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 오해가 낳은 이해 (4) >
***
손광연과 한유영은 여행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동네를 일주했다.
진혁이 유진이와 함께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아들이 어련히 잘 챙기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 편히 이웃집에 들러 선물 전달식을 가질 수 있었다.
“무탈히 다녀왔소?”
“하하하! 어르신 덕분에요.”
가장 먼저 천길룡을 찾은 손광연이 호탕한 웃음을 선보였다.
천길룡에게 초콜릿과 하와이 꽃목걸이라 불리는 레이, 하와이언 셔츠를 선물했다. 셔츠는 흰색 바탕에 연두색과 주황색 꽃 그림이 들어간 디자인이었는데 한유영이 직접 고른 옷이었다.
“오호호-, 이거 너무 큰 거 같기도 하고······.”
천길룡이 곰방대를 들고 모델처럼 한 바퀴 빙 돌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셔츠가 의외로 마바지와 잘 어울려 손광연과 한유영도 몹시 흡족했다.
“원래 낙낙하게 입는 옷이래요. 동네 마실 다니실 때 입으세요.”
“오호호-, 이것 참. 나 같은 늙은이까지 신경 써주니 고맙소.”
“어르신 자주 놀러 오세요.”
“고맙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오. 부인은 잠깐 나 좀 봅시다.”
천길룡의 대화 제안에 손광연은 눈치껏 경관을 둘러보며 대나무숲 방향으로 이동했다. 하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지대가 선사하는 전망이 썩 훌륭했다.
“심지 굳은 어미는 자식을 먼저 믿어야지, 풍문에 귀 기울이지 않소.”
“네,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이 또 무슨 사고라도 쳤나? 한유영은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공손히 대답했다.
천길룡은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손광연과 한유영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곰방대를 흔들어 배웅했다.
손광연 부부는 다른 이웃에게도 레이와 초콜릿, 커피 같은 소소한 선물을 전달했다. 왕래가 빈번하지 않아 전혀 기대도 안 했을 이웃에게도 잊지 않고 기념품을 전했는데, 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하와이에 다녀왔으니 마음이라도 전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한유영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내심 손광연의 성공을 시기하던 이들도 부부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신세가 많았을 최미경의 집에 답례로 양주와 와인, 화장품을 건넸다.
선물을 한아름 받아든 김순복이 호들갑을 떨었다.
“허이구, 진혁이네는 미국물 먹더니 더 이뻐졌네.”
그도 그럴 것이, 동네 주부들 모두 뽀글이 파마를 하는데 한결같이 생머리를 고수하는 한유영은 여전히 아가씨 같지 않은가. 흑단 같은 생머리가 원피스와 잘 어울려 정말이지 시골에서 아이들 키우는 여느 주부들과 다르다.
“진혁이네, 잠깐 나 좀 봐.”
김순복이 한유영을 잡아끌었다.
눈치 빠른 손광연은 진돗개 누렁이에게 다가가 혀를 쩟쩟 차며 아는 체를 했다. 어째 보는 사람마다 한유영을 잡아끄니 하찮은 소외감마저 느껴졌다.
왕-!
“히익-!”
누렁이에게 물릴 뻔하고는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장군이 외에는 누구도 누렁이를 업신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의 업보였다.
김순복은 멀리 떨어진 손광연을 살피고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린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구 이런 말 해두 될라나 몰르겄네.”
“우리 사이에 못하실 말씀이 뭐 있겠어요.”
한유영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자 김순복이 결심한 듯 본론을 꺼냈다.
“그, 우리 진혁이 말여. 괜찮은 겨?”
“뭐가요?”
“아이고 남사시러라, 그게 그러니께-. 나두 워쩌다 들은 얘긴디-. 오해는 말구 들어잉? 나두 워쩌다 들은 겨. 아주 워쩌다-.”
