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96화 (96/338)

# 96 < 위로와 선물 (2) >

손광연의 질문에 유명선은 고개를 저었다.

박운철은 의뭉스러운 데가 있어서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도 친우로서 행동과 눈빛을 보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었다. 서로 세월의 옷을 입으며 왕래도 뜸해졌고, 박운철은 자리를 보전한 것이 벌써 두 해가 넘었다. 심부전증이 심해 에크모라 불리는 산소마스크에 의존해 겨우 살아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옛날에도 손문예를 거두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나머지 손광연을 돌보는 조건을 내걸지 않았을까, 유명선으로서도 그리 추측만 할 뿐. 그 속 검은 놈은 끝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죽게 생겼다.

심각한 유명선의 표정을 살핀 손광연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원하는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우회하려는 생각이었다.

“형님들은 잘 지내십니까?”

“음-. 첫째는 쫓겨난 주제에 신수가 훤해졌고, 허허! 별······.”

유문식을 떠올린 유명선이 잠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제 어미가 죽은 후 볼 수 없었던 밝은 표정을 나이 50이 다 돼서 보여줄 줄이야.

“둘째는 무슨 반도체 기계 개발하겠다고 바쁘지. 둘째가 아주 제법이야.”

언제 심각했냐는 듯 유명선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세인기계 설비 개발이라는 문구가 적힌 보고서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공정, 무슨 공정 복잡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국산화를 목표로 개발 중이라고 하는구먼. 기준이가 맡은 케미컬에서는 또 무슨 약품을 만들 거라고 하는데, 공정마다 사용하는 화학약품이 다르다고-.”

유명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려워, 어려워, 중얼거리면서였다.

진혁은 귀를 열고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홍기준 아저씨는 이미 반도체 직접 생산에도 손을 뻗었구나. 유명선이 가볍게 던지는 단서만으로도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상이 너무 빨라. 우리 아버지도 살아생전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싶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젊은이들이 적응력이 좋아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깨닫고 보니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변화를 만들고 가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유명선은 잠시 주억인 후 말을 이었다.

“인정해야지. 물러날 때가 됐어. 적당하다 못해 훌륭한 후임자를 찾았으니.”

편안한 표정이었다.

“후세에 뭔가 남겨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값진 일인가 말이야. 재산이든 권력이든······.”

그 말과 함께 멀리서 딴청을 부리는 진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광연의 눈동자도 아들을 찾았을 때, 유명선이 말을 맺었다.

“······ 사람이든.”

그래, 나도 사람을 남겼지. 손광연은 잠시간 흐뭇한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감동에 빠져 아들의 중요한 의뢰를 놓칠 순 없는 노릇이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진혁이 반드시 물어보라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몇 발짝 떨어진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저, 그런데 대정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어떻게든 대정과 관계된 질문을 던지라는 아들의 사주였다.

마땅히 의심할 곳이 대정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명선의 대답은 단호했다.

“무슨 소릴. 일제에 빌붙어 큰 게 대정인데.”

진혁의 귓바퀴가 팔락거렸다.

미간을 오므린 손광연이 갸웃거렸다.

“얼마 전 월간지 인터뷰에서 박우정 사장이-.”

“나도 봤다.”

말을 끊은 유명선이 낯빛을 굳혔다.

“허허-, 처가 재산 들어다 왜놈들에게 바치고 이것저것 많이도 챙겼지. 그러다 해방되매 여기저기 뇌물로 많이 날려 먹고.”

“처음 듣습니다.”

“박가하고 그 아들 외에는 나만 아는 사실이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 독립운동을 지원해? 허허허-, 정원 군이 웃겠다.”

손광연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크게 떠졌다.

멀리서 엿듣던 진혁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하지 않았나.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손광연의 경악 어린 반응을 달리 읽었는지 유명선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 정원 군이라고 있었어. 성씨도 얼굴도 몰라. 나도 박가 놈에게 듣기만 하고 본 적은 없는 친구야. 일찌감치 가산 다 정리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동란 때 따르는 친구들을 이끌고 참전했다지. 박가 놈 사업수완을 믿고 남은 자금을 맡겼다더구먼. 내가 박가 놈에게 들은 얘기는 그 정도야. 아무리 술이 돌았다 해도 속이 시커먼 놈이라 자세히 얘기하는 법이 없었어. 그나마 그런 얘기를 내게 했다는 자체가 박가 놈이 나를 둘도 없는 친우로 대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친구가 박가에게 맡겼다면 벌어서 좋은 일에 쓰라고 한 거 같은데. 박가 놈이 말해주질 않으니. 유명선은 턱을 쥐고 끌끌 혀를 찼다.

