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91화 (91/338)

# 91 < 보잘것없는 태동 (2) >

진지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진혁은 과거로 온 후 처음 맞이한 어른의 시간이었다.

그건 손광연도 예외가 아니었다. 홍기준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으니, 가족과 이런 대화를 하게 되리라는 상상을 못해 본 입장에서는 신선하다 할 것이었다.

손광연은 머릿속으로 사업계획을 세우고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해야겠어.’

이미 곳곳의 경작지에서 상품작물을 납품하고 있으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인건비와 운송비 비중이 컸다. 충분한 타산을 거쳐 시작한 대규모 시설재배, 인부를 투입한 단순 계약재배였기에 그 또한 손광연의 입장에서는 사업이라 칭하기에는 보잘것없었다. 사업화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했다.

“진혁이도 아빠 일 많이 도와줄 거지?”

똑똑하고 젊은 두뇌니까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런데 이 자식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진혁이 아랫입술을 밀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 학교 가야죠.”

이 자식 봐라? 손광연의 눈이 배 가른 돼지저금통처럼 찢어졌다.

하나 틀린 말도 아니다. 학생은 학교에 가는 일이 당연하고, 개근상을 가장 값어치 있는 상으로 인정하는 세상이니. 막말로 학교에 가겠다는 학생을 누가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어른스러워 아버지로서도 신분이 종종 헷갈리는 아들이다.

“그럼 한 수만 물려 줄래?”

“그게 무슨······.”

뚜애앵-. 진혁은 두개골이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사업을 돕지 않을 생각이라면 바둑돌 한 수 물려달라는 소린가. 바둑 두며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반전이라니. 아빠의 엉뚱함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황소 궁뎅이보다 엉뚱한 아빠다.

“아니, 아니. 두 수는 물려야겠다.”

손광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방정맞은 손짓이 유진이를 닮았다. 끝 간 데 없는 엉뚱함이다.

당연히 상남자 진혁은 엄숙한 얼굴로 두 팔을 교차해 X자를 만들어 보였다.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손광연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한유영은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남편과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세라와도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지만, 남자들은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사용한다. 도대체 쉬운 말 놔두고 왜들 저러는 걸까. 그래서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적이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 적인지 확신 없는 남자들의 대화임을 알 리 없었다.

아들이 반제도적, 반사회적 어쩌고 어려운 말을 쓰는데, 남편에게도 어려운 말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 남편을 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내조라고 생각한 한유영이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아-. 아빠 피곤하신데 그만 쉬시게 해드려.”

집안의 최고 존엄이신 아내의 목소리에 반색한 손광연이 발작적으로 엉덩이를 뗐다. 두 손을 어지럽게 휘저으면서였다.

“아싸! 무승부!”

짜각! 짜가라락-.

바둑판 위의 바둑돌을 마구 흐트러뜨린 손광연은 한유영을 향해 재빨리 달아났다. 아내의 등 뒤로 숨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은 듯했다.

‘저 아빠가 진짜······.’

발군의 태세전환은 감히 따를 자가 없다.

지금도 진중함은 간데없고 한유영 딸랑이만 남지 않았나.

‘도와주나 봐라.’

뭐. 필요하면 돕겠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하실까.

그래도 마음 한편에 드리웠던 그늘이 걷힌 것 같아 진혁은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얼굴에 미소를 걸치고 바둑판을 정리하는데 반쯤 눈이 감긴 유진이가 곰 인형을 끌어안고 다가왔다. 오빠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속닥속닥-.

“구래도 오빠가 이겼지요?”

느허허-.

역시 동생이 최고다.

진혁은 동생 허리를 번쩍 들어 안고 빙빙 돌았다.

“까하하-!”

집안 분위기가 전쟁 다큐멘터리의 국경지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총성이 들릴지 모르는 긴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존하는.

***

새벽인데도 손 씨네 집 3층 서재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세 명의 손 씨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자는 중이다. 손광연은 안방 침대에서, 진혁은 2층 제 방에서, 손유진은 진혁의 방 앞에서 개구리 자세로 잠꼬대를 하고 있다.

“필기를 열심히 했으니까 망정이지.”

한유영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노트를 뒤적였다.

열린 창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와 귀뚜라미 소리가 면학에 도움을 주었다.

아들이 운동에 두각을 보이며 남편에게 말해 방송통신대학을 등록한 터였다. 식품영양학 전공을 등록 후 매주 빠짐없이 강의를 듣고, 방학 때는 계절학기도 들었다.

성장에만 초점을 맞춰 식단을 꾸려서 그런 걸 거야. 다 엄마 탓이다.

가슴을 툭툭 두드리는 주먹이 묵직했다.

“바나나? 이건 매일 먹는데. 샐러리, 부추, 양배추, 돼지고기, 해조류, 굴······.”

