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기發基 >
진혁은 잠시 바둑돌을 내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고용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람을 부리는 일은 쉽지 않다.
돈도 돈이지만 신뢰의 문제가 가장 크다. 잠시 잠깐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인 사람들을 삶의 영역에 들이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신뢰 쌓기라는 과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하여, 아빠의 갈등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광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아꼈다. 눈을 피하지 않고 지그시 마주하며 말하는 아들의 말은 언제 들어도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으니.
늦은 밤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바둑을 두며 앞일을 논의했다.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은 경호동 신축과 문석일 일행에 대한 처우였다.
“지목변경이 완료되는 대로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올 거야.”
경호동 터는 정해두었고 공사만 시작하면 된다.
홍기준에게 듣기로 겨울방학을 맞기 전 완공이 목표라고 했다.
“그 삼촌들 지낼 곳도 있어야겠어요.”
딱-. 진혁이 좌상귀 화점에 바둑알을 질렀다.
문석일이 떠나기 전 남긴 말을 떠올리며 손광연이 뺨을 긁었다.
- “의탁할 곳이 필요합니다. 거두어 주신다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쌍팔년도 낭인들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양 수준을 고려할 때 그보다 진정성 있는 표현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손광연은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진심임을 믿는 한편으론 찝찝함도 거두지 못했다.
“배신하지 않겠지?”
“절대 그러지 못할 거예요.”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진혁은 꿈에서 그림자가 했던 말을 띄엄띄엄 기억한다.
공포와 자비 운운하며 제 나름대로 꾀를 내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지의 존재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문석일에게 금제인지 금박인지를 둘렀다고. 아마 나를 도우라는 조건 아니었을까, 진혁은 속으로 꽁알거렸다.
손광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간계가 아닌 다음에야 저들이 저렇게 찾아와 사죄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밥도 같이 먹었지.’
손광연다운 엉뚱함이었으나 밥은 중요하다.
사람 마음을 얻는 데에 맛있는 식사 대접만 한 게 또 없더라. 그 까다로운 조일헌도 한유영의 음식이 최고라며 종종 찾아오지 않던가.
술도 권했으나 입에 대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하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다시 찾아오면 곁에 두실 거예요?”
“그래야겠지. 위험한 사람들은 차라리 보이는 곳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나은 법이니까. 일단 정성이 보이잖니. 경호원들도 조만간 터를 잡을 테고.”
진혁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이처럼 생각이 같은 사람과 대화한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
“공사를 빨리 시작하면 좋겠어요. 엄마랑 유진이만 있을 때가 걱정이네요. 연약하니까요.”
“아빠도 연약해.”
주제 하나가 마무리됐다 싶으면 늘 이렇게 말이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
바둑판에 시선을 두었던 진혁이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보다 굵어진 목, 러닝셔츠 위로 두드러진 삼각근, 복어 같은 이두근, 닭다리보다 탐스럽고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듯 퍽퍽해 보이는 전완근. 그리고 그 위로 불거진 핏줄과 힘줄.
‘람보 같은데요······.’
어흠-, 민망했는지 손광연이 헛기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짐짓 근엄한 얼굴을 만들었다.
“중간고사는 어떻게 됐니?”
“한두 개 틀렸으려나······.”
이번에는 진혁이 뺨을 긁었다.
확실히 머리가 나빠진 감도 있지만, 책만 파고 살던 때와 두뇌를 단순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지금은 신경 쓸 일도 많고 바쁘니까. 게다가 운동도 빼먹지 않는다. 그래도 한두 개 틀린 게 어디냐.
그런데 아빠의 반응이 이상했다.
“용돈 줄여야겠네.”
“예······?”
아니, 그래도 그건 좀.
평소에는 반쯤 감겨 있는 진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진혁이 돈 쓸 데 없는 사람이라지만 꾸준히 들어오던 수입이 줄어드는 건 다른 문제다. 게다가 엄마가 매주 주는 돈과 달리 아빠가 몰래 주는 용돈은 자료가 남지 않는 완벽한 비자금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끔거리는 동안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어흠-, 손광연이 목을 가다듬고는 상체를 숙였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였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말야. 어? 매일 멍멍이랑 뛰놀기나 하고 어? 밤늦게까지 바둑이나 두니까 올백도 못 맞고, 어?”
