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 우연이 빚은 운명 (3) >
성채의 숲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침내 차가 속도를 줄였다.
“다 왔다. 여기 나와 계시네.”
날렵하고 고집스러운 외모의 중년 남자가 저택 앞에서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오빠, 저분이에요? 되게 젊으시네요?”
“하하, 아니에요. 권 씨 아저씨인데 대학 때 가끔 뵀어요.”
안내에 따라 차고에 차를 대고 다섯 식구가 차에서 내렸다.
뿔테 안경을 쓴 권 집사가 손광연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광연 씨.”
“너무 늦게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죠.”
대문 안에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널찍한 숲과 같은 정원이 손님을 맞았다. 심심한 잔디밭에 조경수가 듬성히 자리했고 넓적한 돌이 길을 텄다.
진혁도 촌놈답게 정원을 구경하고, 돌을 만져보기도 했다.
교과서에서나 봤던 돌인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건 현무암인가?’
유진이는 정원이 마음에 드는지 장군이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장군이가 갑자기 정원 중앙의 꽤 큰 나무에 영역표시를 했는데, 어른들이 대화 중이라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까하하-! 장군이 쉬했지요?”
아직 하루해가 길어 하늘이 환했다.
멋들어진 조경수가 하늘 끝에 닿으니 나무 하나하나가 마치 녹음인 양 풍성했다.
가족의 서울 나들이도 저 정경처럼 평화로웠다.
그리 정원 구경을 하며 화산석을 따라 걷는데 우렁찬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서하십시오, 어르신!”
다짜고짜 뭘 용서하란 소린가 싶어 진혁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관을 벗어나 성큼 마중 나온 노인을 향해 아빠가 넙죽 큰절을 올린 것이다.
진혁도 따라서 절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두 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서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고민을 한 모자가 서로 마주 보며 머쓱하게 웃을 때 유명선 회장이 냉큼 다가왔다.
“허허! 일어나라, 일어나. 용서는 무슨! 어디 얼굴이나 제대로 보자.”
손광연을 일으켜 세운 노인이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고 매만졌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는 손짓이 이럴까, 애틋함이 묻어나왔다.
“허허, 촌놈이 다 되었구나. 그 허여멀겠던 도련님이 촌 사내가 다 되었어.”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재회 장면이었다. 그러나 진혁은 두 남자의 눈을 보며 그 무엇보다 특별한 만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 회장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라서 잘 모르겠다.’
어려울 때 도와주신 분이라는 것 외에는 들은 바가 없다. 단지 그 이유로 서로 저렇게 가슴 벅찬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진혁이 그렇듯 아빠 또한 좀처럼 옛일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호-, 반갑습니다.”
유명선은 한유영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잠시 요동쳤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진혁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허허허, 부모의 예쁜 곳만 골라서 닮았구나. 아빠보다 큰 것 같은데?”
눈을 크게 뜬 유명선이 손광연과 진혁을 번갈아 보았다.
“요즘 애들이라 그런가 봅니다. 하하!”
손광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제 자식 크다는데 싫어할 부모는 없었다.
“어디 보자-. 엄마를 쏙 빼닮은 이 공주님이 다섯 살인고?”
유명선은 유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눈을 맞추었다.
유진이는 찰싹- 소리가 나도록 노 회장의 두 뺨에 손을 얹었다.
“그러는 해비지는 몇 살 먹었지요?”
“어허허허허허허-! 먹을 만큼 먹었다오.”
뺨이 따가웠는지 얼굴을 찡그린 유명선이 가슴을 들썩였다.
맹랑한 꼬맹이가 선사하는 웃음이 가슴에 유쾌한 격통을 몰고 왔다.
“시장하겠구먼. 어서 들어갑시다.”
유진이를 안은 유명선이 성큼 걸어 저택으로 향했다.
무심한 척 유심히 관찰하던 진혁이 눈을 빛냈다.
‘근데 저 할아버지 아빠보다 엄마에게 눈길 주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이럴 때는 보통 어린아이가 주인공이 되기 마련.
유진이를 안고 걸음을 옮겼지만 계속해서 엄마를 힐끗거리는 모습이 진혁의 눈에 잡혔다.
‘저 회장님은 우리 할머니를 아는 분이시구나.’
