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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05화 (105/338)

< 발기發基 (2) >

***

진혁은 엄마와 함께 단층 주택 공사현장을 찾았다. 두 손에는 인부들에게 대접할 시원한 식혜를 잔뜩 들고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북쪽으로 두 동, 남쪽으로 두 동이었다. 터를 닦고 기반을 다지더니 벽체부터 지붕까지 금세 올라갔다. 여느 시골 단층집처럼 ‘ㄱ’ 이나 ‘ㄷ’ 구조도 아니었고, 벽돌과 시멘트만 사용한 공법도 아니었다. ‘ㅁ’ 에 가까운 구조였는데 외부에서 절대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들어졌다.

“오셨습니까.”

파일철을 든 사람이 한유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부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감독자겠거니.

진혁이 학교에 머무는 동안 엄마는 자주 보는 사람들이니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제 지붕 마감이 끝나면 지붕 위에 자갈과 모래, 흙 순으로 깔고 그 위에 잔디를 덮고 나무를 심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히 보기 전에는 여기에 집이 있는 걸 몰라요.”

지형지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하라는 홍기준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남자가 보여주는 조감도를 보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이 있는 남쪽에서 보면 호빗 집처럼 보이지만 북쪽에서 봤을 때는 그저 야트막한 구릉으로 보일 터였다.

“홍기준 부회장님께서 특별히 섭외한 미국 디자이너가 건축부터 조경까지 전체적으로-.”

경호동 배치를 확인한 한유영이 갸웃거렸다. 눈으로 현장만 보다가 평면도를 처음 보니 배치가 기이하다고 생각된 탓이었다.

“우리 집을 포위하는 것처럼 짓네요?”

“경호동이니까요.”

남자를 대신해 진혁이 말했다.

아-, 한유영이 입을 작게 벌리고 감탄했다.

“그렇구나. 멋지겠다. 젊은 삼촌들 얼굴은 언제 보나? 오홋-.”

기대하는 포인트는 이상한 것 같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아마 경호원들 나이는 엄마와 비슷하거나 엄마보다 젊지 않을까.

완성된 내부가 궁금해 자리를 옮겨 집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방의 형태는 다양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게 있었다. 바로 벽체를 가로지르는 폭이 좁고 긴 통유리였다.

‘채광보다는 감시 목적이구나. 마감까지 끝나면 진짜 벙커 같겠다.’

호빗 집처럼 생긴 벙커였다.

침실에서도, 주방과 거실, 욕실에서도 외부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경호동이 네 채.

침실로 보이는 작은 방이 각 네 개였으니 경호원이 열여섯 명이 되는 건가.

“수정 아빠가 한 채는 저번에 저녁 먹고 간 삼촌들 내준다고 했대.”

아마 문석일 일행을 말씀하시는 거겠지.

집과 거리는 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대통령 경호보다 엄격한 거 아닌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감탄만 잘할 뿐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이런 성격이니 좋게좋게 넘어가시는 일이 많은 것이리라.

“세인그룹에서 새로 도입하는 사업이라 인원을 많이 투입한 거래. 교육 차원에서.”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혁은 유명선의 서재에서 훑어본 보고서를 떠올렸다.

〈SSS 설립계획〉

Sein Security Service.

약자를 합치니 묘하게 미래지향적이었다.

SSS 등급 헌터······가 아니고 경호원처럼, S가 많이 붙으니 이름부터 우수해 보이는 효과가 났다.

과거, 세인그룹에는 보안회사가 없었다. 이번에는 손광연 때문에 홍기준이 새로 설립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자신을 위한 안배 또한 들어있다는 걸 진혁이 모를 리 없었다. 흐릿한 꿈의 기억으로나마 경영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근심 없이 편하게 살라는 배려로 비쳤다.

‘선점 효과가 엄청나겠는데? 은행에, 기업 사무실이나 창고까지 하면······.’

다른 보안서비스 기업도 있지만, 홍기준이 손을 대고 세인의 간판을 달게 되면 거의 독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아홉 살 그날 이후로 역사가 바뀌었으니 홍기준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홍기준이 정치권에 거리를 두는 걸 보면서 진혁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 복잡해질까 봐 그러시는 거야. 정치권은 적당히 이용만 하려고.’

전에도 생각했던 문제지만, 일개 직원이 바꿀 수 있는 역사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그룹의 주인이라면, 지각변동에 가까운 변화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미 세상은 세인에 주목하고 있고.

“아이고오-! 유진아! 장군아! 아하하하학-!”

가볍게 궁리하던 진혁의 생각은 엄마의 비명 같은 웃음에 끊겨버렸다.

