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 위로와 선물 (3) >
***
진혁 또한 눈치채고 있었다.
도란도란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화였는데 언젠가부터 아빠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나. 저 영감님이 날 보시는구나. 진혁은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 책장만 응시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대정그룹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려 해도, 유명선의 눈빛은 집중의 벽을 관통해 진혁을 자극했다.
‘아오-, 불편해.’
차에서 듣기로는 아빠가 힘들 때 도움을 준 은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아빠가 귀빈으로 대접받는 분위기였다. 엄마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재벌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빠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확실한 단서를 얻었으니 더 머물 이유는 없다.
‘나가야겠다.’
우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까 창으로 보니 장군이 녀석이 영역표시와 함께 굵직한 전시회도 열던데 그것도 처리할 겸.
그리 생각하고 발길을 돌릴 때였다.
“얘야.”
유명선이 진혁을 불렀다.
“옙. 어르신.”
“허허허, 어린 녀석이 징그럽게 어르신이 뭐냐. 할아버지라고 불러야지.”
“아······, 예. 할아버니, 버지.”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천길룡에게나 두어번 사용한 말일까, 살면서 몇 번이나 불러봤을까 싶은 호칭이었다. 얼핏 유세라의 모습이 비치기는 해도 낯선 노인이자 유명 그룹의 오너. 그런 이를 할아버지라 부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져 이리 만났는데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구나. 네 얘기 좀 들려주련?”
유명선이 의자 하나를 빼고는 다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먼저 뺀 의자를 툭툭 두드리면서였다.
진혁은 순순히 유명선의 옆에 앉았다.
‘어우야, 엄청 떨리네.’
위험한 영감님인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문석일 일행을 앞에 두고도 평온했는데 유명선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위축되었다. 진혁의 저항력은 홍기준 회장까지였나 보다. 하긴, 천길룡 할아버지와 대화할 때도 은근히 기가 죽었더랬다.
진정 어른을 대할 일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아빠나 아저씨들은 제 영혼보다 어리니 그렇다 치고 말이다. 진혁은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유명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한다지?”
“예, 뭐. 그럭저럭······.”
“허허허-. 키만 큰 줄 알았더니 말투도 어른스럽구나.”
*
길지 않은 시간, 유명선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아빠의 등도 보았다가, 제 손을 잡아 다독이는 유명선과 시선도 맞추면서.
대화 주제는 주로 진혁에 관한 것이었는데, 정말 함께 사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듯 편안한 시간이었다. 모호한 긴장감은 사라지고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유세라와 홍수정 이야기도 나왔는데 유명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뭘 청소년한테 그런 부탁을 하시나.’
수정이네 엄마가 엉뚱한 건 친탁이구나. 회장 부인은 유세라를 낳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딸이 애틋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할애비한테 부탁할 건 없고?”
초면에 무슨 부탁이 있을까. 보안 관련 부탁을 하더라도 홍기준에게 아빠가 직접 하는 게 옳을 터.
“그런 건 없스-는데요.”
진혁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회장을 상대로 해요체 같은 비격식체를 사용하는 건 어렵다고 느끼며.
어려워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을까, 유명선이 서재가 떠나가라 껄껄껄- 웃었다.
“운동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들었다.”
“다른 학생들과 같은 조건일 뿐입니다.”
유명선이 아랫입술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즘-, 따님- 어머님과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는-데요. 3학년 때 기록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거든요.”
“그래도 운동할 마음은 있는 모양이구나.”
“네. 재미있어요.”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진혁은 항상 트랙을 질주하는 상상을 한다. 집착에 가까운 감정에 스스로도 영문을 몰랐지만 트랙을 떠올리면 행복하기까지 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전광판으로 몸을 돌리던 순간의 쪼는 맛에서는 쾌감을 넘어 쾌락마저 느낄 정도였다.
“할애비가 도울 방법을 찾아보마.”
“예?”
“재능 있는 사내라면 이름을 아끼지 말아야지.”
우리 기준이처럼. 유명선이 중얼거렸다.
재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름을 아끼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일까. 명함을 뿌리라는 소린가?
진혁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가진 재능을 떨치지 못하고 웅크려 숨어 살면 인생을 낭비하는 거란다. 네 아빠도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하지 않더냐? 벌 수 있는 걸 벌지 못해 손해를 보는 셈이지. 돈을 벌든, 영향력을 쌓든 말이다. 그냥 돕겠다는 게 아니다. 투자할만한 곳에 투자를 하겠다는 거지.”