일말의 동요 없이 손광연이 입술을 뗐다. 진혁의 눈에도 놀라운 평정심이었다.

“혹시-.”

“그래.”

“제가 잘 몰라서 그럽니다만, 독립군 출신은 군적에 들지 못했나요?”

“비일비재했지. 일종의 알력이었을 거야. 당시 국방군의 일방적인 배척으로 보는 게 맞겠지만. 승자의 입맛에 맞추느라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과 사건이 얼마나 많더냐? 헌데 그건 왜 묻니?”

“아닙니다. 그런 분이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지 않을까 생각했죠. 아무튼 대정이 그랬다니 의외네요.”

확신을 얻으니 언제 평정심을 유지했냐는 듯,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손광연의 시뻘게진 눈동자가 하릴없이 떨렸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국군 기록에도, 독립군의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니.

이 비분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유명선은 손광연과 진혁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자신이 아는 대로 늘어놓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늙은이의 즐거움인데 아들놈들은 재미없다며 딴짓을 하고, 유명선이 여전히 예뻐 죽는 딸년은 쿠키만 축내지 않던가.

이렇게, 손광연과의 재회는 유명선에게도 위로가 되고 있었다.

“대정은 독립운동을 지원한 게 아니라 독립자금의 도움을 받은 셈 아니겠니? 아무리 기업 이미지가 중요하다지만 뻔뻔하게도 그런 인터뷰를 하는 걸 보면 우정이 그놈도 박가 놈 아들은 확실해. 그러고 보니 너희 어머니도 박가 놈에게 많이도 투자했다지.”

“어머니도요?”

그럴 재산이 없었을 텐데요. 손광연은 물으려다 말았다.

어차피 손광연은 자세히 아는 바가 없고, 유명선도 박운철과 어머니에게 들은 단편적 정보뿐일 테니.

“음. 그랬다고 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시시콜콜 묻고 따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젊을 때는 더 과묵했지. 한데 너희 어머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와는 오누이처럼 지냈다 해도 말뿐, 전화기도 없고 바쁜데 서로 얼굴을 몇 번이나 봤겠니? 서로 간의 속내는 나눌 기회가 없었어. 너희 어머니가 그리 갈 줄 알았다면 오라비의 정을 많이 줬다면 좋았으련만, 시간이 무한한 줄 아는 이 하루살이의 착각이었지······.”

노인의 아련한 회상은 멀리 들렸다.

손광연은 탁자의 서류를 내려다보며 침만 삼킬 뿐, 입술을 꾹 닫고 대꾸하지 못했다.

진혁도 지그시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가만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정원 군······. 손정원.’

할머니가 아빠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함께 찍은 사진에만 존재하던 사람.

군모와 제복 차림으로 멋진 콧수염이 입술을 덮도록 환하게 웃던 사람.

진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유물처럼 땅속에 묻힌 퍼즐이 운명의 힘을 빌어 세상 밖으로 솟아올랐다.

***

진혁은 잠시 화장실에 들러 수도꼭지를 돌렸다.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슬픔도 분노도 쉬이 느끼지 못하던 건조한 심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아버렸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너무 불쌍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렵게 산다던 과거 기사가 스쳐 간 이유는 우연일까. 같은 민족이니 잘 믿고, 그러다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 결국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찬물로 씻어낸 진혁의 얼굴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유명선과 친구라 하나, 박운철은 제 치부가 될 수 있는 내용은 공개를 최소화했다. 인간이란 으레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서사를 이끄는 법이므로. 그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한다 해도 공감하거나 용납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도 박운철을 도울 정도로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남기신 거겠지.

더 볼 것도 없었다.

손광연을 위협하는 건 대정뿐이다.

그런데 박운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용의자는 한 사람뿐이다.

‘박우정.’

이번 세상에서는 홍기준에 밀려 유명세가 덜하지만, 과거에는 최고의 기업인으로 남았던 사람이다. 박운철이 열여덟에 낳은 아들이니 지금 거의 환갑에 가까울 나이.

유명선에 의하면 박우정이 키를 쥐고 있다.

‘돈 때문인가. 할아버지 명의의 공증 자료라도 있는 건가.’

증거가 있으리라는 가정은 비현실적이지만 의심할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미국 유학 중인 배다른 형제를 죽였다는 루머도 돌던 사람이다. 루머가 아닌 진실이라면 당연히 유산을 나누기 싫어서 벌인 짓이겠지.

