만 하면 되려나?”
“거의 끝났지요?”
유진이는 서운하지도 않았는지 여느 때처럼 오빠 말을 따라 했다.
투수 방지라고 말은 거창해도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고, 물을 먹여 수로 물의 대량 유출을 막는 공사만 남았다. 진혁은 세인건설 관리자에게 물을 채우기 전에 자갈과 모래를 많이 깔고 풀을 심는 공사를 추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수로 둑은 석축으로 쌓았고, 바닥만 신경 쓰면 제법 깨끗한 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며 황토와 펄이 유입되면 탁해지겠지만.
- “풀은 물속에서 죽지 않을까요?”
- “안 죽어요.”
-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풀이니까.
과거 아파트단지 연못 조성에 데커레이션 성격으로 심은 잡초가 물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보고서를 확인한 바 있다. 풀이 있는 곳은 수질도 좋았고 물고기에게 은신처도 제공해서 주민 반응도 괜찮았다고. 임기응변이 의외의 호평을 이끌어낸 셈이다.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덤프트럭을 증명하듯 준설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깊이 파지 않아 발전소나 대규모 아파트단지 토목공사에 비하면 귀여운 규모였지만 파낸 토사의 양은 엄청날 것이었다.
‘그나저나, 간척했던 땅을 다시 파내는 비효율이라니.’
이것도 직업병인가, 옛날 손진혁 팀장의 습관대로 효율이라는 말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우레탄 트랙이 들어설 곳에 서서 바다를 막은 제방 쪽을 보았다. 수문과 만난 석호까지 수로가 닿아 있었다. 저 둑만 무너뜨리면 밀물 때 바닷물도 조금씩 섞이겠지. 그럼 숭어와 잉어가 함께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아빠랑 낚시해야지.’
망둥어 낚시는 쉴 틈이 없어 다리가 아파도 내내 서서 다리를 주물러가며 했는데, 낚시 의자에 앉아 여유를 즐길 생각을 하니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행복한 상상을 하는 오빠를 유진이가 깨웠다.
“오빠, 저게 무에요?”
“응?”
유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체육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벽을 두르고 트랙 방향으로 문만 하나 낸다고 했다. 여러 군데 설치될 창으로 수로에 노을 지는 풍경을 구경하면 멋질 것 같았다.
“다목적-.”
다목적 스포츠센터 말고 유진이가 쉽게 이해할만한 표현이 뭐가 있을까.
“달리기도 하고, 쇠질도 하고-.”
“세질?”
“어-, 중량물 운동이나 웨이트라고도 하는데 웨이트에는 머신과 프리 웨이트-.”
“저건 무에요?”
기껏 공들여 설명하는데도 유진이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빠의 설명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수로 방향을 가리켰다.
“수로.”
“수로?”
“응. 물 받아 뒀다가 논밭에 물 대는 곳이야. 흐르기도 하고-.”
“저기 개울 있지요?”
유진이는 역시 흐르는 물이라고 하면 개울부터 떠올렸다.
개울을 많이 보고 자랐으니 당연한 반응이려나.
“응. 개울처럼 물이 흐르는데 엄청 많아.”
“많으면 튜브 할 수 있지요?”
그림책에서 본 해수욕장 물놀이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런데 수로에서 물놀이는 위험하지 않을까.
진혁은 유진이를 안은 채 몸을 홱 돌려 수영장을 가리켰다.
“수영은 저기서 하는 거야. 물도 깨끗해서 유진이 튜브 타기도 좋아.”
“녜-. 신났다아-!”
유진이는 물놀이할 생각에 들떠 보였다. 개울에는 바위도 많고 뱀도 있어서 못하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스포츠센터가 완공되면 겨울에도 수영을 할 수 있겠지. 유진이는 좋겠다.
동생을 안고 트랙이 생길 곳에 깔린 자갈을 밟으며 해를 쫓아 걸었다.
직접 걸리고 싶지만 아이들이 걷기엔 위험해 보였다. 둥근 자갈이 아니라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생채기가 날 테니까.
“유진아, 여기에 물이 가득 차려면 비가 얼마나 오래 와야 할까?”
“음······.”
너무 어려운 문제였을까, 유진이는 찡그린 채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그래도 천재적인 두뇌로 어찌어찌 계산을 마치고는 조그만 입을 빠끔거렸다.
“이만오만년이요.”
느허허-!
워터월드인가. 지구 멸망각이로구나.
그래, 빗물로만 채우면 오래걸리겠네. 진혁은 동생이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진이 너어-, 이과 갈 생각하지 마. 중얼거리며.
“물 많으면 배 탈 수 있지요?”
맑은 눈망울에 거대한 수로를 담으며 유진이가 눈을 빛냈다.
‘배라······.’
안전할 것 같기는 했다.
파도도 치지 않고, 경호원들도 있으니까.
“유진이 배 타고 싶어?”
