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 위로와 선물 >
*
진혁은 나름대로 착실히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자부했다.
일단 가족을 안전한 상태에 두고 자신이 성장할 동안 아빠가 세력을 불리는 청사진을 그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홍기준의 시나리오는 진혁이 준비하는 전쟁을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건 보고서가 아냐.’
미래를 아는 자만이 준비할 수 있는 계획서였다.
아니면 외계인을 납치해 정보를 뽑아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현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무수한 보고서가 있었다. 세부내용을 살피지는 못했으나 어디 손진혁이 검토한 보고서가 한두 개던가. 첫 장의 목차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과 타임라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만큼 홍기준의 보고서 작성능력이 뛰어나기도 했다.
진혁은 심한 열병에 걸린 듯 머리가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와 새삼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애매하다.’
미래를 살아본 진혁의 입장에서 파격적이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어도, 뭔가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미래를 예측하고 앞서 나가는 선구자들도 낼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진혁은 애매하게 느낀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냈다.
‘기준이 아저씨 줄타기 잘하시네.’
과거에도 심리전과 정치력에 강점이 있는 홍기준이었다. 이런 식으로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개척자 역할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등장하지 않은 소프트웨어나 무인 항공기 등의 기술에 대한 엔지니어 선점 방식까지 상세히 기술된 걸 볼 때, 미래 지식의 보유 여부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바뀐 시장 환경에 대한 대처는 아빠에게 조언을 구하고, 시장과 관련 없는 기술은 엔지니어를 발 빠르게 선점하거나 연구소를 세워 직접 개발하겠다는 의도겠지.’
홍기준의 의도가 보이는듯했다.
후우우-. 심호흡하며 울렁이는 속내를 다스릴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유명선 회장이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령에도 불구,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허허, 무슨 말인지 알겠니? 이 할애비는 옛날 사람이라 절반은 모르는 내용이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다.”
유명선이 마음껏 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네가 보면 뭘 알겠느냐는 눈빛과 함께였다.
볼을 부풀린 진혁을 의아하게 보던 손광연이 다가왔다.
“어르신, 저도 봐도 될까요?”
“되지 그럼. 우리가 남도 아니고, 어디 가서 떠들 것도 아니지 않니? 준식이나 문식이도 이미 아는 내용이다. 홍 서방이 설명을 해주는데 전문용어는 몰라도 사업방식이나 사업성 자체는 괜찮았어.”
보고서를 살핀 손광연도 숨쉬기 버거운 사람처럼 볼을 부풀렸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실현된다면 미래를 독점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유명선은 신이 나서 사위 자랑에 열을 올렸다. 보안이 필요한 보고서였기에 사위는 장인의 서재에서 사는 날이 많다고 했다. 수기로 작성 후 복사한 사본을 들고 나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게 아쉬워. YS를 만나서 담판까지 지었는데 씰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선거자금 얼마나 내놓을지나 말하라며 빠꾸를 맞았다는 거야.”
유명선 회장이 손에 든 것은 인터넷망 구축 관련 보고서였는데,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홍기준임에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만들었다가 낙담을 했다고 했다.
“어르신도 정치권에 줄 대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랬지. 홍 서방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국가기간산업으로 추진을 해야 하니 대선 캠프와 얘기를 해야 한다는데 내가 어쩌겠나. 우리 홍 서방 하는 일인데 믿어줘야지. 그런데 이 친구도 그쪽에서 돈 얘기가 나오기에 그냥 일어섰다는구나. 허허허. 가만 보면 그 성격이 나를 닮아서 사위가 아니라 아들 같다니까?”
진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성정이 마음에 들어 이전 생의 유명선 회장도 딸에게 상속하는 형식으로 사위에게 넘겼겠지. 아무튼 인터넷망 보급은 앞당기기 어려워진 모양이다.
‘아깝네.’
이 대목에서 진혁은 통신사업권을 어떻게 빼앗아왔는지 묻고 싶었다. 살펴본 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수익성은 떨어지지만 보유 자산이 큰 몇 개의 사업을 넘겨주는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하나 진혁에게는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된 회장에게 직접 질문할만한 배포가 없었다. 기자도 아니고 주제넘는 짓이지.
‘미래를 모르니 저쪽에서도 현물에 혹해서 맞교환한 건가.’
