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 돌발 상황 >
진혁이 근무하던 시절, 세인그룹은 부회장을 따로 두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한 추측은 분분했으나, 홍기준 회장이 권력의 분산을 경계했다는 분석이 가장 힘을 얻었다.
‘최초이자 마지막 부회장.’
오너로부터 전권을 물려받은 남자. 세인그룹은 부회장이 곧 회장이다.
그것이 예전 홍기준의 역사였다.
그런데 홍기준은 언제 부회장이 되었을까. 부모님은 알고 계신 눈치였는지 놀라지도 않으신다. 그저 대단한 지인을 두어 뿌듯한 표정이었다. 아빠 좀 보라지. 지금도 아빠의 콧구멍이 자랑스럽게 벌렁거리지 않는가.
깔끔한 감색 정장 차림의 홍기준이 팔을 활짝 벌려 손광연을 안았다.
“야아-! 반갑다. 늦어서 미안해. 요즘 벌인 일이 많아서.”
“고생 많다, 이놈. 우리도 방금 왔다.”
가족보다 살가운 두 남자의 재회였다.
홍수정과 손유진이 부둥켜안은 채 비틀거리며 그 모습을 흉내 냈다.
“흐냐냐냐응-.”
“까하하-.”
“공주님들? 그만 들어가자.”
유세라가 나서서 떼어 놓지 않았다면 잔디밭에 넘어질까 걱정될 정도로 두 꼬맹이의 포옹은 격정적이었다.
그렇게 두 식구가 쌍쌍이 손을 잡고 정원을 벗어나 집 안으로 향했다.
짝이 없는 진혁만 주머니에 손을 꽂고 뒤를 따랐다.
응접실에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홍기준은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한다며 밤늦게까지 놀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모처럼 왔는데 같이 외식도 하고 백화점도 가면 좋을 텐데 말야.”
“또 오면 되지. 나도 내려가서 할 일 많다. 농사꾼은 주말이 따로 없어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두 여자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손광연이 손사래를 쳤다. 특히, 한유영이 아쉬워했다. 하와이 여행 때 쇼핑의 맛을 제대로 본 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깥양반들은 또 잘난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사업이나 농사나 비슷해. 그렇지 않냐?”
“많이 비슷하지. 그래서 제대로 경영해 볼 참이다.”
잠든 유진이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던 진혁이 귀를 쫑긋 세웠다.
아빠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낼 생각으로 보였으니까.
“잘 생각했다!”
무엇에 꽂힌 사람처럼 갑자기 신이 난 홍기준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모습이 마치 유진이가 오빠에게 안아 달라고 조르며 방방거릴 때와 비슷했다.
“법인부터 세우자. 빠를수록 좋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그 친구들 정식으로 거둘 방법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
“보안회사 하나 차리지 뭐. 아예 너희 집 옆에 출장소 하나 낼까?”
경호팀을 말하는 듯했다.
듣고 있던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들의 허풍이 으레 그랬으므로. 회사를 차리고 지점을 내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던가.
‘아, 부회장이지.’
그냥 남자들이 아니었구나. 부회장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실현된다면 가족을 위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터였다.
더이상 쉬쉬하지 않아도 되고, 요원들의 고생도 덜 수 있다.
“제수씨하고는 이야기가 된 건가?”
“당연하지.”
두 아빠는 진혁을 흘끗 볼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제 양지로 끌어올렸으니 당연한 처사려나.
‘구체적으로 말해 봐!’
식곤증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진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유진이가 깨지 않도록 요람 역할을 하면서.
눈꺼풀에 피로가 묻었음에도 눈에 힘을 주는 진혁이 안 되어 보였을까, 손광연의 입술이 천천이 움직였다. 드디어 뭔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진혁이는 유진이 데리고 먼저 올라가서 자.”
“예······.”
피유우우우우-,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상단전에서 뜨거운 김이 빠져나갔다.
진혁은 유진이를 안은 채 일어섰다. 청소년이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어리광부리고 떼쓰는 건 진혁과 어울리지 않는다. 더 듣고 싶은데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 이거겠지. 아마도 진지한 사업 얘기를 하시려나.
‘그 삼촌들 연락을 기다려야겠구먼.’
휴대폰만 있어도 이렇게 답답하고 더디지는 않을 텐데.
벽돌만 한 휴대전화가 등장했으나 상용화는 요원했다. 2년 후는 되어야 소형 휴대전화가 등장할 거라는 예측이 돌았다.
진혁은 계단을 하나씩 조심조심 밟았다. 세상 소중한 동생을 놓칠까 꼭 끌어안고서.