진혁은 급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헤헤-, 재밌지요?”

아, 유진아.

치덕치덕-, 유진이는 시멘트 반죽으로 연지 곤지를 찍고, 응가 모양 탑을 쌓고 있었다.

저거 맨손으로 만지면 느낌 이상할 텐데. 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헤헤헥-.

장군이는 여기저기 회색 발자국을 남기며 즐거워했다.

***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손광연일 테지만, 진혁도 한가롭게 지낼 순 없었다.

가족을 두루 챙겨야 하니 말이다.

유진이를 씻기고 나오니 아빠가 장기판을 펼치고 아들에게 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밖에서는 별이 하나씩 늘었고, 집안에서는 장기판 위를 지키던 장기알이 하나둘 줄어들었다.

“그럼 경호원들 인건비도 세인에서 대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 사람들 엄청 비싼 사람들이야.”

모처럼 장기판을 앞에 두니 기분이 좋았을까, 손광연이 웃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땅도 빌려줘, 요인도 제공해줘. 아빠가 돈을 받아도 모자라지.”

“요인······.”

“응.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손광연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 정도는 진혁도 아는데, 돈도 돈이지만 자기 입으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아빠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경비회사 종사자들 인건비가 비싸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일반 보안서비스뿐 아니라 븨아이피 경호 서비스도 한다더라.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 하는 일이겠지. 추가 인원은 석일이가 시험해서 뽑기로 했고.”

배운 사람 티라도 내려는 건지 V 발음에 유독 신경 쓰는 손광연이었다.

“문석일 삼촌도 세인 입사했어요?”

“기준이 아저씨가 일단 그러라고 했나 봐. 신분이 필요할 테니.”

신분. 지각변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급부상한 세인을 모두가 경계하겠으나 그중 가장 경계할 기업은 1위인 대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동차회사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면 세인은 대정 턱밑까지 치고 올라간다. 그렇다면 라이벌로 인식될 테고, 그런 기업에 몸담으면 자연스럽게 문석일 일행도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더 잘됐네.’

아빠가 조언했겠지.

진혁이 알기로 그 정도로 수 싸움에 능한 사람은 손광연뿐이었다. 그들을 부리더라도 아빠 밑에 두고 관리직이나 맡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더 좋은 수를 내놓지 않으셨나.

다 맞는 추리였으나 진혁이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우리 돈 굳잖아.”

손광연이 영구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착한 바보 표정이다.

진혁도 아빠를 따라 바보처럼 미소지었다.

예전에는 철딱서니 없는 아빠라고 속으로 흉을 봤는데, 요즘 근엄하고 진지한 모습만 보느라 아이 같은 아빠가 그립던 참이다.

“아싸! 장군!”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박력 있게 장군을 외치니 진혁이 알던 아빠로 돌아온 것 같아 얼마나 반가운가.

뭐, 그렇다고 이기는 건 아니지만.

“멍군이요.”

“아······.”

아빠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때 뽀드득 소리가 들리며 거실 창문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헤헤헥-.

제 이름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달려온 장군이가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은 배불렀으면 집에서 좀 쉬지.”

젖이 불고 배가 나온 장군이를 봤을 때는 온 가족이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장군이는 여전히 건강했다.

왠지 착잡한 진혁과 달리 손광연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뽀미 이 자식, 순하게 생겨서는 재주도 좋다.

한유영을 꼬드기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좋을 때였지.’

***

다시 날이 밝고 손광연도, 진혁도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동네에 일이 벌어졌는데 천길룡과 조일헌의 오지랖이 빠질 수 없다.

함께 현장을 돌며 인부들에게 잔소리를 날린 두 독거총각은 손광연네 집 옥상에 올라 현장을 둘러봤다. 마치 정복자처럼.

“터가 일어나는구먼.”

“으르신, 게 뭔 소리래유? 땅 파제껴서 내려앉었는디?”

조일헌의 물음에 천길룡이 곰방대로 사방을 휘적이듯 가리켰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에헤이-, 시상이 그런 게 워딨대유?”

떱-!

천길룡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조일헌을 흘길 뿐 지청구를 대지 않았다. 일단 말을 시키면 제 놈도 대가리에 먹물깨나 들었다고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데,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워낙 말을 재미있게 하니 듣다 보면 물건이라도 사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역시 가진 놈이 멍청한 돈지랄 않고 제대로 쓰면 터가 달라지는 벱이여.”

“그건 그류-. 우덜은 둔지럴 허구 싶어두 둔 웁써서 지럴만 허는디-.”

