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 보잘것없는 태동 >
이 집에서 손광연을 만만히 보지 않는 존재는 장군이뿐인 듯했다.
벌렁 자빠진 장군이 배를 쓰다듬으며 손광연이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빠는 정말 몰라. 억울해.”
진심으로 짓는 억울한 표정이 아니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맹렬히 가열되는 정수리의 반응이 그러했고,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도 그랬다.
‘수상한 구석은 없으신데.’
진혁인들 성인이 되어 이런저런 서류를 발급해보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더 꼼꼼히 확인하고 소중하게 관리했더랬다. 활자로만 존재하는 이름들로 말미암아 제가 존재했으니. 밤새 그 이름들을 쓰다듬으며 엄마, 아빠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옹알거렸던가.
손광연이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어.”
“네······.”
서류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광연은 재벌의 친족이 아니니 유산 다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전협정 중일 때 어느 고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 군적에서 확인이 안 되니 나라에서 유공자 인정을 해주지 않은 모양이야. 그때 학도병이니, 무명용사니 하는 분이 얼마나 많았니. 그래서 할머니 혼자 고생 많이 하셨지. 스무 살이나 되셨을까······.”
말을 하면서도 장군이를 쓰다듬는 손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할머니 혼자 아빠 키우는 게 안 되어 보였는지 박운철 아저씨가 잠시 돌봐주신 모양이야. 상인조합인가? 봉급으로 쌀을 주니까 거기서 일하시다 만났는데 배우 시켜준다고 그랬나 봐. 그게 오해를 사서 그 집 아주머니가 집에 쳐들어와서는 할머니 머리채를 잡고, 할퀴고, 때리고-. 그 일로 아빠를 위해서 할머니도 그쪽과도 연을 끊으신 거지.”
후우-, 손광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손문예가 어느 밤 사고를 당했고, 그 배후에 박운철의 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밝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으니까. 끝내 의심을 버리지 않은 그들이 자신을 미행했으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빛나는 아들의 눈빛을 보니 설명하지 않아도 그쯤은 예상할 듯했다.
“대학 다닐 때 그 집 딸래미가 누나랍시고 찾아와서 밥은 몇 번 사주더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안 닮았어. 하나도. 나 박 씨 아냐.”
고개를 가로젓는 손광연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장군이 배를 쓰다듬는 손도 잘게 떨고 있었다.
‘친자 검사면 해결될 일 아닌가? 아, 그땐 그런 게 없었나.’
진혁은 아빠의 슬픔을 잠시 외면했다. 지금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니까.
안타깝지만 조부모의 일은 알아낼 수 없다. 남아있는 기록도, 증인도 없을 테니.
그렇다면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데 결국, 사주한 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안갯속을 헤매는 꼴이다. 그건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짓이다.
진혁은 더 묻기를 관두었다.
문석일이 돌아오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 입으로 적수가 없는 최고라고 밝힌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문석일이 돌아오기만 기다릴 순 없다.
마냥 기다리는 일은 성미에 맞지도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빠, 바둑둘까요?”
손광연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내 자식이 슬퍼하는 아빠를 위로해주려는 거구나!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개벼룩이나 잡으면서 하긴 좀 그렇지.’
진혁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
일단 운을 띄웠으나 진혁은 한동안 말을 아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진혁의 직선적인 말투 때문에 움찔하는 아빠의 모습을 너무 자주 본 탓이고, 둘째는 엄마가 불안에 떨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셋째로, 어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이제 따로따로 비밀을 간직한 채 살 수는 없어. 모두 알아야 해. 설득을 위해서는 증거도 필요하고.’
그러자면 문석일이 필요했다. 그가 들고 올 결정적 증거가 절실하다.
치료를 마치고 연락을 하기까지는 별일 없을 것이다. 의뢰를 맡긴 자도 문석일의 연락을 기다릴 테니. 문석일에게도 어떻게 행동하라고 지침도 내려둔 터였다. 그들이 다치지 않고 돌아오는 게 중요하니까.
딱-.
흰 바둑돌이 손광연의 대마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손광연이 살리려고 아등바등 애쓰던 군세가 사면초가에 처했다.
“어어-? 대마불사랬는데? 야아-, 이거 어쩌냐.”
여독이 풀리지 않아 피곤한 얼굴의 손광연이 뒷목을 잡았다.
아들이 오랜만에 바둑을 두자기에 좀 봐주려나 했는데, 이 자식은 삼강오륜을 갯벌에 처박았나. 공경해도 모자란 어른을 사정없이 공격한다.