말에 실린 기세와 달리 속삭이듯 나긋한 목소리였다.
아, 그거였습니까.
진혁은 슬그머니 방금 착점한 돌을 거둬들였다.
그와 동시에 손광연이 허리를 폈다.
“요즘 학생들 돈 쓸 곳 많지? 용돈 올려줄게. 크흠-.”
“에흠-.”
바둑두며 조용히 대화하던 남자들이 헛기침하자, 식탁에서 뜨개질을 하던 한유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목감기인가? 저 인간들도 주사 여섯 대씩 맞혀야 내 한이 풀릴 텐데.
한유영은 괜스레 엉덩이를 문질렀다.
***
손광연은 손광연대로 챙길 일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일은 학교를 마치고 귀가한 진혁이 살피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다른 집과는 차별화된 특이한 집안일이었다.
“경호동 터를 여기, 여기- 네 군데에 잡아야 해요. 미리 선정하고 지목변경까지 했거든요.”
“아, 예, 예. 그렇지.”
공사현장관리의 특명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은 진혁에게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말투를 사용했다. 어른들이 그러는 것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진혁은 더이상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편한 건 따로 있었다.
“이 도면은 뭔가요? 위치가······.”
진혁은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후, 지도와 도면, 부지를 번갈아봤다.
‘저기는 우리 참깨밭인데?’
뭔가 설계상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
문제는 위치만이 아니었다.
건축물의 규모였다.
“이게 뭐예요? 수영장이라고 쓴 거 맞죠?”
“아, 그게-. 맞네요.”
사내는 옆머리만 긁적였다.
길이 50미터 실내수영장이었다.
군민체육관에도 없는 시설이 집 앞 50미터 앞에 들어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아-, 도면을 손가락으로 꼼꼼히 짚는 진혁의 혈압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수영장 옆에 이건 무슨 콤플렉스으-.”
“복합 체육시설인데요. 헬스장 같은 거. 타원형 트랙도 있어. 직선 주로 최장 육십 미터에, 멀리뛰기도 하고 씨름도 하고, 여기 보면 유도 같은 거 할 수 있는 매트도-.”
“예. 그렇네요.”
진혁이 푸우욱- 한숨을 쉬었다.
헤휴-, 뭘 알까 싶은 장군이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그제야 어제 아빠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곧 유명선 회장의 선물이 올 거라나?
운동을 좋아하니 종합체육관을 선물하신 건가.
그룹 회장의 선물다웠다.
거기에 유세라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3학년 때 성적을 보자던 건 그냥 하는 말이었구나.’
이런 지원을 했으니 어떻게든 성적을 내라.
진혁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건축비는 별로 안 들어요. 어차피 땅속에 지을 거라. 여기 보면- 지면보다 낮게 지은 후에 흙으로 덮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밭으로도 쓸 수 있고, 잔디를 입혀도 되고-.”
“예······.”
“돔형이라 붕괴 걱정도 없고. 에-, 그리고 여기도 보시면-.”
파락-.
진혁의 눈이 사내가 펼친 다른 지도를 훑었다.
폭 30미터짜리 수로 공사도 예정되어 있었다.
‘뭐만 했다 하면 수십 미터구먼?’
어쩐지 아빠가 통화할 때 수로가 어쩌고 하는 것 같더라니.
바다를 막은 제방부터 진혁의 집 앞을 질러 직선으로 2km 이상 뻗는 수로 조성을 위한 토목공사가 잡혀 있었다.
그 수로변에 우레탄 트랙을 조성하고, 종합체육시설은 트랙과 붙어서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그 할아버지 스케일에 숨이 안 쉬어진다.’
그런데 혼자만을 위해 이런 규모의 스포츠센터가 가당키나 한가.
진혁은 의아한 마음에 경호동 도면을 살폈다.
‘아, 경호원 숙소에 운동시설이 없구나.’
스포츠센터에 격투기용 매트가 설치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나. 함께 사용하라는 뜻이겠지. 경호동 규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안배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논밭에다 그런 공사를 해도 된대요?”
뭐, 아빠가 알아서 조치를 취했겠지만 저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으니까.
두 달이면 집 앞에 상전벽해가 일어난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 대한민국에서 로비면 안 되는 게 없죠. 수로도 그래요. 대단위 경작지에 급수를 위해 필요하다고 세인그룹 비서실에서 작업을-.”