담배를 삐뚜름히 문 조일헌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한쪽 다리를 떨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천길룡은 듣지 못한 척, 제 할 말만 했다.

“저 강을 따라 흘러온 기운이 바다에서 들이치는 음기를 만나 조화를 이룰 게여.”

“저건 강이 아닌디이-.”

천길룡이 한번 더 조일헌을 흘겨보았다.

그냥 대충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꼭 입바른 소리를 해댄다. 그래도 늙은이 심심할까 봐 틈날 때마다 어울려주니 내칠 마음은 없다.

곰방대를 빠끔거리던 천길룡이 중얼거렸다.

“기기묘묘한 병법이 다 무어냐. 대지를 뒤집으며 한 방에 크게 가는 방법이야말로 대장부의 길이지. 터를 세워 기운을 일으키니 제비가 모이고, 그 제비가 재물을 물어올 거구먼. 마치 오늘을 위해 땅을 불린 사람 같지 않은가-.”

진혁이라는 존재만 염두에 두었는데, 그래서 잔재주 따위로 어찌어찌 살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 호랑이는 굴을 나오지만 사람은 성을 쌓지. 암만-.”

미간을 찡그리고 엿듣던 조일헌이 눈을 껌뻑였다.

그의 반응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염불 같은 천길룡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빛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렇지, 그렇지. 몸집 불려 한 방에 완타치로 쪼개는 게 시원하지.”

동네 젊은이들과 접촉이 늘며 표현도 현대식으로 변한 천길룡이었다. 건곤일척이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은 탓도 있고.

“으르신, 도대체 뭔 말씀을 글케 중얼거리신대유?”

쯧. 천길룡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조일헌 이놈은 잔머리는 있으나 이치를 밝히는 머리가 없다. 그래서 뭔가 공들여 설명하기가 아깝다. 그렇다고 면박 주기에는 미안하고, 이리 귀찮게 달라붙을 때는 듣기 좋은 말 한마디 해주는 게 최고다.

“조만간 조대감 장개가겄구먼.”

“이이? 진짜루유?”

화들짝 놀라는 조일헌의 반응에 천길룡이 미소로 화답했다.

“이 집 사장 은혜나 잊지 말어. 동네 기운을 바꿔서 그런 게여.”

“언제유? 언제 가유?”

“그야 나도 모르지.”

“아니, 시방 그런 것두 물르시먼서 워치케-.”

따지려던 조일헌은 천길룡의 눈을 보고는 주먹의 힘을 풀었다.

노인네와 싸울 마음도 없었지만······.

‘내가 지겄는디?’

조일헌이 딴청을 피우자 천길룡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이 사람아, 가만히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던가. 나무에 올라야지.”

내일 면사무소에 곽향림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조일헌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근디, 으르신. 터가 일어나먼 기발인가유, 발기인가유?”

“······.”

천길룡은 곰방대를 문 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주술관계로 기발이 맞을 것 같지만 스스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세우는 것이니 술목관계인 발기로 보는 게 맞으려나, 아니면 술보관계인가. 요즘 한문 배우러 오는 아이들이 없어서 가물가물허이. 골몰하며 천길룡의 눈이 하릴없이 게슴츠레해졌다.

“잇챠-, 잇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 남자가 몸을 돌렸다.

“잇챠-, 잇챠-.”

터벅터벅-.

목소리, 발소리는 들리는데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말이다.

헤헤헥-.

장군이가 먼저 올라와 제 뒤를 돌아보았다.

손유진이 잘 올라오는지 지켜보듯이.

“야호-!”

마침내 옥상에 다다른 손유진이 까치발로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이 동생이 태어난 날 만세를 부르던 진혁과 닮았다.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손유진이 삿대질하듯 동네 늙은 총각들을 가리켰다.

“우리 집에서 뭐 하지요?”

허리를 꾸벅 접어 인사하던 평소와 다른 걸 보니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천길룡이 다소곳이 손을 모았다.

세상의 주인은 젊은이와 아이들이라고 말하던 천길룡 아닌가. 게다가 저 꼬맹이는 어딘가 매서운 데가 있다. 다섯 살에 동네를 평정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허허-. 아니, 그 저-. 우린 이제 가려던 참일세-.”

“이이, 인제 갈라구-.”

아무렴. 병법이 어쩌고, 터의 기운이 어쩌고 해도 집 주인 앞에서는 을일뿐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을 밑에서 올라온 한유영의 목소리가 구원했다.

“유진아-, 점심 진지 드시라고 해.”

손유진은 두 손을 모두 허리에 얹었다.

“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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