“아무리 대마라 해도 오래 준비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지요?”
진혁은 아빠가 주눅 들지 않도록, 엄마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돌려 말했다.
아들의 어설픈 흉내에 손광연이 이상하게 웃었다. 제발 저것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아내도 가끔 흉내 내던데, 유진이 외의 사람이 하면 속이 영 좋지 않다.
“전쟁 준비는 오랫동안 은밀히 하되 압도적인 전력을 준비하래요. 그리고 일단 시작한 전쟁은 빨리 끝내라고 했어요.”
“그렇지······.”
손광연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이 자식은 분명 내 자식인데 늙은이처럼 이야기한다. 볼수록 신기한 자식이다.
“세상이 아무리 평화로워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고도 했어요.”
“그것도 그래. 그래서 군비를 확충하는 거겠지. 그러자면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할 테고.”
“보이는 적은 오히려 위험하지 않대요.”
“그래.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적에 대비를 하는 거 아니겠니.”
바둑판을 노려보던 손광연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아들을 보았다.
“진혁이 아빠한테 무슨 할 말 있니? 뭘 그리 빙빙 돌리고 그러니?”
“직설적으로 말하면 무섭다면서요.”
아니, 이 자식이 나긋하게 말하는 것과 수수께끼처럼 빙 둘러 말하는 걸 동일시하고 있네. 제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걸까? 한유영도 원하는 게 있을 때면 대개 옆구리를 찌를 뿐 대놓고 말하는 일이 별로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촌에서 자라서 그런가?
넓어진 손광연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바람이 뿜어졌다.
“진혁아. 혹시 추석 때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니? 그거라면-.”
손광연은 아내를 힐끗 살폈다.
유진이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느라 듣지 않는 눈치였다.
“삼촌들 많이 깔려 있어서 괜찮을 거야.”
“아뇨. 그 얘기가 아니에요.”
손광연의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진혁의 음성은 나지막했고 억양은 담담했다.
“웅크리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요. 땅도, 가족도.”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챈 손광연이 이마를 쓸었다.
어쩔 수 없이 차오른 한숨을 고요히 내보냈다.
‘농사지으며 조용히 한세월 보내려던 계획은 끝이구나.’
사람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손광연이다.
일부러 체통 따위 잊고 나사 빠진 행동을 하고, 아내 앞에서 덩실덩실 엉덩이춤을 추고, 유진이가 머리끄덩이를 잡아도 바보처럼 웃었다. 웃는 가족을 보는 게 좋아서, 웃음소리가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서.
······ 훗날 자신이 스러져도 가족이 슬퍼하지 않고 그 추억에 기대 웃기를 바라서.
포위되어 벌벌 떠는 대마에 다시 시선을 내린 손광연이 입을 뗐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두운 표정을 부언한다.
“전쟁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이제 달리 접근해야 하는 현실임을.
“이용해야죠. 시스템을 이용하고 인맥을 활용하고.”
“시스템이라······. 그렇지 바둑판을 벗어나면 더이상 바둑돌의 자격이 없지.”
손광연이 턱을 쥐었다. 이 순간 자신만큼 키가 큰 아들은 더이상 사춘기 소년이 아니었다. 그 역시 푼수 아저씨가 아니었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적은 바둑판 바깥에서 돌을 날리고 있다. 상대가 더럽게 나온다 해서 함께 더럽게 굴 필요는 없다. 쌍욕을 하는 낭인들을 상대로 빙글빙글 웃어주는 사람이 승자로 남듯, 룰을 지키며 승자가 될 생각이다.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 진창을 뒹구는 개싸움 다름 아니다.
“사람도 중요하죠. 삼국지만 봐도 거병하기 전에 평소 친분을 쌓아둔 영웅들을 먼저 찾잖아요.”
“인맥은 좀 그렇네. 정치인들 후원금 한 번 낸 적 없어서 말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있잖아요.”
아, 기준이가 있었구나.
늘 머리 나쁘다고 놀리기만 하느라 얼마나 잘 나가는 놈인지 잊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만의 세력 없이 인맥에 기댄다면 식객이나 다름없다. 그걸 알기에 아들도 아빠가 거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극을 하는 것일 테고.
진혁을 보는 손광연의 한쪽 입가가 고요히 올라갔다.
손책을 보는 손견의 심정이 이랬을까, 손광연은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자란 아들이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으니 가족 걱정은 줄여도 될 것 같다.
“시스템은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법치주의니, 민주주의니 해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힘 있는 건 돈이잖아요. 그 돈으로 사람도 사는 거고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돈을 버는 것만큼 확실하고 떳떳하게 힘을 쌓는 방법은 없을 터였다.
