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기發基 (3) >
***
수로 공사는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경호동 공사는 마무리 되었다.
손광연은 SSS를 집에 초대했다.
삼에스, 트리플 에스, 에스에스에스, 에스 봉 등 호칭을 고민하다가 그냥 일일이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여덟 분이 지켜주셔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음식은 많으니 실컷 드세요.”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훤칠한 가운데 유독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웅녀 할머니의 직계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곰처럼 강인해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는 자신을 양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손광연이 그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곧 우리 아들도 학교 마치고 올 테니 식사 마치는 대로 함께 산책이나 합시다.”
***
양강욱은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졸업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가정형편이 어렵지도, 출세를 지향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왜 군인의 길을 택했느냐는 질문에서 그의 인생이 출발한다. 그러나 양강욱이 성인이 된 후 답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묻는 이가 없었으니까.
공부도 잘했지만 어릴 적부터 익힌 태권도와 유도 실력도 뛰어났다. 유도는 고교 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낼 정도로 발군이었는데, 실전에 태권도와 유도를 함께 사용하니 근방에서 주먹으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중랑구 양강욱이 어디 고등학교 누구와 붙는다더라! 이 한 마디면 전교생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할 정도였다.
공부는 어떻고, 늘 전교 10위 안을 유지했다. 양강욱보다 성적이 좋지 않던 친구가 한국대학교에 합격할 정도였으니 수재라는 칭찬이 지겨울 지경이었다.
현실이 그랬으니 양강욱은 ‘육군사관학교에 왜 지원했는가, 왜 군인의 길을 걷는가’ 하는 물음이 따를 거라 기대하며 살았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항상 준비해둔 채.
‘아무도 안 물어봐 주네?’
소위 임관 후 전방 소초장을 거쳐 중위 진급을 하게 되었을 때, 우수 장교에 대한 배려와 지원 차원에서 면담이 이루어졌다.
“특수전여단의 지휘관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 ‘왜’냐는 질문이 나오겠지. 나 같은 초초초 엘리트가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고생길을 택하는지 묻겠지. 그럼 지체하지 않고 대답할 테다. 어서 물어보거라, 말똥 세 개여.
“그래. 자네는 잘할 것 같다. 어차피 육사 출신 중 여덟 명은 특전사에 할당해야 하는데 자원해줘 고맙다. 역시 모범생은 다르구먼.”
에?
양강욱은 얼떨결에 대령과 악수 후 흑〇부대로 떠났다.
특전사 부임 후 단기간에 대위로 특진하여 팀장으로 불리는 중대장이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을 제치고 1호 대위 진급자가 된 것이다.
특전사령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귀관은-.”
그래, 물어 봐라.
내가 왜 군인의 길을 걷는지, 왜 특수전사령부를 원했는지 대답해주마. 어서 물어보거라 쓰리 스타여.
“-아주 늠름하구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게.”
“단결!”
양강욱은 이번에도 별 세 개와 악수만 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이상하다?’
학창시절에도, 생도 시절에도 친구 녀석들과 서로의 꿈을 주제로 토론을 하고, 포부를 밝히며 살았는데. 군대에 오니 개뿔 아무도 묻지를 않는다.
양강욱은 친구들과 꿈을 나누고 이상을 토론하고, 함께 혈기를 태우던 시절이 그리웠다.
산악구보를 할 때도, 천리 행군을 할 때도, 고공 강하 훈련을 할 때도 양강욱은 외로웠다.
‘아무도 사나이 가슴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그래도 군에 남을 계획이었다.
호연지기를 기르고 기상을 떨칠 유일한 조직이었으므로.
그런데 누군가 연락을 해왔다.
비즈니스 복장 차림의 젊은 남자였는데 옷 태를 보니 의복 안에 야수를 감춘 사람이었다.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세인 케미컬 명함을 내민 남자가 서류를 보여주었다.
젊고 유능한 특수부대원들의 정보였다. 해군특수전전단, 해난구조대, 특수임무대대, 이름도 처음 듣는 국군정보사령부 예하 특수부대 출신도 있었다.
남자가 찾아온 목적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양강욱은 흥분해서 물었다.