이게 말이야, 방구야?
경작지에 급수하는 일을 왜 서울 대기업 본사에서-.
진혁은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건 군대에서만 통하는 말은 아닐 테니까.
“공사는 언제부터인가요?”
“내일.”
한겨울이 오기 전에 끝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대규모 공사라 오래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투입되는 장비와 인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토목공사에 미친 귀신이라도 붙었나.’
가만, 그런데 기존 수로는 어찌 되는 거지?
조슬찬과 메기를 잡은 추억이 서린 수로 말이다.
진혁이 멀리 수로를 가리켰다.
“저기는 어떻게 된대요?”
“메꿔서 논으로 만들어야지. 저 수로는 길이가 길어서 새로 조성하는 수로와 면적이 똔똔이예요. 동일 면적의 경작지를 확보하면 정부에서도 크게 시비를 걸진 않고. 손광연 사장님 명의로 매입하는 걸로 협상도 끝났어요.”
똔똔이라는 전문용어가 나왔지만 진혁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땅이 늘었네요······.”
새로 조성하는 수로는 분명 사유지였다.
거기다 경작지가 추가로 확보된다.
진혁은 이 아빠가 정말 땅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헐값이라지만 그만한 면적을 매입하다니.
돈이 있나, 진혁이 입술을 달싹였다.
“회장님께서 빌려주신다고-.”
“예······.”
그냥 주는 셈 치셨겠지.
절대 돈을 갚을 아빠가 아니다.
***
손유진은 심심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오빠가 놀아주는 시간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집에 오자마자 공사현장을 둘러본다.
가끔 이웃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에게 뭔가 설명도 하는데,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걸 볼 때 미안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공사 때문에 이웃에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손유진은 똑똑한 어린아이라서 그런 것도 안다.
“좌우지간 심심하지요?”
손유진은 장군이를 쓰다듬으며 엄마가 자주 사용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았다. 음, 입에 붙지 않는다. 역시 어른들의 말은 입을 불편하게 만든다.
“시방 장군이도 심심하지요?”
헤헤헥-.
장군이도 하루 종일 도토리나무 밑에서 오빠만 기다리기 때문에 손유진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손유진은 결심했다.
장군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기로. 놀아주는 사람 없는 아이와 개를 위한 자구책이었다. 오빠처럼 빠르게 달릴 수는 없지만 튼튼한 다리로 걷는 건 할 수 있으니까.
햇볕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쌀쌀해지는 계절, 손유진은 엄마가 떠주신 귀달이 모자를 쓰고 아장아장 걸었다.
“안녕하졔어-.”
최미경의 집에 이르러 손유진이 허리를 접었다.
모자에 달린 귀달이가 달랑거리다 땅에 닿을 정도의 유연성이 돋보였다.
김순복이 활짝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유진이 혼자 온 겨? 옴마는 워딨어?”
“혼자 아니지요? 장군이 있지요? 엄마, 오빠랑 있지요?”
손유진이 짧은 팔을 뻗어 어딘가 있을 오빠를 가리켰다.
“유진이는 왜 거기 안 있구 여기 온 겨?”
“위염해지요?”
엄마와 오빠는 위험하다며 동생을 데려가지 않았다.
손유진은 오빠에게 들은 대로 김순복에게 설명했다.
주먹으로 머리를 콩- 찍기도 하도 넘어지는 시늉도 했다. 짧은 팔다리를 휘젓는 손유진의 큰 눈망울이 이리저리 애처롭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 듯 서러운 눈이었는데 입은 웃는 모습이 가슴이 찡하도록 귀여웠다.
“어허허-, 그러먼 쓰나-. 애기두 챙기야지. 아줌마랑 같이 가보자. 읏챠-.”
김순복이 손유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씨익-, 손유진은 김순복에게 보이지 않도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공사장 근처에 재미있는 게 많아 보이던데 드디어 가보는구나.
회색 반죽을 화장품처럼 얼굴에 바르면 재밌을 거야.
멀리서 아지찌들 일하는 거 보니 그걸 마구 바르더라고.
“출바알-!”
흐헤헥-.
그새 누렁이 밥을 강탈하고 배가 볼록해진 장군이가 뒤뚱뒤뚱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