김순복은 추석 때 들은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어쩌다 들었다고 하기에는 직접 경험한 것처럼 디테일이 살아있었는데, 모처럼 대화할 상대를 만나 내두르는 혀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김순복의 말을 들은 한유영은 머리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열 시간 넘는 비행에도 피로를 모르고 즐거웠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우리 아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진혁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드디어 엄마 귀에도 들어갔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주제가 두개골을 때리는 충격에, 한유영은 천길룡의 조언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
진혁은 부모님이 오셔서 너무 기뻤다.
동생을 돌보는 일이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 모두 모였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엄마! 엄마! 엄마!”
“아이쿠쿠-, 우리 공주님 이렇게나 많이 컸네?”
진혁은 일주일 만에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부리는 유진이를 보며 역시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오빠가 줄 수 있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였다.
그리고 다짐했다.
‘유진이를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해.’
앞으로는 불안을 안고 살아서도, 모험을 감수해서도 안 된다.
피해는 늘 애꿎은 약자의 몫이므로.
그건 그거고.
오랜만에 아빠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니 과거로 돌아온 날도 새삼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여보, 자기야. 우리 고사리랑 숙주 떨어졌나요?”
아빠가 반찬 투정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이건 정말 심각했다. 남편과 아들이 좋아한다며 엄마가 매끼 상에 올리던 나물이 사라진 것이다. 진혁도 함께 투쟁에 나서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나물을 좋아하던 진혁도 내심 궁금했는데 아빠가 나서서 물어주니 고마웠다.
유진이에게 하와이에서 구입한 꼬까옷을 입히며 우쭈쭈를 시전하던 한유영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남자한테 안 좋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지 묻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왠지 날이 서린 목소리였던 까닭이다. 이럴 때 더 물으면 다른 반찬도 치울지 모른다. 두 남자는 더 묻지 못하고 멧돼지 앞다리로 만든 고추장불고기에 젓가락을 뻗었다. 다행히 엄마가 돌아오니 식탁이 풍성해져서 불만이 크지도 않았고. 들기름 한 방울 떨군 계란프라이도 식욕을 자극했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이 반가워 푹푹 떠 넣으며 손광연이 갸웃거렸다.
‘난 괜찮던데······.’
엄마의 한기에 어리둥절하며 밥을 먹던 진혁이 아빠를 보았다.
가족을 위해 꼭 해야 할 말을 꺼내기 위해.
“아빠는 부자죠?”
“아빠가 부자인 게 아니지. 우리 가족이 부자인 거지.”
손광연이 아들을 보며 웃었다.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서 이미 자신보다 커진 것 같다. 집을 맡기고 오랫동안 어디 다녀와도 불안하지도 않고,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을까 동생도 끔찍하게 돌본다. 여러모로 듬직한 아들이다.
“집에 경비원 들이는 거 어떨까요? 숙소 하나 지어서요.”
“경비? 훔쳐갈 것도 없는데?”
손광연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집안에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돈을 벌 때마다 아내 한유영에게 선물한 보석 정도일까. 이번에 하와이에서도 보석과 진주를 사줬지만 그거 얼마나 한다고. 도둑맞을까 봐 돈을 땅으로 바꿨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겠지?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땅꾼으로 위장한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이 감시인지 보호인지 하고 있다고 홍기준에게 들었다. 그게 웬 미친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기 돈 들어가는 거 아니니 그런가 보다 했다. 사생활에 피해를 주지도 않으니까.
‘아마 진혁이는 기준이가 붙인 땅꾼들 정체를 모르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손광연은 홍기준에게 들은 대로 말하기를 주저했다.
가족들이 불안해할 수 있으니 그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아직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엄마랑 유진이 있잖아요.”
진혁은 자신이 집에 없을 때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했다. 아빠는 낮에 인부들을 부리시느라 집에는 엄마와 유진이만 있어야 한다. 문단속을 한다지만 마음만 먹으면 문이든, 창문이든 부수면 그만이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땅꾼들이 당도할 때까지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내와 딸.’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띵해지자, 손광연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그렇지. 가족만큼 중요한 게 없다. 재산을 노린 절도만 생각했는데, 그리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나니 신혼여행 생각에 들떠 깊이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경호팀은 먼 거리에서 대기 중이랬지.’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이미 경험한 손광연이다. 잘못된 정보와 작은 오해로도 사람을 해치는 세상인데 오랜 집념을 품은 자가 가족인들 그냥 둘까.