남자에게 좋은 음식이라며 교수가 여담처럼 말할 때 귀를 쫑긋 세우고 필기한 한유영이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니 다른 학생들은 웃어넘겼지만 한유영은 공부에 목마른 사람처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굴은 아직 때가 안 됐을 텐데. 겨울에 굴 까러 가야겠다. 달걀, 동물 간, 호두? 호두처럼 생겨서 호두가 호두에 좋은 건가? 으흥흥-.”

어느새 근심은 사라지고 엉뚱한 코웃음이 서재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다른 건 평소에 자주 먹는 음식이니까 겨울에 굴 위주로 식단을 짜볼까?”

부추나 양배추는 진혁이 좋아해서 거의 매일 식탁에 내고, 돼지고기도 고기를 좋아하는 유진이를 위해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결국 어린 시절 부실하게 먹은 탓이라는 결론만 내렸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주머니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니 별도리가 없다. 굴이라도 먹여보자.

그리 생각하며 한유영은 계단을 내려왔다.

“아이코, 우리 딸. 또 여기서 자고 있네?”

한유영이 유진이를 안아들 때였다.

달칵-. 진혁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 진혁이 깼니?”

“네. 이 시간쯤 되면 유진이 데리고 들어가거든요.”

남매의 수면 루틴이었다.

두꺼비처럼 계단을 기어오른 동생이 방 앞에 도착할 시간이 되면 진혁이 데리고 들어가 자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유진이는 오빠 옆에서는 뒤척이지 않고 잘 잤다.

“엄마가 데려갈게.”

“그렇게 해도 또 올 텐데요. 이리 주세요.”

한유영은 얼떨결에 딸을 넘겼다.

호기심을 못 이긴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진혁이 팬티 안 입었니?”

순간 아차 싶었지만, 엄마가 아니면 어떤 여자가 스스럼없이 아들 착의를 점검할 수 있겠나.

여전히 잠에 취한 눈으로 진혁이 대단치 않게 웅얼거렸다.

“입었어요. 주무세요.”

“으응-. 잘 자 우리 아들.”

달칵-.

문이 닫힌 후에도 한유영은 아들의 방 앞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휘둥그레진 눈에 좀처럼 초점이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도대체 어떤 X부랄 년X이 우리 아들에 대고 헛소문을 내고 다니는 거여?’

억척스러운 농사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동네 기센 언니들과 어울리며 제법 욕을 욕답게 사용하게 된 한유영이었다.

새벽이라 그런 거겠지.

남편에게 듣기로 새벽과 아침이면 건강한 남자는 으레 그런다고 했다. 아빠와 다름없이 운동복 안에서 당당히 기상나팔을 부는 아들을 확인했는데 굴이 다 뭐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니 동태찌개나 끓여야겠다.

‘난 우리 아들 믿었다구!’

그제야 천길룡이 해준 조언이 생각났다.

김순복에게 가서 자랑할 계획도 빼놓으면 안 되지. 최태양이 중학생 때도 허구한 날 아들 자랑을 하던 김순복이다. 그게 왜 자랑스러운지는 몰라도 묘하게 아들 둔 엄마의 승부욕을 간질였더랬다.

김순복에게만 이야기하면 온 동네가 알게 될 터.

이제 동네에 진혁과 관련된 또 다른 소문이 돌게 생겼다.

‘우리 아들은 빤쓰 입고도! 어!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이때부터였다.

한유영의 가슴에 아들부심이라는 것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육상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웠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던 어깨가 천장을 뚫을 듯 올라갔다.

보잘것없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흠만 없어도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아니던가.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 딛는 한유영의 발걸음이 달에서 내려온 선녀의 그것처럼 우아했다.

***

진혁은 매일 방과 후 아빠와 일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늘 밝으시지만 요즘 유독 좋아 보이시네.’

홍기준 외에도 의지할 사람이 생겨 손광연은 든든했다.

손광연이 막대기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이쪽 달덕면을 최적의 입지로 꼽나 봐.”

뚱한 얼굴의 진혁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거긴 지형도 평지가 아니고 읍내에서도 먼데 의외네요.”

“그렇긴 한데 주민들 반대가 거의 없을 곳을 선정한 거지. 공군부대 가까이 사는 주민들이라 그런지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야.”

“추진이 빠를 거란 뜻이겠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광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읍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겠네요.”

“그렇지. 진혁이 졸업한 학교 앞으로 가면 되는데, 내년에 2차선으로 확장 계획이 있대. 80키로로 달려도 뭐라 할 사람 없어.”

손광연은 80키로를 힘주어 말했다.

유독 시속 80키로에 집착하던 아들 아니던가.

“공단은 언제부터 조성한대요?”

“부처 간 협상에 시간이 걸린다나 봐. 예산 문제도 걸려 있으니 내년 초에나 가능할까.”

“세인 그룹이 힘쓰면요?”

“알잖니. 기준이는 정치권에 줄 대는 거 싫어해. 걔도 그거 병이야. 결벽증 같은 거. 정치인하고 밥먹을 일 생기면 똥이라도 묻는 줄 알아.”

이해할 수 있었다.