홍기준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니 가능성 있는 가설만 세울 뿐이었다.
진혁은 두 어른이 편하게 대화하라는 뜻에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보고서를 더 훑고 싶었지만 예의도 아닌 것 같았고.
보고서를 훑던 손광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알겠는데 생소한 영역이 너무 많네요. 저도 세상 돌아가는 거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암, 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뒤처지지 않는 법이지.”
“그런데 기준이는 왜 YS 그 양반을 만났다고 합니까?”
“다음 대권으로 봤으니 그랬겠지. 정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매섭게 감시하고 시류를 읽는 눈이 있어. 이제까지 그 친구 말대로 되지 않은 게 없으니.”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나 봅니다. 그 책만 읽던 순둥이가 지금은 세상을 읽고 있잖습니까.”
“허허허. 내 말이! 홍 서방 같은 인재가 아직 대정에 있었으면 어찌 됐을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유명선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통하게 웃었다. 한 자리 내놓으라고 찾아온 사위이니 대정 그룹에서 그 재능을 사용했을 리는 없겠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 아니겠나.
손광연이 신문 헤드라인을 짚으며 유명선에게 눈을 돌렸다. 차기 대권주자에 대한 기사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정 회장은 어떨 것 같습니까?”
“아이고, 그 친구는 재벌이 재벌을 타파하겠다던데? 차라리 평양 가서 자아비판을 하라고 해라. 진심이라고 해도 유권자가 믿지를 않는데 그런 말에 혹해서 찍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늙은 회장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우스꽝스럽게 말하자 손광연이 주먹으로 입을 가려 웃음을 참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부자지간으로 오해할 만큼 친근해 보였다.
“기준이는 정치 같은 거 안 한답니까? 하면 잘할 텐데요.”
“더러운 뒷배 없이 세인을 세계 1등 그룹으로 만드는 게 꿈이라더라. 정치는 이용할 대상이지, 잘못하면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기 십상이라고 말이지. 자본가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건 역사의 줄기를 바꾸는 짓이라는 말도 하더구먼. 일개 시민과 자본가의 입김은 다른 법이라고 말이야.”
“저도 기준이한테 세상 보는 눈을 배워야겠네요.”
“암. 우물 안 개구리라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사는 세상조차 제대로 알기 힘들지. 남들이 사는 세상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야. 바깥세상을 살피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지.”
유명선이 신문 헤드라인 하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니 온갖 개판을 치고도 이렇게 역사가 판단할 거라는 무책임한 망발이 먹히는 게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짓밟아놓고 후세가 평가해 줄 거다? 어림없는 소리지. 현재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자라면 오늘과 내일을 책임감 있게 지켜야 하는 게다. 판단도, 평가도, 책임도 산 사람이 져야지. 세상의 주인은 살아있는 사람들이니까.”
유명선은 잠시 동의를 구하듯 손광연의 눈을 응시했다.
“늙은이들이 만든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하는데, 최소한 반성은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 우리 땐 고생했는데 왜 몰라주느냐 서운할 필요가 없어요. 각자 사는 시대가 다르니까. 고생한 기억은 함께 고생했던 사람끼리 나누면 그만이지 무슨 벼슬했다고 유세를 하느냐 말이야.”
어려운 말을 들은 척, 진혁이 뒷머리를 긁었다.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진혁이 선호하는 처세법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에서는 형언 못할 울림이 따랐다.
‘나한테는 저런 말 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색다른 경험이었다.
정치니 뭐니, 남의 이야기였고 다른 세상의 담론이었다.
생존을 염려했던 아이에게 정치가 다 뭐란 말인가. 스승은커녕 멘토라 부를 사람도 없었다. 하여, 뻔한 이야기든, 곱씹을만한 이야기든 저런 어른들의 대화가 진혁에게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세상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기분은 이렇듯 의도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진혁을 찾아왔다.
아빠의 반응도 진혁을 흐뭇하게 했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네.’
뭐, 평소에도 아이 같은 짓을 자주 하는 사람이지만 어른과 어울려 아이처럼 반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뜻이다.
