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적임자 >
벽과 대화를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병이다.
이 그림자는 학습 능력이 없다.
지 말로는 완벽하게 완성된 존재라서 더 발전할 수 없다는데, 홍기준이 보기에 그건 그냥 지 생각인 것 같았다.
홍기준은 치솟는 울분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흐으응-.
입으로 탈출하지 못한 한숨이 콧구멍으로 밀려 나왔다.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이 친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 친구의 도움이 필요한데요.”
【방해하지 말라. 내가 택한 적임자의 삶은 오롯이 그가 택한 대로 흘러가야 하느니.】
푸욱-, 홍기준이 한숨을 쉴 때 그림자가 덧붙여 말했다.
【금제는 여전하다. 그대는 절대 그자에게 돌아온 사실을 말해선 안 된다.】
아주 잠시였다.
홍기준은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정색했다.
“어쩔 수 없군요. 잘 알겠습니다.”
【알아들었다니 역시 원숭이나 개의 지능은 아니군.】
그림자가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허허로운 웃음이 섞인 듯했다.
“제 목숨도 소중한데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뵐 수 있습니까?”
【더이상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자도 이제 홀로 설 만큼 성장하였느니.】
“아쉽군요.”
【그대의 금제를 풀어주는 날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만남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 늙어서야 보겠군요.”
아쉬운 한숨이 나왔다.
썩 잘 통하는 대화 상대는 아니지만,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어 좋았는데 마지막이라니. 쩝-, 홍기준이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작별이다, 늙은이. 그대 또한 행복한 시대에 머물기를-.】
“두게레, 아드제흐······”
【지체했군.】
에흠-.
씨익 웃은 그림자는 헛기침 소리를 남기고 진혁과 침대 틈으로 숨어들었다.
***
“으아으-.”
턱이 아파서 깬 홍수정이 턱을 좌우로 움직였다.
오빠 팔을 베고 잤더니 턱이 어그러져 입이 삐뚜름히 벌려졌나 봐. 침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시큼한 냄새도 나잖아.
킁킁-.
“으웩-.”
어둠 속에서 두 손 씨 남매의 느릿한 숨소리만 일정하게 들려왔다.
잠에 취한 홍수정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오빠에게 등 돌리고 잘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러면 괜히 서운할 거 같아. 그러다가 벙커처럼 벌어진 공간을 발견했다. 아, 저기에 누우면 턱도 아프지 않고 몸이 폭 들어가 편하게 누워 잘 수 있지! 방학 때마다 새벽에 깨면 애용하던 공간이다.
홍수정은 엉금엉금 기어 벙커로 들어갔다. 불룩한 벙커 상단에 머리를 대니 물컹하면서도 견고한 것이 베개처럼 뒤통수를 든든하게 지지했다.
‘으흐흥-, 재밌다.’
머리를 들썩이고 좌우로 흔들며 쿠션감을 즐겼다.
역시 징역 오빠야, 홍기준 아빠는 이렇게 하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던데 이 거인은 꼼짝 않잖아.
카아-. 홍수정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
홍수정은 징역 오빠랑 자면 깊이 잠든다.
방학 때마다 키가 크는 건 그래서인가 봐.
오늘도 꼼짝 않고 꽤 오래 푹 잔 것 같았다. 눈을 뜨니 창문이 환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럴까, 머리가 자꾸 한쪽으로 떨어진다. 이상하다, 새벽에는 말캉했었는데 지금은 나무뿌리처럼 딱딱해서 머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엄마 아빠에게 졸라 캠핑 갔을 때였나? 텐트 안에서 자다가 굴러 나무뿌리를 베고 잔 일이 있다. 뒤통수에 전해오는 느낌이 그때와 비슷했다.
‘뭐가 있나? 불편해.’
홍수정은 엉금엉금 기어 진혁의 발치로 이동했다.
***
몸도 마음도 심란한 밤이었다.
진혁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몇 년간 몸에 익은 습관이 늦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릇이 무섭다고 하는 모양이다.
“으드드드드-.”
진혁이 누워서 기지개를 켤 때였다.
쿵-.
껙-.
“응?”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려온 개구리 죽는 소리에 진혁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잠이 확 달아났다.
은은하게 남았던 꿈속 정경도 함께 소거되었다.
소리 난 곳을 눈으로 더듬으니 여명이 드리운 방바닥에 커다란 개구리가 쪽- 뻗어 있었다. 침대 발치 방바닥에 널브러진 홍수정이었다.
“아이고, 수정아-.”
