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돌발 상황 (2) >
은은한 조명 밑에서도 광택을 자랑하는 걸로 보아 인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진이 분명했다.
사진을 주워든 신상열이 품에서 꺼낸 사진과 문석일이 내민 사진을 대조했다.
흑백과 컬러의 차이가 있지만 동일 인물임을 확신할 만큼 닮았다.
“맞는 것 같네요.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의뢰 내용에 없었다. 더 알고 싶으면 두 배로 얹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문석일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절로 목이 움츠러드는 신상열이었다.
신상열은 머쓱하게 귀를 긁었다. 1급 위의 특급이라더니 풍기는 분위기부터 만만치 않은 남자다. 이렇게 까다로우니 접촉조차 어려운 거겠지. 전임자 백영림 실장은 문석일을 만난 자리에서 오줌을 찔끔 지렸다던가.
“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사진만으로는 결과를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최초 의뢰는-.”
“죽이라는 거였지.”
문석일이 나지막이 말을 끊었다. 느릿했지만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이 정확했다.
신상열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 뭔가 오해가-.”
“데려와라, 데려오지 않으면 더 좋다. 그 여자가 했던 의뢰다. 서로 말장난은 그만두지.”
신상열이 길게 한숨을 뿜었다. 그제야 긴장이 완화되며 업무가 떠올랐다. 업무에 임할 때는 누구보다 냉철하게 처리한다 자부하는 신상열이었다. 다른 세계를 사는 남자를 만나 잠시 흔들렸음을 자각했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 제 말씀은, 결과물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이 사진은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처리하기 전 사진이니까.”
사진에는 하늘과 건물,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몇 대만 흐릿하게 모델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의료원을 나서며 호방하게 웃는 손광연의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이다. 아마 그때 돈가스 먹으러 가자고 하던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아들은 돈가스를 싫어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특이한 녀석이야. 요즘 애들 돈가스에 환장한다던데.’
잠시 그날을 떠올린 문석일은 신상열을 향해 신문을 밀었다.
신상열이 신문을 받아 짤막한 기사를 찾았다. 친절하게 붉은색 사인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OO도 〇〇시 차량 추락, 30대 운전자 사망」
······ 차량은 화재로 전소, 시신 훼손 심각 따위의 내용을 다룬 기사였다.
“으음, 아깝네요. 처리 후 모습도 확인 가능하다면 좋을 텐데요.”
그리 말하면서도 신상열은 웃고 있었다.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일면 당연하다 할 것이었다. 시신 사진을 보지 못해 아쉽다는 소리였으니.
기저에는 개운치 못한 일을 떠맡았는데 완료 보고를 할 수 있게 됐다는 환희마저 깔려있었다.
‘유유상종인가.’
그런 일을 사주하는 자 밑에서 일하니 저런 인성은 기본인 걸까, 문석일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더 자세한 증거는 경찰이 갖고 있겠지. 나를 살 사람이라면 그쪽 정보를 살 능력도 있을 테고.”
“네, 뭐. 그건 다른 직원들이 확인하겠지만 선생님 실력이야 저희 -실에 워낙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신상열은 비서실인지, 부속실인지 발음을 뭉갰다.
금테 안경을 올려 쓴 신상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진과 신문을 품에 챙기면서였다.
“성공사례는 최종 확인 후 전달하겠습니다.”
문석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열이 악수를 청했지만 외면하고 보리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선글라스 뒤에 숨은 눈동자는 끝까지 신상열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모는 샌님이지만 날카롭고 독한 데가 있는 눈매. 둥그런 얼굴선에 어울리지 않는 뱀 눈이다. 입맛이 개운치 않은 인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상열은 카페 구석에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신상열이 돌아섰다.
신상열이 카페를 나선 뒤, 문석일이 턱을 매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붙어. 샅샅이 털어.”
이제 반격을 준비할 시간이다. 손진혁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문석일 일행도 완전히 노출되어 있을 테니.
문석일은 신상열이 완전히 떠나고도 30분 넘게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감상하며 낭만을 즐길 계획 따윈 없었다. 그저 시간을 보내며 동료들의 진행 상황을 체크할 마음이었다.
까만 밤과 어울리는 내부조명이었다. 가로등이 대낮처럼 비춘 통유리 너머의 바깥세상보다 더욱 자신과 어울린다고 느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를 끈적한 음악도 마음에 들었다. 아줌마 목소리 같은 여가수가 뚜르벙뚜르벙 하는 걸 보니 샹송인가.
‘예상은 했지만 참 더러운 놈들이군.’