진혁은 얼마 전 아빠가 금고에서 꺼내 보여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을 처음 보았다. 각각 군복과 양장을 입은 선남선녀가 빛바랜 사진 속에서 두 손을 꼭 쥐고 웃고 있었는데, 엄마와 닮은 할머니의 웃음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날의 충격이 여전한 진혁으로서는 유명선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저분은 뭔가 아실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도 존재했던 사람이니 과거에도 발을 걸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식사 자리, 어른들끼리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는 뜻에서 진혁이 유진이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는데, 긴장할 필요는 없었는지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만 편하게 나누는 모습이었다.
“홍 서방에게 들었다. 경영을 하매 네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더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진혁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빠를 보았다.
겸손인지, 연기인지. 손광연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아는 게 있겠습니까. 그 친구가 그냥 하는 소리겠죠.”
아빠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진혁은 코로 뜨거운 숨을 내었다.
‘저 여우 같은 냥반.’
동생을 챙기는 진혁을 흐뭇하게 보던 유명선의 시선이 한유영을 스친 후 다시 손광연에게로 돌아갔다.
“기준이가 그 동네에 뭘 짓고 싶은 모양이야. 뭐라고 하던데 내가 요즘 말을 따라가기가 힘들구나.”
“연수원 얘기도 있고, 보안직원 교육원 말도 나왔습니다. 뭘 할지는 이번에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전문가 의견 수렴해서 선정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임대 형식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음, 임대라는 방법이 있었구나.”
“큰 면적도 아니어서요. 50년 단위로 하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다른 영감들이야 어떻게든 사려 들겠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어.”
유명선은 굳이 추가 설명을 요구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평소 어떤 성향의 할아버지인지 알 수는 없으나, 손광연의 의사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진혁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정보도 입수했다.
50년 임대라······, 그대로 진행된다면 캐시가 꽤 많이 생기겠구나.
“그래, 너는 달리기를 그렇게 잘한다고?”
갑자기 날아든 질문이었다.
진혁은 어물거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칭찬과 관심을 받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그랬다. 그래서 더더욱, 진혁은 절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었다. 이제 홍수정과의 약속 때문에라도 유명해질 이유가 생겼지만.
“그럼 육상선수가 꿈이냐?”
“그건 아직-.”
쭈뼛거리는 진혁이 안 되어 보였는지 아빠가 거들고 나섰다.
“다른 것도 다 잘해서 그냥 맡겨두려고 합니다.”
“신기한 녀석이다. 덩치는 다 큰 어른인데 저리 숫기가 없어서야. 너 어릴 때와 많이 다르구나.”
아닌데요, 아니거든요.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렇거든요. 유명한 회장 앞에서 누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진혁은 하고픈 말을 꾹 삼키고 불고기를 잘라 유진이 밥그릇에 올렸다. 유진이는 어쩜 이렇게 낯도 안 가리고, 자리도 안 가릴까. 지금도 밥 먹는 모습 좀 보라지. 연신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자기 집인 양 편안해 보이지 않는가.
“어릴 땐 어찌나 개구쟁이였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럼 철이 빨리 든 모양이구나. 아니면 사춘기라든가.”
아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할아버지, 제 나이가 몇 갠데요.
다른 친구들은 아마도 명절마다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겠지. 그러다 한마디 받아치고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반항심이 생겨날 터. 그렇게 어른과 거리를 두는 거 아닐까.
사춘기를 겪어보지 못한 진혁의 간접체험이었다.
진혁도 호르몬의 영향을 느끼기는 하지만 충분히 제어할 만했다. 그 통제력 덕분에 별스러운 사고 없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 배경엔 운동도 한몫했으리라.
‘다 큰 내가 이해해야지.’
그래도 새롭게 얻은 일상이 달갑기 그지없었다.
온 가족이 서울 나들이도 다 해보고, 유명한 회장 댁에도 방문하고. 이 얼마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란 말인가. 호스트 집에 정원이 딸려서 개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장군이는 뭐하지?’
걱정된 진혁은 상체를 쭉 빼고 정원을 살폈다.
장군이는 이 댁에서 일해주시는 분이 고기와 밥을 섞어 준 것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물구나무서서 먹는다.
‘정말 대단한 장군이야.’