“평양으로 가는 겁니까? 그래서 본 팀장을 부른 거요? 그렇다면 당장 지원-.”
“아닙니다.”
“아······.”
양강욱의 열정이 한 번 더 꺾이는 듯했다.
남자는 자신을 설립 준비 중인 보안기업 SSS의 창립 멤버라고 소개했다.
“더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르죠. 요인을 보호하는 임무입니다.”
“요인이라면?”
“요인인데 기밀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물론, 민간 경호원 신분이 될 테니 팀장으로 불러야겠죠.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말입니다.”
팀장이라니, 생소할 것 없는 칭호였다.
양강욱이 몸담은 부대에서도 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니까.
요인 경호대 지휘관이라면 보통 실장이나 처장으로 불릴 텐데. 아무래도 민간은 다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양강욱은 서류의 인물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신체, 체력검사 정보, 사격, 무술 등 기초적인 전투력 측정부터 성격, 임무 수행능력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야수들.’
양강욱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가 한국대를 마다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한 이유, 특전사를 지원한 동기가 서류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 그래도 군복을 벗어야 한다니.’
미련일까, 양강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정장 입은 짐승이 입을 열었다.
“현재 봉급의 네 배를 약속드립니다.”
“하겠습니다.”
군복을 고집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세 달 치를 모으면 1년 치 봉급과 맞먹는구나. 수학에도 능한 양강욱이었다.
양강욱 팀은 VIP 전담 경호를 맡는다고 했다. 대통령보다 더 엄격한 경호를 요구하며,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모든 법적인 책임은 모기업에서 진다는 내용의 공증 문서까지 받았다. 경호 중 사상 시 가족 복지 또한 회사에서 평생 책임진다는 계약서도 작성했다.
‘훗.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군.’
요인을 위협하는 존재는 무슨 수를 쓰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면 된다. 이 얼마나 간단한 경호수칙이란 말인가. 과장하자면 대통령 경호원에게나 허락되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양강욱은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웬 촌구석에서 아저씨를 보호하라고.’
근무 환경도 그렇다.
산골에서 특전요원들과 훈련할 때보다 더 열악하지 않은가.
읍내에 사무실을 잡고 차량 넉 대를 4명이 나눠 타고 촌구석으로 출퇴근했다. 교대 차량이 오면 읍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쉬는, 2교대 임무였다.
마땅히 근무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으슥한 곳에 차를 숨기고 풀숲이나 나무 위, 폐가 안에 들어가 시골 아저씨를 지켜보는 일이 전부였다.
‘요인이라더니, 과연 흔치 않은 행동 양식을 보이긴 하는군.’
시골 아저씨는 강아지 털을 빗기고, 마당을 쓸다가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고, 딸을 목에 태우고 내달렸다. 그러다가 배우자가 나타나면 안색을 굳히고 근엄하게 행동했다.
‘야수다.’
엄청난 포커페이스였다.
혼자가 되면 다시 이상 행동을 보였는데, 그래도 사나이의 예의와 낭만을 갖춘 자였다.
“으아앗-! 싼다! 갈!”
공격 예고를 하다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호연지기였다.
양강욱은 좁은 수로 갈대 속에 숨어, 제 머리 위로 날아가는 뜨끈한 물대포에도 개의치 않고 요인을 살폈다.
‘오오오-, 야숫-!’
요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아들이었는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강아지를 달고 뛰어다니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턱걸이를 했다.
‘턱걸이를 어떻게 쉬지 않고 100개를 하지?’
그것도 배치기 없이 팔의 근력만으로.
양강욱도 60개를 하면 하늘이 노래지는데 저 녀석은 그걸 아침저녁으로 매일 반복한다. 아들이야말로 야수였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학교에 가면 그 이상한 아저씨를 관찰해야 했다.
양강욱은 지루하거나 지칠 때면 멀리서 매복 중인 동료를 보았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눈빛.
‘야수.’
다시 피가 끓어올랐다.
고액 수당을 받는 8명의 경호원이 교대로 은밀히 감시, 아니 경호를 해야 할 인물이라면 엄청나게 중요한 아저씨일 터.
전에 없던 사명감이 피어올랐다.