의뢰를 맡은 이후로 늘 꼬리가 붙었다. 심부름센터부터 조직폭력배, 퇴역한 특수부대원까지. 실력을 믿지 못해서였는지, 제대로 처리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수룩한 녀석들은 따돌렸지만 영리한 추적자들이 문제였다.
김인랑과 강헌창에게 일러 잡아오도록 지시했지만 놈들은 차라리 자결을 택했다. 독극물을 삼키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놈도 있었다. 어떤 고문이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 동종업계 경험자의 선택이었으리라.
‘집에 들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동료들의 가족이 노출될 뻔하지 않았나. 복잡한 동선으로 이동하는 건 업계 교과서나 마찬가지였으니 추적자들도 불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오래 속이지는 못할 거야.’
문석일은 의뢰자에게서 선명한 냄새를 맡았다. 돈으로 방벽을 두른 이무기가 풍기는 소름 끼치고 퀴퀴한 악취였다. 그런 자들은 포기를 모른다. 손광연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그래도 목숨을 걸고 약속을 했으니.’
돈은 최소한의 계약장치일 뿐이다. 뱉어내거나 돌려주면 그만.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맺은 죽음의 계약을 깨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친구들을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그 친구들이 상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추석의 악몽을 떠올리는 문석일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뱀의 송곳니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소름이었다.
절대 딴마음을 풀지 못하도록, 조금의 저항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금제를 걸던. 저승사자라는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될까 싶은 존재······.
문석일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삐비비빅-. 손목시계에서 울린 알람이 상념을 깨웠다.
신상열이 떠난 지 30분이 지났다. 믿음직한 동료들이 뱀 눈을 가진 사내를 그림자처럼 바짝 쫓고 있을 것이다.
문석일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카페를 나서려니 구석에 앉아있던 네 명의 사내가 일어서는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놈들은 얼마나 상대하기 편한가. 그 촌구석의 괴물 손아귀에서 살아 나오니 시답잖은 해결사들이 외발 토끼처럼 보일 지경이다.
‘귀여운 놈들.’
무표정하던 문석일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
“진혁이 자니?”
“아직요.”
진혁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매일 하던 운동도 못해서 힘이 남아도는 데다, 꼬맹이들이 좌우에서 팔을 하나씩 제압하고 사부작대니 심란한 탓이었다. 모처럼 운동 쉬는 셈 치려 했는데, 휴식이 아니라 차라리 징역이었다. 역시 사람 팔자는 별명을 따라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냥 누워 있어.”
일어서려 버둥거리는 진혁의 가슴을 홍기준이 살포시 눌렀다.
입에서 과하지 않은 술 냄새가 풍겼다. 내일도 출근이라더니 정말로 한 모금만 마신 모양이다.
“아저씨가 바빠서 우리 진혁이 왔는데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 그래서 잠깐 올라왔다.”
“네.”
진혁은 가만히 누운 채 눈알만 굴려 홍기준을 바라보았다. 모양새가 우습지만 어른이 누워 있으라는데 어쩌겠나. 청소년 손진혁은 어른 말씀을 잘 듣는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렇게 컸던가, 어두운 방에 우뚝 서 있으니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벌써 세인그룹 부회장이라고 했지. 과거엔 그렇게 공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미래를 안다고 해도 대단한 성장이다.
예전에도 그룹 회장에 올랐지만 어디까지나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을 뿐, 명예나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빠가 시골에서도 성공해서 사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그 시간을 10년 이상 당긴 걸까.
그리 머리를 굴리는데 홍기준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힘든 건 없고?”
군대도 아닌데 힘든 게 뭐 있을까마는······.
당신 딸 때문에 힘드네요. 잠버릇이 참 고약해요.
그렇게 말할 순 없고······.
“추석 때 이상한 사람들이 기웃거렸어요.”
“이상한 사람들? 땅 보러 오는 사람들은 많잖아.”
“하루 종일 저희 집만 감시했어요.”
아빠에게도 수상한 사람들이 왔었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사실대로 밝히기에는 컨텐츠가 평범하지 않았다. 떡실신시켜 보냈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아무튼 어차피 밝히기로 한 용건이다. 적절하게 물어봐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홍기준의 숨이 잦아들었다.
빛을 등지고 어둠을 끌어안은 홍기준이었지만 진혁은 그 눈빛이 매섭게 빛난다고 느꼈다.
“감시해?”
“네. 분명해요.”
그저 홍기준이 믿어주기를 바랄밖에. 차마 문석일 일행을 힘으로 몰아붙여 알아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체격이 무슨 운동선수들 같았어요. 땅 보러 다니는 사람들은 배가 나왔는데 그 사람들은 배도 안 나오고 선글라스 쓰고 머리도 짧고, 양복도 줄무늬였어요.”