이렇다 할 말 상대 없이, 한가한 시간이 되면 멍하니 들판을 바라보던 아빠였다. 방학 때마다 찾아올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몰라볼 리 없었다. 어른을 만나 즐겁게 대화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홀로 자란 아빠의 외로움이 투시되는 듯했다.
이 순간, 유명선의 서재는 마치 손 씨 부자를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처럼 포근했다.
‘이제 슬슬 내가 원하는 대화를 하셨으면 좋겠는데.’
진혁은 아빠에게 눈짓을 보냈다.
의도를 알아챈 손광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반가운 손님을 맞은 노인은 손광연이 쉽게 파고 들어갈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책장을 구경하는 진혁의 눈치를 보며 유명선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아이들 엄마 때문에 그리 가서 살게 된 게냐?”
“예. 그렇죠, 뭐.”
손광연이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자 유명선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손광연의 등을 어루만지거나 툭툭 다독였다.
“잘했다. 잘살고 있다니 참 잘했어. 아주 잘했어.”
유명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식들 연애에 간섭하지 않았더니 유문식도, 유준식도 어디선가 본듯한, 가족과 닮은 배필을 데려오지 않던가. 혈관을 흐르는 액체에 닮은꼴을 찾도록 명령하는 기능이 있는 건 아닐까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데 손광연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용케도 제 어미랑 쏙 빼닮은 여인을 찾았구먼.’
대학 시절 농활을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고는 하는데.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만났다니 그야말로 운명의 이끌림 아닌가.
***
와삭와삭-.
마치 유세라가 빙의한 듯 매끄러운 섭취동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운명의 쿠키였다.
유진이가 엄마의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엄마, 엄마. 고만 먹어요오-.”
“응? 왜?”
“유진이 먹을 거 없어요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딸을 보며 한유영이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어째 이 쿠키만 입에 넣으면 뭐에 홀린 듯 손과 입이 멈추지 않는다. 다른 가족, 특히 유진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아이를 먼저 챙기던 엄마였는데. 지금은 총성만 없을 뿐, 딸과 쿠키 전쟁이라도 벌이는 사람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쿠키 접시는 텅 비었고, 딸은 세상 서운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서 어쩌니. 이거라도 먹을래?”
유진이는 말없이 엄마가 먹던 쿠키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등을 돌리고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때 모녀의 대화를 들은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호호호-. 따님이 너무 귀여워요. 쿠키 더 드릴까요?”
“녜! 엄마가 다 먹었지요? 유진이 못 먹었지요!”
유진이는 기다렸다는 듯 엄마를 고자질했다.
전쟁이 비방전으로 비화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염치없지만 조금만 부탁드려요.”
가정부 아주머니 덕에 한유영은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한유영은 입과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고 물러나 앉았다. 쿠키에 달려들지 않기 위해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었는데, 미처 통제하지 못한 혀가 거푸 입술을 탐했다.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엄마를 등진 채 쿠키 접시를 끌어안은 유진이는 먹는 걸 멈추고 사부작댔다.
한유영이 들여다보니 토끼 가방에 쿠키를 쑤셔 넣고 있었다.
“유진이 뭐하니? 지금 먹어야지.”
“장군이 줄 거예요. 장군이 까까 좋아해요오-.”
아, 유진아.
먹을 게 생기면 늘 장군이와 나눠 먹는 아이였다.
한유영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아주머니가 위로의 눈빛을 던졌다.
그래도 당신은 훌륭한 엄마예요.
이 댁 딸 유 모 씨는 수정이 굶는 동안 혼자 다 먹어치웠어요.
“유진이 어디 가니?”
“장군이랑 까까 먹으러 가요오-.”
엄마가 빼앗아 먹으려 드는 걸로 오해했을까, 손유진은 짧은 다리에 속도를 올려 다다다- 달려갔다.
바깥은 어두운데, 걱정된 한유영은 놓칠세라 딸의 뒤를 쫓았다.
***
마침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얻은 손광연이 아들과 사전에 협의한 질문을 던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 많은 나이 차 때문에 태도는 조심스러웠으나 내용 자체는 직선적이었다.
“박운철 회장이 저에 대해 뭔가 남긴 얘기 같은 건 없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유명선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진혁이 넘기던 책장이 고요히 멈췄다.
드디어.
운명의 산 정상에서 진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엿듣기 모드.’
열네 살 소년의 망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