대정의 절반, 아니 반의 반만 되어도 그 가치가 얼마나 될까.

못해도 120조가량 되려나. 현재의 기업가치는 몰라도 30년 후 미래의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아무튼 큰돈이 걸렸다면 박우정에게는 일가를 해할 동기가 될지도 모른다.

‘언제고 바짝 말려서 갈기갈기 찢어 삼켜주마.’

망둥어처럼.

마음 같아서는 무력으로 때려 부수고 싶지만 그건 쉬운 복수다.

진정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빼앗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했다.

진혁은 분노한 와중에도 차분히 훗날을 기약하고 다음을 안배했다.

‘그 사람들 실력 테스트하기 좋겠어.’

만약 문석일이 진혁이 아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들 나름대로 쓸모를 증명하는 셈이 된다. 어떤 방법을 쓸지는 몰라도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다.

부릴 사람이 필요하다.

진혁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박우정. 악연은 악연이네.’

전생에 박우정의 약쟁이 삼남은 결혼한 당일 밤 약에 취해 수갑을 찼다. 나이 마흔에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홍수정과 매작이 닿았으나,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었다. 지금은 대학생쯤 되었으려나. 슬슬 약에 손대기 시작했을 것 같다.

홍수정은 그날부로 홍기준과 연을 끊다시피 했고, 세상 발랄하고 상냥했던 홍수정은 그렇게 다크 꽐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모두가 홍기준 회장 인생 최대의 실수라며 안타까워하던 사건이었다.

금지옥엽을 귀한 대접받게 해주려다 똥볼을 찼으니.

‘뭐, 몰랐겠지. 그런 약쟁이인 줄은.’

그래도 하나뿐인 딸인데 조사 좀 잘해서 보내지.

쩝! 진혁은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가족도 지켜야 하고, 홍수정이 꽐라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고.

‘중간고사 준비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다.

***

손광연은 더 물을 수도, 물을 것도 없었다.

유명선은 이미 아는 것을 모두 쏟아냈으니.

길게 말해서인지 호흡마저 가빠 보이지 않는가.

안타깝고 화나지만 분을 삭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강점이 있는 손광연이다. 이제는 그저 당한 상태로 잠자코 있을 마음도 없다. 든든한 우군이 둘이나 있으니.

우군 하나가 다시 서재에 들어섰다.

유명선은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키 큰 중학생 녀석, 서재의 책을 구경하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과 손광연의 대화에 집중하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늙은이의 흥미를 자극했다.

‘기준이가 말한 녀석이렷다?’

매일같이 서재를 들락거리는 홍기준이 진혁에 대해 말했었다.

비록 손광연의 아들이란 사실을 귀띔한 건 최근의 일이었지만, 홍기준이 공을 들이는 녀석이 있다고, 포섭이 아닌 포획 수준으로 노력 중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 한마디 못하는 사위의 어설픈 유머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래, 네가 내 손주사위가 될 놈이냐.’

정략혼에 대한 거부감과 별개로 호기심이 동했다. 자식이 어리다 한들 될성부른 떡잎을 골라 미리 짝지어두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살짝 내려간 눈꺼풀에 달린 긴 속눈썹이 제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어쩌면 한유영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 늙어 죽을 날을 받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노 회장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빛났다.

‘기준이가 눈이 좋구먼.’

이제 사위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유명선이었다. 외손녀도 잠꼬대로 녀석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던가. 가볍게 턱을 쥔 유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뭔가 이야기하던 손광연이 조심스레 유명선을 불렀다. 유세라가 대화하다 말고 딴생각하는 건 친탁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어르신······?”

“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던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의 손광연을 보며 노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사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더는 웅크리고 살지 않으려고요.”

“그래. 너는 잘할 거야.”

유명선이 손광연과 눈을 맞추며 흡족하게 웃었다.

“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인그룹, 그중에서도 세인유통과 식품의 파트너십을 통해 경영 노하우와 시스템을-.”

“허허허허허-!”

유명선의 호탕한 웃음이 손광연의 말을 잘랐다.

노 회장은 어리둥절해하는 손광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건 이제 우리 사위와 얘기해야지 이 사람아.”

“예? 그래도 어르신께서 그룹의 주인이신데요.”

“모르는 소리. 오늘 수정이네 가기로 했지?”

“예.”

“가서 확인해 봐.”

세인의 주인이 누군지. 웃느라 둥글게 휘어진 유명선의 눈매가 뒷말을 갈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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