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돌발 상황 (3) >
재미있는 자각몽이라고 생각했다.
만물이 멈춘 시간 속에서 진혁은 홍기준이 되었다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할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홍기준과 그림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가운데서 꼬맹이들에게 포위된 채 불편하게 누운 제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홍기준은 폐를 가득 채웠던 숨을 길게 내보냈다.
홍기준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그림자가 지진에 흔들린 호수처럼 일렁였다.
【늙은이, 그대의 금제를 잊지 말라. 절대 그 자에게 말해선 안 되느니.】
당장 어찌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림자의 경고에 홍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 조건을 수락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으니.
되돌린 시간의 유일한 회귀자, 홍기준.
무슨 짓을 해도 개입하지 않을 테니 비밀을 엄수하라는 말만 강조한 그림자였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할 입장이 아니었던 홍기준은 이유도 묻지 못하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홍기준은 진혁의 이마를 쓸었다.
그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답답하던 차에 잠들었기에 앓는 소리 좀 해봤을 뿐입니다.”
【아픈 곳이 있다면 치료해 주겠다.】
홍기준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프다는 소리가 아닌데. 아닌가? 외로우니 마음이 아픈 게 맞나? 어쨌든 한국적인 대화는 한국인과만 가능하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오신 건 어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암시. 계약을 어기면 경고를 할 생각으로 걸어두었다.】
“저를 위해서였군요. 제가 계약을 위반해 죽을까 봐서요.”
【그대의 추측이 타당하다. 계약을 잊지 말도록.】
심각한 표정으로 주억인 홍기준의 한쪽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저 그림자가 무뚝뚝한 듯 보여도 묻는 말에는 곧잘 대답해주지 않던가. 오랫동안 지켜본 바, 신화적 존재감에 걸맞지 않게 엉뚱하고 모자란 구석도 많았다.
하소연할 곳 없어 속 터졌는데 너 잘 걸렸다.
“어디서든 나타나실 수 있는 겁니까?”
【그자의 그림자에만 숨어들 수 있다. 어차피 그대의 금제도 그자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차피 자신만 돌아온 것이라면 진혁에게 말한들 믿기나 할까? 유세라에게 미래를 안다고 말했다가 벌레 보듯 하는 눈길을 받은 것이 1년 전이다.
홍기준은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이 친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돌아온 건 저뿐이라면서요.”
【영혼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그자는 더 특별하지. 영혼에 새겨진 기억은 시공을 초월한다. 봉인이 풀려 기억을 찾은 그자가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대나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뭐라는 거야. 봉인을 했는데 봉인이 왜 풀려. 알고 보면 이 그림자 새끼 무능한 거 아닐까? 날 죽이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홍기준의 뇌가 잠시 헛된 망상을 일으켰다. 믿든, 안 믿든 진혁이에게만 털어놔도 속이 후련할 거 같은데.
엉뚱한 생각을 하며 홍기준은 건조한 입술을 혀로 훑었다.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이 친구의 능력을 보면서요.”
【개입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은 그 세계의 시간을 돌린 것뿐, 그자가 특별한 것은 모두 그자의 노력에 기인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에 홍기준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빠른 발과 괴력, 신체 성장. 모두 이 친구 역량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다. 세상을 갖고자 했다면 선물했을 것이다. 허나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데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느니.】
그림자는 진혁의 가슴속 가장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 아닌 욕망을 들여다본 유일한 존재였다.
그나저나 홍기준이 보기에는 손진혁도 그렇고, 이 그림자도 그렇고 평범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 친구를 평범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 세계의 인간들은 모두가 그대처럼 멍청한가?】
“예?”
명문대 나온 사람에게 이 무슨 망발이야?
울컥했으나 차마 따지지 못하고 홍기준은 볼만 부풀렸다.