유세라가 턴테이블에 LP를 올렸고 홍기준은 거실장에서 버번위스키를 꺼냈다.
위스키를 보며 진혁이 아련한 시선을 보냈다. 꽐라 홍수정 덕분에 버번 맛에 제대로 길들지 않았던가.
‘한 모금만 주지.’
다른 집은 애들한테 장난삼아 마셔볼 테냐고 묻는다던데.
쩝.
계단참을 딛고 다시 한번 더 돌아보는 진혁의 눈빛에 서운함이 가득 담겼다.
콜라를 사러 갔다가 텅 빈 음료수 냉장고를 흘겨보던 동생 손유진의 눈빛과 닮았다.
***
예전에 왔을 때와는 다른 집이지만, 진혁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홍기준 회장 생일날 가족만 오붓하게 식사하는 자리에 초대를 받아 홍수정과 함께 왔었다. 그때가 서른세 살 때였나. 계약직 대리 직급이었으니 별일이 다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구경이나 가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신입사원으로 갓 입사한 딸의 사수를 불러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는 회장을 보며 초대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서른을 넘기며 홍수정은 무표정하고 우울해 보이는 날이 많았는데, 20대의 그녀는 많이도 쾌활했었다.
지나치게 쾌활한 꼬맹이 홍수정이 진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는 내 방에더 자.”
새로 돋아나고 있는 영구치 덕분에 발음이 제법 또렷해진 홍수정이었다. 홍수정은 뭐가 신나는지 목조 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며 연신 진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히죽거렸다.
‘그래, 수줍게 웃는 것보다 활짝 웃는 게 어울리는 녀석이지.’
웃는 모습이 귀여워 진혁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마워, 수정아.”
동생을 안고 꼬맹이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유진이는 엄마보다 오빠를 더 찾는 동생이라서 하루쯤 데리고 자도 될 것 같았다.
뭐, 집에 있을 때도 새벽에 오빠 방 앞에서 자는 유진이다. 개도 아니고 왜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자는 건지 많이 고민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이는 자신이 왜 거기 있는지 기억도 못했으니까.
부모님과 진혁은 유진이에게 몽유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해보았다. 그러나 유진이가 발견되는 곳은 거기뿐이니 위험한 몽유병은 아닐 거라 판단한 바 있다.
건조한 계절, 코가 살짝 막혔는지 쉭쉭 숨소리를 내며 잠든 유진이부터 침대에 눕혔다.
진혁은 면봉에 물을 묻혀 유진이의 코를 청소했다. 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홍수정은 티슈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대기하다가 왕건이가 나오자 면봉과 함께 감쌌다. 그 겨울 미꾸라지를 잡던 팀워크가 다시 한번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동생의 숨소리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여유를 찾고 홍수정의 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완전 공주님 방이네.’
TV 광고에서 보던 인형의 집이 따로 없었다. 연분홍, 진한 분홍, 중간분홍, 선명한 분홍, 흐릿한 분홍······. 거기다 달콤한 향기까지 나니 딸기 맛 우유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달달한 향기에 취한 진혁은 노곤한 몸을 눕히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잠들기 전에 쭈욱 펴는 기지개만큼 달콤한 수면제가 없다.
그런데 잠이 싹 달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아니, 이 자식이?’
홍수정이 진혁의 옆에 누웠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었다. 결국 두 부부를 위해 꼬맹이들을 챙기는 보모가 된 모양새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홍수정은 진혁의 왼쪽 팔을 점거하고 시시덕거렸다.
“에히히-, 오빠 잘 쟈. 좋은 꿈꺼-.”
한참을 조잘대던 꼬맹이가 그리 말하고는 곯아떨어졌다.
진혁의 배에 다리도 걸쳤다.
“어윽-.”
홍수정의 발이 영 좋지 못한 곳을 강타했다.
진혁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내게 강 같은 평화······.
***
헤헤헥-.
뽀미라고 했다. 아주 순한 녀석이다. 제 밥그릇에 가득 찬 사료를 까드득거려도, 귀를 물어도, 꼬리를 잘근잘근 씹어도 녀석은 앞다리에 턱을 괸 채 눈동자만 굴렸다. 이건 마치 덩치 크고 순한 주인집 아들 손왕왕을 보는 느낌이랄까. 암만, 그 녀석이야말로 참으로 개 같은 녀석이지. 그래서 친숙했다.
뽀미는 최미경 인간네 사는 누렁이보다 덩치가 커서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장군이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어디 보자, 장군이가 70개월이 넘었으니 이 녀석은 고작 네 살인 건가.