줄무늬 양복이 무슨 대수일까마는 진혁은 관찰한 그대로 정보를 전달했다. 생각해 보니 땅 보러 다니던 사람들은 줄무늬 양복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잠자코 듣던 홍기준이 물었다.
“경호원들이 있는데도 불안하니?”
“네. 엄마랑 동생은 약하니까요.”
홍기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바닥으로 진혁의 가슴을 다독였다.
“걱정 말고 푹 자라.”
“저, 엄마랑 아빠-.”
“걱정 말래두.”
아니, 이 양반이 뭔 말을 못하게 하네.
우리 부모님 주무시냐고 물으려던 건데.
아저씬 내맘 조또 몰라.
기다렸다는 듯 1층에서 유세라 웃음소리가 올라왔다. 안 주무시는구나.
엄마와 유세라는 서로 만나면 저렇게 수다쟁이로 변한다.
“아저씨가 알아서 할 테니 진혁이는 재미나게 살아.”
명랑한 홍기준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진중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그 소리가 진혁의 가슴을 두드렸다.
“자라. 먼길 와서 피곤할 텐데.”
“네.”
진혁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이가 오빠의 목을 끌어안고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진혁의 귀에만 들리는, 손유진의 수면 유도 잠꼬대였다.
‘딴도그. 네노그롬 일리트 퓨드 븨오스.’
수면 마취를 할 때처럼, 차츰 흐려지던 의식이 툭 끊어졌다.
홍기준의 눈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대화하던 녀석이 기절하듯 잠들었으니.
“수정이는 내가-, 응?”
동시였다.
딸을 안으려는 홍기준의 팔을 외면하듯 딸과 손진혁이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긴 것은.
피식 웃은 홍기준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방문을 열고 나가던 홍기준이 고개만 돌려 뒤를 보았다.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에는 정답고 알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리 딸 잘 부탁하네.”
미처 전하지 못했던 진심이었다.
*
어른들의 정다운 시간도 끝나고 밤이 깊었다.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홍기준이 들어왔다.
홍기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홍수정의 엉덩이를 다독였다.
잠버릇 고약한 딸이 깨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후우우-.
한이 맺힌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술기운에 용기를 얻었을까, 침대 위의 세 생명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홍기준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회장님 서재에서 보고서를 봤나 모르겠구나. 유치한 시도였지. 혹시 자네가 옛날의 그 사람이라면 날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지.”
홍기준의 눈동자가 그윽하게 물들었다.
“나도 모두 알지는 못해. 안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어제 읽은 경제신문도 기억 못하는 게 평범한 인간의 두뇌야.”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낯선 세계가 되어버린 과거로 돌아온 자의 넋두리였다.
홍기준은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공유할 사람은 없으나 여기 누워 있는 녀석만은 알아주기를 바랐다. 긴 세월 고군분투하던 진혁의 역사를 아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해보니 알겠더라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위험한 도전인지. 살았던 세상을 다시 사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운데, 그룹의 실질적인 항해사 역할을 하고, 아는 사람 없이 홀몸으로 낯선 파도에-.”
홍기준의 넋두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화악-!
어둡던 방이 더 어두워지며 진혁의 그림자가 모습을 키운 것이다.
홍기준은 흠칫 놀라 입을 닫고 몸을 웅크렸다. 어린 딸을 감싸듯 품는 동작이 고양이처럼 날렵했다.
방안을 가득 채운 그림자가 노한 듯한 눈으로 홍기준을 쏘아봤다.
【늙은이, 뭘 하는 짓인가? 계약을 어기려는 것인가?】
상체를 세운 홍기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양처럼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낯설었으나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홍기준을 외롭게 만드는 금제를 가한 존재가 분명했다.
눈동자가 있을 공허를 응시하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 계셨던 겁니까?”
【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림자를 응시한 채 홍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라고 말하는 자체로 이 공간이 아닌, 자신의 위치에 머물고 있음을 뜻했으니.
“깨지 않을까요?”
어둠 속에 누운 세 생명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불가능하다. 각인된 영혼만 내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 만의 하나에 대비해 그 세계의 시간도 잠시 세웠느니.】
홍기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계시지 않은데 지금은 왜 오신 겁니까?”
【그대가 죽음을 재촉하였느니······.】
아, 걸린 건가.
순응하듯 천천히 눈을 감은 홍기준이 차분히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돌아와 보낸 불꽃 같던 5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격렬한 한편 행복한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