【머리가 좋으면 머리를, 힘이 강하면 힘을, 부유하면 부를.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일 아니던가? 머리가 좋으나 바보처럼 살고, 힘이 강하나 숨기고 살고, 부유하나 거지꼴로 사는 건 범상함이 아닌 기만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그걸 두고 허영이라 부르던가.】
홍기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림자가 말하는 평범의 의미가 일면 그럴듯하게 들린 것과 별개로, 이 그림자와는 인간 차원의 상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긴 까닭이었다. 제법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초점이 늘 빗나간다.
아무튼 전교 1등을 할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전교 1등을 하는 건 그다지 비범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 홍기준은 그렇게 이해했다.
입술을 뻗치고 고민하는 홍기준에게 그림자가 덧붙였다.
【독수리는 애초에 독수리로 태어난다. 먹이도 다르고 사는 세상도 비할 수 없지. 병아리의 눈에는 그게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예······, 뭐. 듣고 보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알아들은 척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 투머치토커 그림자는 시간을 한없이 멈춰서라도 강의를 할 성격이므로.
【그대가 기록해 간 역사를 활용하는 것 또한 평범한 인간의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허락한 이유는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는 신기한 구경을 하는 아이처럼 연신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비범하고 고귀한 인간이었다면 공정을 운운하며 절대 사용하지 않았겠지. 이자에게 그대와 같은 지식이 있었다면 어찌 했을 것 같은가?】
그림자가 검은 연기 같은 팔을 뻗어 잠든 진혁을 가리켰다.
그제야 홍기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손진혁은 과거에도 평범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여느 인간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불행한 인생이 그러했고, 그림자의 정의처럼 가진 장점을 사용하지 않는 삶도 그러했다. 사용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성격 문제로 못했다는 게 맞지만.
‘내가 자네처럼 생겼으면 인마, 그렇게 사제처럼 안 살았다.’
홍기준은 진혁의 이마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시간이 멈췄으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살짝 쳤는데도 손이 얼얼해서 홍기준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무튼, 이 친구는 과거의 그 친구가 아니지만 봉인이 풀려 기억이 들어오면 폭주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원숭이보다는 똑똑하군. 그자는 고귀한 영혼에 대한 보상으로 잠시 내 보우를 받았을 뿐, 그대와 경우가 다르다.】
“고귀하다라······.”
그림자로부터 고귀하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는 수도승처럼 금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홍기준은 턱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그 또한 내 시각에서의 해석일뿐, 그대와 나는 사유가 다르니 동의를 구하지 않겠다.】
그림자의 부연에 홍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 옛날 표현을 두고 서로 얼마나 논쟁을 벌였던가. 그럼에도 그림자는 홍기준을 윽박지르거나 해치지 않았다. 신기한 동물 보듯 했을 뿐이었다. 여러모로 인간의 지성과 감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과 관용을 갖춘 존재였다.
【나와는 다른 존재다. 내가 갖지 못했던 고귀함이지. 파괴와 살육이 아닌, 어떤 생명도 귀하게 여기는 정신. 신조차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우주 만물이 저만의 이유로 동족을 살해하거늘, 그자는 달랐다.】
“이 친구도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내가 현현할 일이 없느니. 간절히 원할 때 지켜보며 사소한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여기 계시지 않은데 어찌 알고 도움을-.”
【보상으로 그자의 심장에 걸어둔 암시다. 지극히 원하는 상황에 임하면 내가 알 수 있지. 위험한 상황처럼 말이다.】
홍기준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도움을 줬다면 이 세계에 간섭했다는 뜻 아닌가.
홍기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림자가 덧붙였다.
【일상을 위한 작은 도움이라고 해두지.】
처음에는 어떤 세상인지 궁금해 제 발로 찾아와 들여다보기도 했다. 손진혁의 그림자에 숨어서 말이다.
그러다 장군이라는 사니얼에게 발각되기도 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사니얼을 개라고 부르던가? 아무튼.
어떤 날은 강하게 연결되는 느낌에 확인해 보니 손진혁이 명상 호흡을 하고 있었다.