헤헥-.
후훗, 연하견이라니. 만만하고 말랑한 녀석이라 장군이는 실컷 가지고 놀았다. 털이 길고 푹신해서 와다다 달려가 들이받아도 흠칫 놀랄 뿐,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등 위에 올라가 하울링을 하며 여왕이 된 기분도 만끽했다. 아무렴, 두내리 모든 개들 위에 군림하는, 그 이름도 위대한 장군이 아니던가.
도사견도, 진돗개도 모두 장군이에게 들이대다가 핵 이빨을 경험해야 했다.
뽀미는 덩치값 못하는 순둥이라는 점 외에도 신기한 구석이 또 있었다.
아무리 냄새를 맡아 봐도 개 같지가 않다. 킁킁-. 문화충격이란 이런 것일까.
헤헤헥-.
세상에, 서울 개는 몸에서 소똥 냄새가 나지 않아!
개답지 못한 듯하면서도 개 본연의 냄새 같기도 했다.
장군이는 밤늦게까지 홍수정 인간네 정원 구석구석을 파헤치고 꼼꼼하게 영역표시를 했다. 감시하려는 건지, 다른 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뽀미가 쫓아다니며 꽁무니 냄새를 맡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바박- 잔디를 물어뜯고 앞발과 주둥이로 땅을 팠다.
흙에서도 소똥 냄새가 나지 않다니, 참으로 척박하고 삭막한 세계로구나. 그래도 흙 목욕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찌뿌둥한 몸이 개운해지고 잠이 잘 오기 때문이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이런 것도 안다.
서울 흙으로 소똥 냄새를 빼서였을까, 사료 좀 먹어볼까 싶어 밥그릇을 기웃거리는데 뽀미가 긴 주둥이를 장군이 꽁무니에 들이대고 킁킁거렸다.
이른바 개수작이었다.
헤헤헥?
이놈이 감히? 두내리 어떤 개종자들에게도 허락지 않는 짓인데. 장군이는 위엄을 보이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으르르-.
그러나 그때, 장군이가 깽- 기겁성을 질렀다.
으르르-, 뽀미도 함께 경고성을 날리는가 싶더니 장군이의 목덜미를 문 것이다. 아주 살짝. 아, 대범한 장군이조차 놀랄만한 돌발상황이었다.
순한 녀석이라 방심했다. 장군이는 뽀미 녀석이 이제야 친해질 마음이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입장에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끼잉-. 내가 방심했다.
드르륵-.
장군이와 뽀미가 동시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개집에서 갑자기 거대한 투명 문이 열린 것이다. 어른 인간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자-, 애들은 자러 갔으니 어른들끼리 짠 합시다, 짠!”
헤헤헥-. 주인 아저씨 손멍멍 목소리다.
“남자들만 마시려니 미안해서 어쩌죠?”
헤헤헥-. 저건 홍왈왈이라는 아저씨 목소리야.
음성 원점을 역추적해 거리를 계산해 보니 밖으로 나오려는 건 아닌 모양이다.
헤헤헥-.
야, 별일 아냐. 계속해 봐.
으르르-.
인간들 목소리 사이로 느릿하고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새어 나왔다.
음악 탓인지 눈꺼풀이 저절로 게슴츠레하게 내려갔다.
***
끈적한 음악에 몸을 묻고 선글라스 속의 눈이 반쯤 감긴 모습이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호텔 카페에 들어선 신상열은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약속 상대를 찾았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듯, 다부진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이 반쯤 섞인 선글라스가 아니었다면 그 눈빛에 다리가 풀렸을 것이다.
신상열은 그 사내의 앞으로 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전화 주신 문석-.”
“맞아. 앉아.”
굵직한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공기 대류가 멈춘 듯 순간 숨쉬기가 거북했다. 신상열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하려 들어 올리는 손을 문석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잡아챘다.
“지난번엔 여자였는데.”
초기 의뢰자는 자칭 백사장이라는 여자였다. 한데 연락처는 그대로였으되 담당자가 바뀌어 있으니 문석일로서는 그 점을 짚어 경계하는 중이었다.
신상열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질문이었다.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짧은 대답만 남긴 신상열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부 문제니 더 알려 들지 말라는 뜻이렷다, 문석일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열을 노려보는 듯한 눈빛은 거두지 않은 채였다.
문석일이 입술을 달싹였다.
“처리했다.”
문석일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사진을 뒤집어 신상열 앞으로 스윽 밀었다.
태닝된 피부의, 빼어나게 잘생긴 남자가 호쾌하게 웃는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