어, 옆으로 넘어갔어.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유영은 설거지를 거들겠다며 나섰다가 가정부 아주머니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응접실로 쫓겨났다. 민망함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얼굴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살림하던 사람 입장으로 한유영은 서울의 부잣집 생활방식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중간중간 대화가 끊기면 와삭와삭 쿠키 씹는 소리가 응접실을 지배했다. 차를 마시는 남자들과 달리 쿠키 맛에 홀린 한유영이 마구 흡입하는 소리였다. 유진이조차 놀란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허허, 그렇게 맛있소?”
눈이 동그래져서 쿠키를 씹던 한유영은 잠시 넋이 나갔던 듯, 유명선의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아, 저도 모르게······.”
운명적인 만남이라면 바로 이 쿠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정신을 차린 한유영은 그리 생각했다.
유명선의 얼굴에 천길룡의 인자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입에 맞으면 집에 매달 보내드리리다.”
“정말요?”
토끼 눈을 뜬 한유영을 보며 유명선 회장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사레들려 기침을 했는데 기침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뭔가 슬픈 일이 있어 우는지 헷갈릴 정도로 눈물이 풍족했다.
유명선 회장이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상체를 숙이자 한유영도 따라 숙였다.
“홍콩에서 댁으로 바로 갈 거요. 대신, 세라한테는 비밀로 해줘야 해요.”
한유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명선이 손광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린 시절 유세라 손에 이끌려 놀러와서는 서재에 꽂힌 책만 보던 손광연이었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유명선이 아련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서재는 안 가보니?”
“그럼 책 냄새 좀 맡아볼까요?”
한유영이 편하게 먹도록 배려하려는 유명선의 심정을 손광연이 모를 리 없다. 아들의 허벅지를 만지듯 건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진혁도 아빠를 따랐다.
책보다 쿠키에 관심이 더 많은 한유영과 유진이를 두고 세 남자가 서재로 향했다.
스스로 평정심 유지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진혁은 유명선 회장의 서재의 규모에 크게 놀랐다.
‘와, 엄청 넓다.’
서재라기보다 차라리 도서관 같지 않은가. 과장을 보태자면 저택이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튼튼한 집이구나. 진혁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도란도란 사담을 나누는 아빠와 노 회장을 지나친 진혁은 창가로 이동했다. 기다라니 뻗은 원목 탁자를 손가락으로 스케이팅하듯 한참이나 훑으며 도착한 곳. 탁자 끝에는 여러 조간신문이 고이 접혀있고, 보고서 뭉치도 한가득이었다.
‘신문은 아침에 읽었고.’
곁눈질로 보고서를 살폈다. 수기로 작성한 보고서 초안이었는데, 갈겨썼지만 필체가 유려해서 판독에 어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 진혁에게 익숙한 필체였다.
‘홍기준 아저씨 글씨체.’
홍기준 회장은 매년 임원들과 일부 직원들 앞으로 연하장을 보냈다. 진혁은 한 해도 빠짐없이 받았는데, 손글씨로 쓴 연하장에 내 딸 잘 부탁하네,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마침 유명선은 아빠와 대화하며 웃느라 이쪽을 살피지 않고 있었다.
‘중요한 보고서를 왜 여기에 두셨지?’
아, 회장님 사택이니 여기만큼 보안이 잘 된 곳은 없으려나.
진혁은 뭔가에 홀린 듯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는데, 그에 따라 맥박도 빨라졌다. 혈압마저 올라갔는지 아빠와 유명선 회장의 대화가 바람 소리처럼 멀어졌다.
〈대오통신 인수협상 전략〉
〈〇〇건설 인수계획〉
〈2세대 이동통신 글로벌 시장 개척 전략〉
〈3세대 이동통신 선도를 위한······〉
〈전용회선 구축을 통한 인터넷망 보급 계획〉
〈세인자동차 연구소 설립 계획〉
〈세인기계 주력사업 선정을 위한 연구보고서〉
〈해외 플랜트 시장 진출을 위한 가스터빈······〉
〈세인 성장 20개년 계획〉
〈세인 우주항공설립을 위한 사전 보고〉
〈군수 산업 진출을 위한 세인 테크니카······〉
〈SSS 설립 추진 계획〉
〈위성발사체 연구 개발 계획〉
〈마이컴 탑재 라디오통신 무인비행기 개요〉
진혁의 눈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건······.’
세계정복 시나리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