깊은 슬픔이 느껴져 왔을 때는 승천하는 여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여인을 얼른 쫓아냄으로써 진혁을 슬픔으로부터 격리시켰다.
뒤통수가 따가워서 왔던 날은 사제로 보이는 늙은이가 노려보았다. 들키지는 않았으나, 여러 가지로 만만치 않은 세상 같아 자주 오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진혁의 일상을 방해할 수 있으니.
그래도 진혁의 동생이 부를 때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기 때부터 밤마다 대화를 나눴는데, 아기가 옹알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기도 그림자가 싫지 않은지 매일 밤 찾아왔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잠잠해진 그림자를 향해 홍기준이 뱁새 눈을 떴다.
이새끼 또 딴생각하는구나.
“저, 도움이라시면······.”
【몰라도 되느니.】
그림자의 개입은 아주 사소했다.
이 세계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진혁이 명상으로 가득 채운 기운을 빌려 썼다. 머리 위에 어두운 갯벌을 환히 비추는 달을 만들고, 또 그 기운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던 어머니와 동생을 살렸다. 태아를 살리고 건강을 기원하는 과정에서 언어 등 일부 능력이 전이된 것 같았지만, 동생이 인간성을 획득할수록 능력을 상실할 테니 괘념할 이유는 없었다.
악인조차 살리려는 의지가 가상해 악인들에게도 금제를 걸었다. 진혁은 아마도 제 노력과 기지로 악인들을 포섭한 것으로 착각할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무튼, 그림자는 진혁이 뭔가 간절히 원할 때만 이 세상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세상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아주 보잘것없는 도움이었지. 그렇다고 모두 돕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도울 수 없느니.】
“모르시는 것도 있으십니까?”
【모른다기보다 미개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두지.】
상태창이 뭐냐?
그림자는 홍기준에게 그게 뭔지 물으려다 자존심 때문에 참았다. 겨우 원숭이의 지능을 능가하는 저 늙은이도 모를 게 뻔하다. 도대체 그게 뭐기에 간절히 중얼거리는지 모르겠는데, 상태창이라는 것 때문에 두어 번 호출당한 기억이 있다.
“뭐······, 그렇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 홍기준은 구레나룻만 긁었다. 그림자가 말하는 사소함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익히 아는 까닭이다. 가볍게 주먹을 쥐어 행성 하나를 날려버리면서도 사소한 일이라고 했던 존재다.
“저-, 혹시 계약을 바꿀 순 없습니까?”
【무슨 소린가?】
“이 친구 도움이 필요합니다.”
중학생에게 경영 자문을 구하기란 넌센스와 다르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와 재능을 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손광연조차도 바둑을 두며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하고, 농사 외의 분야에서 도움을 받는다지 않던가.
【계약 변경이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절대, 그자에게 회귀자임을 밝혀선 안 된다. 그대의 심장이 멈출 것이다. 그대와의 옛정을 생각해 일러두는 것이다.】
홍기준은 이마를 짚었다.
세상이 수십 배 복잡한 바둑판으로 보였다.
착점할 때마다, 그가 기록해온 역사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바둑돌 하나를 올릴 때마다 역사가 바뀌어서 다음 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사업 아이템 한두 개가 아닌 기업 여러 개를 공격적으로 흡수했으니, 어찌 보면 변화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에 설립한 투자사 이름으로 인수한 미국 기업만도 열 군데가 넘는다.
홍기준이 유일하게 천재로 인정한 손광연의 훈수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빠르게 부회장에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손광연도 어느덧 한계에 봉착했으니, 다른 조력자가 필요했다. 손광연보다 한 단계 위의 조력자.
“아주 머리 아파 죽겠습니다.”
【걱정 말라. 수명이 다하지 않는 한 내 허락 없이 죽지 못한다. 아프다면 치료해 주겠다.】
아이 시발 진짜.
말 드럽게 안 통하네.
홍기준은 불쑥 짜증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