가끔 악의를 품고 흉기를 소지한 사람이 나타나면 적당히 겁을 줘서 쫓아냈다. 여기서 적당히란, 약 한 달간 침을 흘리고 기저귀를 찰 정도를 의미한다.
웬 뚱뚱이가 나타났는데 야수의 아들이 멱살을 비틀어 던져버렸다.
‘오! 역시 야수.’
정보에 의하면 열세 살이라고 했는데, 잘못된 거 아닐까.
어린이라고 하기엔 신장도 뚱뚱이와 비슷할 정도로 컸다.
아무튼, 세세하게 기록해서 보고하라고 했으니 양강욱은 기록을 남겼다.
「199104XX △△시 □□ 분. 신원 불상 성인 남성 2人 접근. 단신, 뚱뚱한 체형(약 170센티미터, 85키로구람 추정), 요인 자제 폭행 후 역교살 직전 구사일생 도주. 도라지팀 추적 지시. 재접근 방지 차원 엄포토록 조치하였읍≠ 습니다.」
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습니다’로 바뀌었다는데, 군사훈련보다 더 오래 몸에 익은 습관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지루하고, 모기 뜯기고, 비를 맞고, 추위에 떨며 졸기를 반복하는 매복 임무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촌구석에 비트를 파고, 나무 위에 은신처를 만들고, 낚시꾼이나 부동산 중개인, 수풀, 바위로 위장해 2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만둘까?’
양강욱은 통장을 보았다.
‘야수.’
통장에는 몸값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연봉은 어느새 프로야구 선수보다 높아져 있었다. 고액 연봉자 말고.
무사고에 대한 보너스도 두둑했고 근속 수당도 있었다.
아내도 읍내 생활을 만족스러워했다. 어차피 군인의 아내, 낙오지에 살다 오니 도시로 온 기분이라나?
동료들도 양강욱을 따라 통장을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SSS 팀원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수의 눈빛이었다.
인원이 많으니 휴가도 넉넉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팀원들의 작은 불만이 있었으니, 전역했음에도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용주에게 강력히 명절 휴가를 요청했다. 아마도 조폭 정리하는 임무를 받았을 때였을 것이다.
‘답변이 긍정적이었지.’
그러다가 첩보를 입수했다.
고용주가 바위 밑에 밀지를 남긴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 요인, 추석 연휴 하와이여행 예정. 경호팀 전원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낼 수 있을 듯.
추석 연휴를 맞아 너무 신난 양강욱과 팀원들은 일제히 차를 타고 농로를 질주했다. 일렬로 바짝 붙어 주행하니 콘보이 하는 기분이 제대로 들었다. 평시 업무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던 해방감이었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얼마가 지났을까, 드디어 정식으로 SSS를 설립한다고 했다. 이제 은폐할 필요 없이 대놓고 경호할 수 있도록 경호동을 신축한다고도 했다.
‘마침내.’
양강욱은 2년여의 고생을 제대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뿌듯한 감상에 젖어 건설 중인 경호동과 요인의 집을 돌아보았다. 요인은 집안에 경호원들을 초대해 밥도 주고 차도 대접했다.
그 누가 엄마 요리가 최고라고 했는가, 양강욱은 요인 사모를 엄마라고 부를 뻔했다. 미모는 어떻고. 가히 경국지색이라 칭할만했다.
‘미녀와 야수.’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야수의 아들과 마주쳤다.
아들이 양강욱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다, 저렇게 웃는 모습은 못 봤는데.’
야수라 여겼던 아들이 웃으니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설마, 식인종은 아니겠지.
그러나, 아이의 한마디 말에 양강욱의 심장이 녹아내렸다.
미소만큼이나 따뜻한,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는 햇살 같은 말이었기에.
“강한 전사들을 옆에 두셔서 든든하시겠어요.”
양강욱의 눈시울이 주책맞게 뜨거워졌다.
그러나 양강욱은 행복했다.
그가 군인의 길을 택한 이유를 처음 만난 사람이 들려주었다.
***
하마터면 단결이라고 크게 외치며 경례를 붙일 뻔했다.
진혁은 양강욱을 기억한다.
‘대대장님 젊으시네.’
어찌 몰라볼 수가 있을까.
이 곰 같은 군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