회장이던 시절에도 홍기준은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 일이 있다. 물론, 가지 않은 게 잘된 일이 되기는 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기업인들이 청문회에 줄줄이 불려갔었으니까.

아무튼, 비록 초청 거절을 다룬 건 아니었지만 세인 그룹은 연일 언론의 포화를 맞고 고강도 세무 감사를 받아야 했다.

‘자기가 세운 원칙이 그랬다지만 직원들 고생도 예상을 하셨어야지.’

노인네 혼자 고생 좀 했으면 젊은 사람들이 다크서클 문지르며 피똥 쌀 일은 없었을 거 아닌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진혁을 보며 손광연이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우선은 네 면을 분양받기로 했어. 여기랑, 여기-.”

어째 아들에게 보고하는 모양새인데도 손광연은 신난 모습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사업을 할 것을,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특혜는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아. 지역 경제 기여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송의원 말로는 입주 신청 기업들이 죄다 다른 지역 기업이래. 참여 업체도 적어서 어차피 부지도 남아.”

“돈이 많이 들겠네요······.”

예산 지원이 따른다지만 공장 네 동과 사무실을 한 번에 짓는 일이다. 자기 자본 없이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땅을 처분해야 할 터, 땅에 대한 아빠의 애정을 아는 진혁으로서는 손광연이 느낄 상실감을 가늠키 어려웠다.

아들의 우려를 헤아린 손광연이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걱정 마. 적어도 이번엔 땅을 팔 필요도 없고, 담보 대출받을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이런 보잘것없는 일에 내 피 같은 땅을 팔 수는 없지.”

“어떻게요?”

“친구 잘 두면 가능하지.”

아들과 눈이 마주친 손광연이 찡긋 윙크를 했다.

홍기준의 눈꺼풀 경련과는 궤를 달리하는, 완벽한 카사노바 윙크였다.

‘우웁-. 도레미파쏠린다.’

욕지기가 쏠리는 것과 별개로, 진혁은 아빠에게서 어떤 기운이 싹튼다고 느꼈다. 이런 걸 두고 활력이라 칭하던가.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업이라 하면서도 이리 에너지를 뿜뿜하는 걸 보면 아빠도 내숭 덩어리다.

“그런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더라. 조만간 서울 다녀오기로 했어.”

“주무시고 오시겠네요.”

“그래야겠지.”

“집은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걱정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우리 집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거라더라.”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얼마나 우수한 요원들인지 인사 서류로 확인한 터였다.

손광연을 홍기준의 제갈량으로 알고 있는 진혁으로서는 홍기준의 조치도 이해할만했다. 서울로 올라와 함께 일하자는 것을 거듭 거부한 아빠였으니까.

“그 삼촌들, 상견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골 인심이라는 게 있는데 밥이라도 한 끼 먹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밥은 엄마가 하겠지만 진혁도 도울 생각이다.

“기준이 승인이 없으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래.”

“그 삼촌들도 고생이겠네요.”

“그 문제도 이번에 만나서 해결하기로 했어.”

“해결요?”

“보나 마나 우리집 주위에 경호동 짓겠지. 거기에 땅 좀 내줘야지. 비싸게.”

비싸게 라는 말을 강조하며 손광연이 한 번 더 윙크를 했다.

아빠가 즐거워 보이는 건 좋았지만 진혁은 제 눈을 찌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렇다고 아빠 눈을 찌를 수도 없고.

‘그만!’

왜 남자끼리 윙크란 말인가.

***

갯벌을 파다 보면 별게 다 나온다. 낙지, 조개, 짱뚱어, 게 등 마땅히 나와야 할 생물들부터 깨진 도자기, 안 깨진 도자기 등 조상의 흔적까지. 자전거, 오토바이 등 탈 것도 캐낼 수 있었다. 뭐, 사용하기는 어렵지만.

육영구가 캐낸 것 중 가장 특이한 물건을 꼽는다면······.

가을의 어느 날, 아직 해가 길 때 뻘낙지를 잡으려고 열심히 삽질을 하던 육영구의 삽 끝에 단단한 게 걸렸다.

“이이? 이게 뭐여?”

또 굴껍질 뭉치일 거라 생각했는데 삽날과 손에 느껴진 감각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다 단단한 것이 틀림없는 도자기구나, 마침 개밥그릇 바꿀 때가 됐는데 잘 되었다 생각하며 몇 번의 삽질이 이어졌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의외의 물건이었다.

“이이? 이게 뭐여? 이런 시부럴거, 이거 폭탄 아닌감?”

길이는 한 뼘가량이었고 제법 묵직했다. 그 순간 육영구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 [불발탄 발견 시 군부대나 가까운 파출소에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을회관에서 반장이 방송하던 불발탄 처치요령을 떠올렸다.

“시벌눔덜 노상 조뚜 바쁘다구 지럴인디 읍내 가는 길에 갖다주야지이-.”

육영구는 포상금을 기대하며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 포탄을 함께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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