‘손광연, 이 멍청한 놈!’
손광연의 머리와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철없는 남자 흉내를 내다가 실제로 철이 없어진 듯한 모양새였다. 행복이 지나쳐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살았다.
“우리 집에서 엄마랑 동생만큼 중요한 재산이 어딨어요······.”
진혁이 한 차례 더 강조했다.
누군가는 철없는 아들이 가볍게 뱉은 말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묵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진혁과 마찬가지로, 손광연에게도 가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게다가 진혁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꺼낼 자식이 아니다. 손광연은 분명 추석 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한번 고민해보자.”
손광연은 슬쩍 아내의 눈치를 살핀 후 아들에게 눈짓을 했다. 따로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집이 없어지면 다시 지으면 되고, 재물은 다시 모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잖아도 홍기준의 계획을 들은 터였다. 음지에서 양지로 어쩌고 하던데.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다. 때맞춰 아들이 화두를 던지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슬슬 말할 때가 되긴 했는데.’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고민이다.
외모와 달리 대장부 같은 성격의 아내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요, 사춘기답지 않게 진중한 아들을 염려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조또 아는 게 없어.’
누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위협하려 드는지 손광연은 알지 못한다.
홍기준조차도 그 배경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리저리 손을 써봤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고.
- “그런 더러운 짓을 할 놈들이 이 나라에 한둘이냐? 그나마 너와 연결고리가 있는 건 대정뿐이지.”
대정에서? 대정이 무슨 이유로? 대학 시절 스스로 누나라 칭하던, 한참 나이 많은 여자와 잠시 교류가 있었으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고 원한을 살만한 짓도 하지 않았다.
‘돌겠네. 누가 그 지랄을 떠는지도 모르니 찾아가 따질 수도 없고.’
누군지 알아낸들 저를 죽이겠다는 놈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놈들 피해서 시골에 정착했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 누군가의 미행을 눈치채고 신고해도 그뿐, 경찰의 도움은 얻을 수 없었다. 경찰로부터는 멀쩡한 남자가 왜 제 몸 하나 간수 못하느냐는 핀잔만 듣기 일쑤였다.
그런 손광연을 도왔던 이는 유세라의 아버지가 유일했다. 손광연은 철저히 혼자였다. 그래서 지금의 가족이 더없이 소중하다.
아빠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기에, 생각할 시간을 줄 겸 진혁은 계속해서 밥을 떠 넣었다. 고사리와 숙주나물이 없어서 아쉽지만 역시 엄마가 해주신 밥이 최고다.
벌써 네 그릇째, 한유영은 소식하는 아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가엽게 보는 눈빛이었다.
손 씨 부자와 달리 다른 근심을 품은 탓이다.
어릴 때 너무 나물 반찬 위주로 밥상을 차려줘서 그런 걸까. 동태찌개나 명태 코다리찜, 고등어 대가리 젓국 등 저렴한 식자재에 의존해서 그런 건 아닐까. 무리해서라도 고기 요리 많이 해줄 것을······.
‘성찬이는 빨간 비디오 몰래 보다가 혼났다는데.’
진혁은 안방에 있는 비디오에 손도 대지 않는다.
그래서 사춘기인데도 저리 고요한 성정을 보이는 걸까.
다 큰 아들 벗겨서 확인할 수도 없고.
에휴-.
‘엄마가 미안해.’
매일 밤 세상 마지막 날을 맞이한 사람처럼 달려드는 남편을 보면 친탁은 아닌 것 같고. 늘그막에 겨우 한유영을 얻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 외탁 외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다.
***
진혁은 추석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손광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들을 뿐 화를 내거나 진혁의 말을 끊지 않았다.
“여긴 둘뿐이니 이제 얘기해주세요.”
“진혁아, 아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