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88화 (88/338)

# 88 < 오해가 낳은 이해 (3) >

***

연휴 마지막 날, 진혁은 유진이와 장군이를 달고 이해원네 구멍가게를 찾았다. 엄마가 계시지 않을 때 유진이에게 콜라를 사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웁써-. 사람덜 많이 모일 땐 웁써서 뭇 팔지. 사이다랑 환타두 웁써.”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해원 어머니의 말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유진이였다.

고개를 떨군 유진이는 원망 섞인 눈초리로 텅 빈 음료수 냉장고를 흘겨보았다. 달콤한 간장을 사주겠다는 말에 하늘을 날듯한 기분으로 따라왔는데, 짧은 다리만 아프게 생겼잖아.

‘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생전 처음 보는 동생의 서러운 표정에 진혁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회관 윷놀이 행사 때 몰래 한 병 챙길 걸. 사실 챙겨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더랬다.

“유진아, 오늘은 다른 거 사자. 오빠가 다음에 꼭 사줄게.”

유진이는 진열대를 쓱 훑더니 라면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기에 진혁은 몸에 좋지 않으니 다른 거 먹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진아, 그게 뭔지는 알고 집은 거니.

“유진아, 오빠가 목말 태워줄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유진이는 천천히 땅만 보고 걸었다. 웬일로 오빠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토라진 홍수정이 겹쳐 보였다. 꼬맹이들의 뒤통수를 보고 있노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은데, 그 심정의 바탕에 실망감이 자리했다는 걸 아는 까닭에 진혁의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아 콧구멍으로 한숨을 내보낼 때였다.

까드득, 까드득-.

으응? 이건 무슨 소리인고?

진혁은 냉큼 달려가 허리를 숙여 동생을 들여다보았다.

아, 생라면 먹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구나. 또 오해했네.

큭-!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진이가 오빠를 보며 히죽 웃었다.

“오빠, 이거 맛있어요.”

“느허허-, 많이 먹어.”

금세 기분 풀린 동생이 기특했다.

까드득-.

유진이 옆에서도 생라면 씹는 소리가 들렸다. 먹는 데 빠지지 않는 장군이였다.

‘귀여운 것들.’

진혁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웃음꽃이 지지 않는 오빠 얼굴이 신기했을까. 진혁을 보는 유진이 눈빛은 신기한 동물을 관찰할 때와 비슷했다.

행복한 연휴가 그렇게 지나갔다.

***

엄마가 여행가셨으니 3일쯤 결석하고 동생을 보려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빠악빠악-!

“오빠, 오빠아-. 학교 가요.”

동생 핑계 대며 조깅도 쉬고 늦잠을 자려 했는데, 이 조그만 녀석이 오빠를 깨운 거다. 머리를 가격하며.

그래서 갔다. 학교.

어딜 가나 관심을 끄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평범한 존재는 그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특별한 점이 있어야 한다.

가령, 남자 중학교로 등교하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라든가.

유진이를 아는 친구들이 버스에서 아는 체를 했다.

“유진이 오빠 따라서 학교 가는 거야?”

“녜, 에헤헤. 좋아요.”

오빠를 따라 학교에 가는 유진이도 신났고, 진혁과 함께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친구들도 신났다.

진혁만 신이 나지 않았다.

‘어질어질하네.’

버스 멀미인가.

멧돼지에게 초크를 거는 초인이지만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다른 아이들 수업에 지장을 줄지 모르니까. 이기적으로 살았어도 남에게 피해 줄까 늘 조심하던 성격은 여전했다.

“우리 애기, 오빠랑 학교 가니까 좋아?”

“녜! 에헤헤-.”

동생을 안고 정거장에서 학교까지 걸었다. 품에는 꼬맹이를 안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손에는 도시락을 두 개나 들었다. 이상하게 보거나 비웃는 녀석이 있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른 학생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유진이를 예뻐하는 듯 보여 다행이었다.

진혁은 교무실부터 들러 사정을 설명했다.

모든 교사들이 유진이에게 다가와 볼을 만지고, 어떤 선생님은 용돈을 건네기도 했다. 자신들은 괜찮으니 동생 놀라지 않게 잘 챙기라는 덕담도 건넸다.

‘사람들 괜찮네.’