기지개를 켤 때 발에 뭔가 걸리는 것 같더니 발에 떠밀린 모양이다. 안 그래도 뒤통수가 울퉁불퉁한 녀석인데, 두툼한 카펫이 깔려있지 않았다면 또 험한 꼴 볼 뻔했다.
‘기절한 건 아니지?’
숨을 쉬는지 귀를 가까이 대 호흡을 확인하고, 검지와 중지로 목의 경동맥을 짚어 심장이 뛰는지도 확인했다.
‘휴, 놀랬다. 이놈은 왜 거기서 자고 있어?’
하여간 신기한 녀석이다. 방학 때도 자다 깨어 보면, 홍수정은 강아지처럼 늘 발치에서 웅크리고 자곤 했다.
조심스레 홍수정을 유진이 옆에 눕혔다.
유진이는 벽을 향해 누워 조막만 한 손으로 벽을 더듬고 있었다. 그 손짓이 감옥에서 더듬더듬 벌레를 잡는 빠삐용을 닮았다. 뭐라고 끝없이 종알거리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건 여전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진혁은 삐뚤어진 베개를 바로 하고, 아이들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각은 중요하다.
‘이제 좀 각이 맞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가부좌를 틀고 길게 호흡을 골랐다.
잠결에 누가 다리 사이에 누웠던 것 같은데,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도 남의 집에서 잘 때는 조심해야겠다. 잠결에 운동복 바지가 조금 벗겨 내려간 느낌이 들었어. 그런 돌발 상황에는 대처를 할 수 없으니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후우우-.
망할 호르몬.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꿈이란 늘 그렇듯 휘발성이 강한 모양인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간절하게 바라면 어쩌고 하며 누군가 떠드는 것 같았는데, 지가 파올로 코엘류인가 뭘 간절히 바란다고 그러는지.
별다른 기억이 없는 와중, 어설피 떠올라 진혁을 울컥하게 만드는 한 가지가 있었다.
‘누가 내 이마를 때렸어.’
잠버릇 고약한 두 꼬맹이 중 한 명의 소행이겠지. 진혁은 이마를 비비며 꼬맹이들을 째려보았다. 홍수정의 손을 제 이마에 대보았다가, 다음으로 유진이의 손을 대보았다. 범인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그 손이 그 손이어서 구분이 어려웠다.
뭔가 재미나고 억울하며 속 터지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꼬맹이들에게 시달렸더니 어깨만 욱신거리고 꿈 따위 기억나지 않았다.
느하아아-.
늘어지게 하품을 한 진혁은 다시 누웠다.
‘어허허-. 평화롭구먼.’
서울은 아침에 닭 소리, 개 소리, 경운기 소리 안 들리고 조용하구나.
아주 가끔 늦잠 좀 자려 들면 딸딸딸딸딸- 경운기 소리 때문에 시골에서는 게으름 피우기도 힘든데.
안개를 뒤집어쓰듯 잠에 빠지니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던 꿈의 조각들이 속삭였다. 다시 아홉 살로 돌아왔던 날처럼······.
잠든 진혁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갔다.
‘바보들인가? 나 봉인인지 뭔지 안 된 것 같은데?’
그런데 뭔가 치사하다.
저 시커먼 놈은 내 그림자를 공짜 대중교통처럼 이용하면서 나만 왕따시키고 있는 거 아닌가. 다음에는 간절히, 나타나라고 간절히 빌어봐야겠다. 꿈 내용 절대 까먹지 말아야지.
그러나······.
덜컥-.
“징역! 수정! 유진! 밥 먹어!”
“떠어-!”
우렁찬 유세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꿈꾼 기억이 다시 한번 리셋 됐다.
***
후루룩-.
두 남자가 경쟁이라도 하듯 소리를 내며 국물을 들이켰다.
과음을 한 것도 아닌데, 콩나물 잔뜩 들어간 북엇국에 위장이 반응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수정 아범, 밥 먹을 때도 일 생각 하냐?”
“어? 아, 아니야. 많이 들어.”
두 꼬맹이 사이에 갇혀 밥을 오물거리는 진혁을 보던 홍기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온 것만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지. 도움을 받지 말라는 소리는 일상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고.’
홍기준은 그림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잔머리를 굴렸다.
격무에 시달린다고는 해도 홍기준은 월급쟁이와는 입장이 다르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행복한 지금, 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쨌거나 도움이 필요한 건 분명한 사실인데, 그 정도 통찰을 갖춘 인재는 다른 기업의 중역 중에서도 찾기 힘들다. 한국기업의 중역들은 관료보다 더 관료 같으니까.