장사꾼다운 말이었다.
숨어 산다는 말에 멀찍이 듣고 있던 손광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 유진이랑 우리 자기다. 정원을 보며 부러 딴청을 피웠다.
진혁의 손을 잡은 유명선이 나긋하게 말했다.
“많이들 부러워하지. 나를 말이다.”
말없이 주억여 긍정을 표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재벌 회장을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것이 사실이다. 돈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진혁의 시간이 지나고 유명선의 이야기가 서재에 개울 소리를 남기며 흘렀다.
“나는 네가 부럽다.”
유명선이 진혁의 손등을 다독였다.
마치 사고 전 홍기준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이쯤 되면 힘도, 욕심도 예전 같지 않지. 눈보다 머리가 어두워지고 늙은이 고집만 남는단 말이다.”
그리 순순히 고집쟁이로 늙어가던 중이었다.
한데 사위라는 녀석이 늙은이 가슴에 불을 지폈다.
- “더러운 뒷배 없이 세인을 세계 제일로 키울 겁니다. 직원들이 세인에 근무하는 자체로 성공한 삶이라고 느끼도록 만들겠어요.”
허언이라 해도 좋았다. 사나이 가슴에 뜨거운 기름을 끼얹는 전율이 일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열정이었다. 유명선으로서는 그 열정을 감당할 재능이 없어 사위에게 전권을 내어준 것이고.
그와 비슷한 열정이 진혁을 보며 살아났다.
과거의 인연이 한몫했을 테고 앞으로의 인연을 위한 욕심이기도 했다.
소유욕이었다.
동생처럼 아낀 손문예를 잃었고 손광연을 이제야 찾았다. 연을 더 잇고 싶던 차에 마침 맞춤한 조각이 나타났다. 늙은이의 노망에서 발한 욕심이라 해도 좋을 것이나 홍기준이 낙점했다면 더 잴 필요가 없다. 그만큼 홍기준에 대한 유명선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운동이 재밌다면 이 할애비가 재밌는 선물을 보내주마.”
사위가 점찍어 두고 금지옥엽이 잠꼬대로 부르는 녀석을 잡아둘 작은 투자였다. 할아버지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었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욕심쟁이의 미련이었다.
“나머지는 네 아빠와 상의하마.”
“예······.”
진혁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주겠다는 소린지도 몰라 감사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 소설에서처럼 차라도 한 대 사주시려나? 재밌는 선물이라면 설마 겜보이 같은 건 아니겠지.
선물을 준다더니 아빠와 상의한다는 소리나 하고. 정말 유 씨 집안사람들은 엉뚱하기가 하마 궁뎅이 같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을 보며 유명선이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정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보고서를 훑으며 손광연이 중얼거린 소리는 유명선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이 자식은 타자기나 컴퓨터 놔두고 왜 손으로 썼지?”
***
‘백만 원.’
유명선 회장의 집을 떠나 홍수정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진혁은 빳빳한 수표를 들고 눈만 끔뻑였다. 용돈이라며 유명선 회장이 쥐여준 수표였다.
지갑에서 천만 원짜리 수표가 나왔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 “어이쿠쿠-, 늙어서 이런다. 허허허-.”
잘못 꺼냈다며 호들갑 떨던 유명선 회장의 모습이 친근했다.
부자 아빠 덕분에 여느 중학생들이 구경하기 힘든 천만 원짜리 수표도 구경해 보기는 했다. 그런데 백만 원짜리 수표가 제 수중에 들어온 건 다시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십만 원 수표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텐데.
회장님이라더니 통이 크긴 했다. 큰돈이 생기니 오랜 시간의 자동차 여행에 식곤증까지 겹쳐 나른했던 몸에 긴장이 흘렀다. 이걸 어디에 쓸까, 이걸로 뭘 하면 부자 오빠가 될 수 있을까.
겨울에 군고구마를 팔까, 여름에 해수욕장에서 튜브 대여를 할까. 밭에서 수박을 따다가 팔아도 제법 벌리겠다. 아, 훔쳐서 팔아야 하는구나.
진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뒷좌석에 앉은 엄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거요.”
“응. 엄마가 잘 맡아줄게.”
정말로 잘 맡아줄 엄마다. 초등학교 내내 저축한 우체국 통장도 진혁이 알아서 관리하도록 통장을 넘기셨으니까.