예전엔 보살핌을 받지 못해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교사들도 좋은 사람들 같았다. 교사들 사이에서 손광연의 존재감이 어떤지 모르는 진혁으로서는 선택적 관용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2학기에 부임한 교사는 진혁이 돌아간 후 소년가장이냐고 물었다가 이병세로부터 정신교육을 들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런 걸로 교사 잡는 거 아냐. 지켜보던 교감 선생이 이병세를 말렸다.

누가 말리자 이병세는 한술 더 떴다.

“아, 이것 좀 놔봐요-. 김 선생 너 학교생활 꼬이고 싶은 겨?”

“모를 수도 있······.”

서울에서 온 부잣집 도련님이라더니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지 않는가. 이병세로서는 후배를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의도였다.

“모르기는 인마! 알 건 알어야 하는 거 아녀?”

“제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다 너 잘 되라구 허는 소리염마-.”

그러나 다른 교사들의 눈에는 달리 비쳤으니. 교사 월급보다 집에서 받는 용돈이 더 많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꾹꾹 눌러두었던 열등감이라는 것이 폭발한 것으로 보였다.

진혁은 남는 책걸상을 끌어다 옆에 놓고 유진이를 앉혔다.

진혁이 사는 동네에는 어린이집, 당시 유아원으로 불리던 시설이 전혀 없었다. 7세 어린이가 다닐 수 있는 병설유치원 외에 유아교육이라는 것이 전무했으니, 그래서 진혁은 아직 말을 더듬거리는 유진이를 보며 미래의 또래에 비해 동생의 성장이 느린 게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게 답이 뭐지?”

“이!”

남자 중학교 교실에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아이 목소리가 울렸다.

진혁의 옆에 앉아 얌전히 수업을 듣던 유진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대답을 한 것이다.

“응······. 그렇지. 답은 ‘이’야.”

뭘 알고 대답한 건지는 몰라도 정답이었다.

교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칠판에 숫자 2를 썼다.

진혁은 유진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유진아, 수업 중에는 조용히 하기로 약속했지?”

“녜, 헤헤.”

진혁은 아빠보다 아빠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뺨을 쓰다듬었다.

무슨 뜻으로 2를 외쳤는지는 몰라도, 아직 숫자도 모르는 녀석이 답을 알 리 없다. 그 후로 이어진 수업에서 유진이는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 외에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빠 말을 참 잘 듣는 동생이다.

“와-, 반장 동생이야? 존-, 너무 귀엽다!”

“동생이 아니라 딸 같은디? 반장, 솔직히 말해 봐.”

진혁의 친구들도 중학교 교실에 찾아온 다섯 살 꼬맹이를 예뻐했다. 진혁의 짝꿍 채규호는 물론이고, 이승훈과 신우성도 씨름부에서 나온 빵과 우유를 유진이에게 주며 환심을 사려 들었다.

다른 반의 박용석도 초콜릿을 주며 생색을 냈는데, 아무래도 진혁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겠지. 진혁은 이렇게 착한 녀석이 왜 윤성동 같은 녀석과 어울렸을까 생각하다가 지워버렸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금세 방향을 바로잡느냐,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조슬찬도 찾아와 오랜만에 만난 유진이에게 아는 체했다.

“어이구-! 우리 유진이 슬찬이 오빠 보구 싶어서 온 겨?”

“-니요. 에헤헤-.”

유진이의 솔직한 대답에 진혁은 긴장했지만 조슬찬이 제대로 듣지 못한 눈치라 다행이었다. 사실 유진이는 조슬찬 이야기를 종종 했다. 지금의 대답은 단지 오늘 학교 방문의 이유가 조슬찬 때문이 아니라는 뜻일 뿐인데, 듣는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나.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에서 구경하러 오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사탕이나 초콜릿 등 간식이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아-.”

유진이는 그것들을 받아 분홍색 토끼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유진이 안 먹어? 엄마한테 혼날까 봐 그래? 오빠가 비밀로 해줄게.”

“장군이, 같이 먹어요. 에헤헤.”

아, 맞다.

장군이 혼자 집 보는구나. 버스에 오르려는 걸 겨우 떼어놓고 왔는데 계속 마음에 걸렸다. 밥 떨어지면 최미경 청소년네 집에 가서 얻어먹을 테니 굶을 걱정은 없지만, 집에 혼자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던 녀석이 잘 지낼지 걱정도 되었다.

‘학교까지 찾아올지도 몰라.’

똑똑한 녀석이니 충분히 현실성 있는 우려였다.