“녜! 배 타면 보물섬 갈 수 있지요?”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실버 선장 놀이를 하는 유진이다.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음, 수로 한복판에 섬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할 걸 그랬구나.
“나중에 배 만들어서 오빠랑 같이 타자.”
“녜, 에헤헤-.”
일단 기말고사 준비부터 하고.
너무 바삐 달려왔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들판을 채웠던 가을이 제 자취를 지우고 있었다.
***
진혁은 바쁘다.
홍기준과 손광연이 합심해 SSS의 통제를 진혁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진혁은 전화통을 붙들고 애걸하다시피 했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인데, 그나마 홍기준이 과거의 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니 직언하던 진혁의 성격이 살아난 듯했다.
“제가 뭘 아나요. 저는 학생이라 공부도 해야 하고, 동생도 봐야 하고요-.”
사실 사업 준비로 바쁜 아빠를 위해서라도 진혁이 신경 쓰는 중이기는 했다. 가족의 일인데 진혁이 아니면 누가 나선단 말인가. 그러나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책임을 부여받는 건 그 부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적당히 거절하기로 했다.
- 월급 줄게.
“음-, 제가 아직 어려서 돈은 그다지 쓸 데가-.”
스스로 어리다고 말하는 꼴도 우스웠지만 사실 아닌가.
돈이라는 말에 살짝 흔들리기는 했으나 역시 거절하는 게-.
- 달러로 줄게.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면 도움이 되시겠어요, 아버님?”
진혁은 전화기 앞에 바짝 꿇어앉았다.
콜.
기축통화는 못 참지.
어차피 모든 요원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팀장인 양강욱만 구워 삶으면 되니까. 한데 양강욱까지 갈 일도 아니었다. 그 곰 같은 양강욱도 문석일 앞에서는 찍소리도 내지 못한다. 야수 선배님 어쩌고 하는 거 같던데.
주로 진혁의 방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진혁과 문석일이 함께 있는 공간이 곧 사무실이었다.
“음-, ‘경호원은 추가로 선발하지 않고 이동이나 장기 부재로 인한 결원 발생 시 보충만 하기로 한다.’ 이렇게 전달하면 될까?”
“네. 그리고 의사든 간호사든 의무요원 배치 요청해주세요.”
“의무요원?”
마당에서 잠든 유진이를 업고 수첩을 든 문석일이 눈을 꿈뻑였다.
갈색 선글라스를 쓰고 포대기를 두른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가만 보면 신기하다. 아이를 업어 본 건 처음이라는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둠칫둠칫 몸을 튕기지 않나. 인간의 DNA에 심어진 육아 본능인 모양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환자라도 발생하면 조치해야죠. 의료팀은 필수예요.”
“응. 그렇게 전달할게.”
“조리원도요.”
“필수지.”
고개를 끄덕인 문석일이 수첩에 슥슥 메모했다. 구부정하게 숙이고 여전히 몸을 추썩대며. 여인의 그것과는 가슴이 다르다 보니 포대기가 자꾸 흘러내렸다.
피식 웃은 진혁이 현황과 계획을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호빗벙커 한 채가 남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의무요원을 상주하도록 하면 두루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웃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여름에는 일사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고, 뱀이나 개에 물리는 사고도 발생한다.
요원들은 어차피 나이가 있고 기혼자가 대부분이었기에 읍내에서 출퇴근한다. 주거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호빗벙커는 어디까지나 근무지일 뿐, 지나치게 근접 경호하지 말라는 손광연의 요청이 있었기에 SSS는 쾌적한 땅속에 머무는 것이 일과였다. 눈만 부릅뜬 채.
그들로서는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죠?”
“음. 오토바이 탄 애들이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나쁜 짓하는 거 아니면 형님께서 그냥 두라고 하셔서 놔두는 중이야. 김춘식 선생네 암소가 유산을 했다는데 걔들 때문인지 인과 확인도 안 되고······.”
진혁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머플러에 구멍 낸 125cc급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저도 인상을 쓰는 날이 많았으니. 김은정네 소가 유산을 한 것도 녀석들이 등장한 후였다. 그렇다고 특수부대 출신자들로 하여금 고삐리들을 쥐어패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손광연은 다 한때라며 그냥 두라고 했다. 놀 줄 모르는 우리 아들이 이상한 거라며. 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아빠는 정말 화낼 줄 모르는 거 아닐까.
“요원들 요청사항 같은 건 없나요?”
“좀이 쑤시는 모양이야.”
흙과 식물로 덮인 단열 잘되고 쾌적한 호빗벙커에 있지만 갇혀 지내는 일이니 그럴 것이었다. 손광연이 가끔 경작지를 돌아볼 때가 요원들이 그나마 바람을 쐬는 시간이었다. 그들을 위한 방책이 필요해 보였다.
“이렇게 하죠.”
팔굽혀펴기를 하던 진혁이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