한유영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유진이도 엄마가 맡아줄까?”
“으응- 으응-.”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유진이는 몸을 홱 틀었다.
다섯 살이 뭘 알고 저러는 걸까 싶지만, 쿠키 전쟁을 곱씹어보면 이해할만했다. 그래서 한유영은 전통적인 거래법을 제시했다.
“유진아 이거 봐. 이거 두 개랑 그거 하나랑 바꾸자.”
한유영이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흔들었다.
몸을 돌려 모녀를 보던 진혁의 입이 헤- 벌어졌다. 2천 원으로 백만 원을 사려는 걸 보면 엄마도 대단한 장사꾼 기질이 있는 듯 보였다. 아빠도 저런 식으로 땅부자가 되신 건 아니겠지?
“앙대는데, 에헤헤-.”
그러나 유진이는 호락호락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지금도 꼭 쥔 수표를 끝내 내놓지 않잖아. 유진이는 분명 알고 거부하는 걸 거야. 그럴 테지. 지폐와 수표는 질감부터 다르니까.
잠자코 있던 진혁이 나섰다.
“그러다 잃어버려. 오빠한테 맡겨.”
“녜-.”
진혁은 유진이가 건넨 수표를 다시 엄마에게 맡겼다.
황당해하는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중개수수료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슬슬 돈의 노예가 되려는가.
이 또한 호르몬의 명령으로 뉴런이 제멋대로 자유결합한 결과겠지.
헛소리를 삼킨 진혁이 머리를 강하게 저어 욕심을 물리쳤다.
지금은 학생 신분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마가 알아서 챙겨주시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람.
헤흑-.
용돈은 받지 못하고 고깃국에 밥만 잔뜩 먹은 장군이가 배부른 한숨을 내쉬었다.
*
홍수정의 집에 도착해서 가장 신난 건 장군이였다.
정원에 골든 리트리버가 있었는데, 이 녀석은 워낙 순해서 장군이가 오두방정 개지랄을 떨며 까불어도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사료를 빼앗아 먹어도, 귀를 물고 잡아당겨도 마찬가지였다.
걱정된 진혁이 경고를 날렸다.
“장군이 그러다 물릴라.”
근육질이라 퍽퍽하긴 해도 이빨은 박힐 거다.
“갠타나 오빠. 우디 뽀미는 순해.”
“뽀미? 여자애야?”
“남댜.”
수놈인데 이름이 왜 뽀미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장군이도 장군인데 뽀미가 뽀미인 게 대수인가. 목에 분홍색 리본도 홍수정이 묶어준 거겠지.
‘어릴 때도 핑크색을 좋아했구나.’
사석에서는 분홍색 니트를 즐겨 입던 홍수정이다.
리본 하나에 과거가 떠오르다니, 어쩌면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홍기준의 차가 도착했다. 요즘 주말도, 낮밤도 없이 일하는데 진혁의 가족이 오기로 해서 큰맘 먹고 일찍 퇴근했다고.
진혁은 홍기준의 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보고는 잠시 숨을 멈췄다.
‘김철민 부장님.’
홍기준 회장의 차를 운전하던 그 50대 부장. 사고 순간에도 한 차에 타고 있었다. 홍기준 회장 밑에서 일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많게 봐도 스물다섯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려 보였다. 운전석에서 내려 인사하는 모습이 그저 훤칠한 경호원 같지 않은가.
‘기분이 이상하네.’
그렇다고 아는 체할 수도 없고, 그저 반가운 마음을 담아 묵례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팀원 민용락 부장도 저 또래일 텐데.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군대에 있을까.
진혁이 회상에 잠긴 사이, 야식 챙겨 먹으라며 홍기준이 김철민에게 수표를 몇 장 건넸다. 야식값이 아니라 월급이라 해도 믿을 액수였다.
“나 때문에 주말에 쉬지도 못하네. 내일은 아침 늦게 봅시다.”
“네, 부회장님.”
진혁이 헛숨을 들이켰다.
‘부회장이라고? 나이 서른아홉에?’
애초에 후계자라며 대대적으로 공개된 터였고, 사장 직함을 달고 명예직인 그룹 부회장으로 불리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진혁이 놀란 이유는 그 그룹이 세인이기 때문이다.
세인그룹의 부회장은 그 상징성이 뭇 기업과는 다르다.
이 아저씨 진짜 출세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