장군이는 입양했을 때부터 잔반을 먹었다. 사람과 같은 음식, 정확히는 진혁의 가족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사료를 줘도 먹지 않는다. 하여간 웃기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도토리도 먹었지.

아무튼 유진이도 장군이를 가족처럼 생각하니 다행이었다.

체육 시간에 유진이는 그네를 탔는데, 떨어지지 않도록 챙기며 진혁은 동생이 좋아하니 계속 밀었다. 나는 밀어주는 사람 없어서 앉아있기만 했는데, 동생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유진이 학교 좋아?”

“녜! 에헤헤-.”

“그럼 내일도 올까?”

“녜! 내일도, 내일 내일도 와요.”

어디 보자. 부모님은 모레 오시니까 어차피 모레까지는 데리고 와야겠구나. 역시 유진이는 똑똑하다. 부모님 귀국 스케줄까지 염두에 두고 있잖아.

도시락을 먹으려 했는데 담임 교사 김선숙이 진혁과 유진이를 데리고 분식집에 갔다. 비빔밥과 김밥이 메뉴였는데, 진혁은 콜라를 한 병 주문했다.

드디어 손유진 인생 최초의 콜라를 맛보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오오오오-?”

콜라를 맛본 유진이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시 정지 상태를 보였다. 큰 눈동자가 멧돼지와 조우했을 때보다 심하게 요동쳤다.

한 모금, 두 모금.

손유진은 행복했다.

그래, 부모님 눈 피해서 콜라도 마시고 하는 거지. 김선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락은 저녁에 먹어야겠다.’

오후가 되면 낮잠을 자야 하는 유진이인데, 쉬는 시간에도 졸지 않고 오빠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구경하는 유진이가 중학생들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 유진이를 안고 진혁이 투레질을 했다.

긴 하루였다.

요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 하루가 매일 길다.

‘지친다, 지쳐. 육아가 가장 힘들구나.’

엄마가 보고 싶어 입술을 씰룩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장군이가 반겼다.

최미경의 어머니 김순복이 대견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장군이가 하루 종일 여기서 누덜 기다렸어.”

“정말요? 밥도 안 먹구요?”

“안 먹기는 개뿔이-. 이늠의 개새끼가 우리 황구 밥까지 다 처먹었어. 뭔 놈의 발바리 새끼가 진돗개 밥을 뺏어 먹는지-. 그 새끼 아주 용감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김순복이 환하게 웃었다.

장군이의 볼록한 배를 보며 진혁은 조금만 미안해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털이 듬성하게 뽑힌 누렁이를 보니 장군이는 심심할 틈도 없었을 것 같다.

최미경 청소년네 진돗개 누렁이는 아주 사나운 수컷인데도 장군이가 으르렁거리면 제집으로 숨는다. 방학 때 짝짓기 사건 이후에는 아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장군이도 힘숨견 아닐까.

이제 닭장에 들러 닭 모이를 주고, 장군이 물과 밥을 챙기고, 유진이를 씻기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끝이다. 김치찌개에 추석 때 입수한 여러 부침개를 넣고 잡탕을 끓일 생각이다.

“오빠, 숙제해요.”

유진이는 하루 학교에 데려갔더니 숙제도 기억한다. 읽으라는 동화책은 제쳐두고 수업을 듣는 것 같더라니. 진혁은 어쩔 수 없이 숙제를 했는데, 오빠가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빠른데도 유진이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감시했다.

“오빠, 요기랑 요기랑 안 했어요.”

“응?”

진짜 제대로 감시하네? 유진이는 오빠가 일부러 빼먹은 부분까지 제대로 짚었다. 동생이 이러는 게 신기하지만 어릴 때 천재라 해서 나이 들어서도 천재가 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단기 집중력은 좋다고들 하지 않던가.

‘내 동생이니 기본은 있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맛이 개운치 않아 유진이를 유심히 보았다.

아직 한글은커녕 숫자도 배우지 않았는데 글을 읽는 것 같아 수상하다. 하루 학교 다녀왔다고 말도 부쩍 는 것 같고.

‘힘숨딸인가.’

장군이부터 유진이까지, 집안에 능력자가 너무 많다.

드디어 숙제를 마친 진혁이 책을 덮으며 가만히 주억였다.

‘내가 제일 평범해.’

헛소리를 삼키며 달력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디 가던 날짜도 어느덧 흘러, 부모님과 재회할 날이 가까이 왔다.

그리움과 별개로 비장감마저 들었다.

‘아빠랑 할 얘기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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