손광연은 아들의 생각이 저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분명 엄마 닮은 게 분명하다. 손광연은 열네 살 때 S+V+C 따위 영어 문장 형식을 외우느라 낑낑댔는데 사고의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전쟁은 안 좋은 건데, 대화로는 안 되려나?”
알면서도 한 번 물어봤다.
포기하기 아까운 평화였으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
“대화란 힘 있는 자들의 여흥이죠. 약자는 절박하기에, 강자는 대수롭지 않아서. 힘의 균형이 없는 사이에 나눈 대화는 진실될 수 없고, 약속은 오래갈 수 없다고 했어요. 장군과 병사의 말이, 사장과 사원의 말이 같은 무게를 가질 수는 없잖아요.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 도발을 하는 적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도 없고요.”
아차, 마지막에 또 직설적으로 말해버렸다.
그러나 손광연은 천천히 주억일 뿐 주눅 들지 않았다.
“흠. 그러자면 이사를 가야 하려나?”
손광연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 담겼다.
15년을 사니 이 촌마을에 정이 든 탓이다. 산과 들,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도 도시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다. 이제까지 일군 땅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교통도 편해질 거고, 통신도 앞으로 눈부시게 발전할 텐데 옛날처럼 위치기반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봐요. 직접 뭘 할 것도 아니잖아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죠. 지금은 전화나 팩스만 갖춰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건 아쉽지만, 홍기준이 있는 한 전생보다 더 빨리 초고속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을까. 역사의 흐름은 당연히 빨라질 것이다. 진혁은 거기에 편승하기로 작정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 거라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필요한 말도 아니었고, 아빠 정도 되면 제가 아는 것만큼이나 세상을 예측하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보는 눈 적은 시골이 내가 활동하기도 좋아.’
여차하면 침입자의 숨통을 끊어서라도 방어를 할 수 있다.
개싸움을 지양한다지만 개싸움에도 대비는 해야 하고, 개싸움의 종착지는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뿐이다.
손광연은 여전히 바둑판을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굳이 되물을 필요가 없었으니.
“어디 보자. 그럼 뭘 하는 게 좋으려나? 힘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뿌리내린 기반 특성을 살리는 게 중요해. 그게 곧 신뢰고 세상과 맺는 무형의 계약이지. 영업에서 설득력으로 작용할 테고.”
“농공단지 같은 거 안 들어온대요?”
질문이 아니었다. 유치하도록 만들라는 뜻이다.
어차피 수년 내로 소규모 단지가 들어설 테지만 몇 년 앞당기는 게 어떨까. 공단 규모도 대폭 늘려서. 곧 중국과 수교를 맺을 테고 농산물을 시작으로 교역이 늘어날 것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성 씨들이 읍내에 다수 거주할 정도로 최단 거리인 지리적 이점을 살릴 수도 있다.
‘뭐, 중국은 잠깐 이용하다 마는 거지.’
교역을 하더라도 저들이 어떤 족속들인지 알기에 적당히 이용만 하고 뒤통수 맞기 전에 손을 끊는 게 좋다. 전생에도 중국과 일본 법인 철수를 재빨리 추진해 손해를 최소화한 능력을 인정받은 진혁이었다.
호오-, 손광연이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일단 그걸로 시작하면 되겠구나. 내일 송 의원을 만나봐야겠다. 어차피 아빠 한번 만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니까. 많이 바빠지겠네.”
“아이템은 뭘로 하실 거예요?”
“많지. 막말로 지렁이를 팔아도 될 거야. 땅에서 나는 건 모두 팔 수 있어. 언젠가 물도 돈 주고 사야 하는 날이 올 거라던데 작물은 더 하겠지. 농사짓는 인구가 줄고 다 사 먹겠지. 요즘 교과서에서는 도시화라고 한다며?”
그럼 농산물 가공 쪽으로 방향을 잡으시려는 건가.
진혁은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 돈이 군자금이 되든, 왕국 건설 비용이 되든.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세를 확장하는 게 중요하다.
“부족할 거야.”
“과정이 건실하면 그 끝은 창대할 수밖에 없죠.”
“오래 걸리겠네.”
“지루하지는 않겠어요.”
“농사와는 달라.”
“다루는 도구와 접목하는 이론이 다를 뿐이죠.”
“많이 힘들겠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사람이 못할 일도 없잖아요.”
당연하게도, 가장 바쁜 사람은 손광연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바둑판을 보며 아들과 나누는 대화에 손광연의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