진짜 쓸만한 놈들은 묻혀 산다. 알아주는 곳이 없어서, 간판이 좋지 않아서. 또는 제가 원해서.
국에 밥을 말아 돼지처럼 흡입하는 손광연을 원망스럽게 흘겼다.
‘농사만 짓는다더니 지 사업이나 하겠다고 하고.’
배신쟁이 내 친구.
홍수정과 손유진의 밥그릇에 번갈아 계란말이를 올리는 진혁에게로 시선이 다시 이동했다. 과거에도 한가락 하던 놈이니 재능은 여전하지 않을까? 너무 어려서 불가능하려나?
마음이 무거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화를 내 쪽으로 제대로 끌어오지 못했네.’
물어볼 것도, 하소연할 것도 많았는데 갑작스러운 나머지 어젯밤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
출근하려니 진혁이 다가왔다.
앞으로 두손을 맞잡은 자세는 공손했으나 여전히 직설적인 화법을 탑재한 채였다.
“경호동 공사는 언제 시작하나요?”
“바로 시작해야지.”
제 집 주위에 일을 벌인다니 관심을 보이는구나. 비로소 사춘기 소년의 호기심처럼 보였기에 홍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 사람들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겠네요?”
“관리? 팀장 있으니 잘할 거야.”
진혁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태도 관리하고 복지문제도 신경 쓸 사람요. 본사와 소통하려면 필요하지 않을까요? 경호원은 아니더라도 똑.똑.한 사람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아빠도 가끔 수준 맞는 대화 상대 있어서 좋을 것 같아서요.”
홍기준의 눈이 빛나는 한편 크게 떠졌다.
웬일로 진혁이 말을 길게 해서만은 아니다.
‘좋은 생각인데?’
근태관리는 관리자가 없어도 무관할 터였다. 근태는 팀장 재량의 영역이고 인사는 계약서에 의존할 것이므로.
그러나 중간에 사람을 둘 수 있다면······. 굳이 제 처지를 말하지 않고도 친구나 이 녀석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장기적 안목을 빌리는 게 가능하지 않으냐 말이다.
이 녀석이 툭툭 던지는 말을 말귀 밝은 이가 보고서처럼 풀어서 쓰면 어떨까.
해례처럼.
홍기준은 금방 결정을 내렸다.
“그래. 본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관리가 소홀해질 수 있는데 괜찮은 아이디어네. 적임자를 찾아보마.”
“네.”
“그래. 모처럼 왔을 때 육삼빌딩도 가고 남산타워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구경시켜 줄게.”
“네. 다녀오세요.”
허리를 꾸벅 숙이는 진혁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돌아섰다.
‘설마, 저 녀석이 내 고민을 알고?’
아니겠지.
손광연도 가끔 아들이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던데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잠시 갸웃댄 홍기준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아무튼 그런 일에 적임자가 있지.’
거의 띠동갑에 가까운 나이에도 진혁의 오른팔을 자처하던 사람.
한편, 홍기준을 태운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봉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홍기준이 출근한 후였다.
진혁은 커피를 마시는 아빠에게 부탁했다.
“엄마들이랑 백화점에라도 다녀오세요.”
“응? 왜?”
왜애-? 왜애애-?
하, 이 아빠는 진짜. 얼굴 아니었으면 결혼도 못했을 거야. 엄마가 어리고 순진했으니까 만나줬지, 나 때는 이 양반아 그렇게 눈치 없으면 연애도 못했어!
그렇다고 정말 연애 한 번 안 해본 진혁이 아빠를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고.
“모처럼 서울 왔잖아요. 그냥 가면 엄마도 세라 아줌-.”
진혁이 잠시 숨을 골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세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어머님도 아쉬울 거예요.”
“그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빠가 부인들 눈치를 살폈다.
한유영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심통이 난 듯 아랫입술이 평소보다 10%가량 돌출해 있었다. 눈동자에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나 백화점 가고 싶어요.
유세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빤히 응시하는 걸 보니 손광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동생들은 제가 볼게요.”
어차피 서울에 오는 동안 따라 붙는 경호 차량을 확인한 터였다. 진혁의 눈에도 대단히 자연스러운 미행이었다. 그들이 백화점에도 동행하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빠가 캐치볼 사 올게!”
훈장이었던 외할아버지 피를 받아서일까, 캐치볼은 행위를 뜻하는 명사이니 글러브와 공을 사 오겠다는 표현으로 정정해야 한다고 말하려던 진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뭐, 서로 뜻만 통하면 된 거지.
그렇게 어른들을 보내고 꼬맹이 둘과 개 두 마리를 책임지게 됐다.
남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